제1장. 나부터 힘을 기르자 #8/10

8화. 1905년 공립협회 결성

by 은명

8화. 1905년 공립협회 결성



그해(1904) 9월, 뜻밖에도 고향 친구인 이강(1878~1964)과 임준기(1883~1950)가 안창호의 거처로 찾아왔다. 이들은 근당 선생의 사랑방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이강의 본명은 정래이고 아호는 오산이다. 안창호와 무인년생 동갑이다. 이강의 할아버지는 용강군에서 이름난 문장가로 알려졌다. 이강은 할아버지를 빼닮아 글을 잘 썼다. 이강의 글에는 언제나 민족혼이 살아있었다. 이강은 김창승 문하에서 한문과 소학을 공부했고, 중국 안동현으로 유학 갔다가 뜻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감리교에 입교했다.

이강의 5촌 당숙이자 동갑인 이병확은 독립협회 관서지부 활동을 하면서 안창호와 절친이 되었다. 이병확은 이강에게 안창호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병확은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의로운 혈기로 활빈당에 들어가 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병확이 활동했던 활빈당은 동학농민혁명의 잔류세력으로 민족적, 계급적 자각이 투철했던 의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봉건 수구들의 탄압을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어 살면서 반봉건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을사늑약 이후 항일의병 무장대열에 합류했다. 이강은 의적 활동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병확을 대신해 안창호를 얻었다.


안창호는 이들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잘 왔네. 그런데 이 머나먼 곳까지 어떻게 오게 된 건가?”

이강이 임준기 얼굴을 힐끗 보더니 대신 말했다. “근당 어른이 도와주셔서 하와이 이민선을 탔네. 하와이는 말도 마세. 사탕수수밭에서 인간적인 대우는커녕 일당도 제대로 못 받고 죽도록 노동만 했다네.”

안창호는 임준기와 악수하면서 말했다. “오, 그랬는가? 아무튼, 잘 와 주었네. 근당 어르신은 안녕하신가? ” 임준기는 근당 임기반의 종손이었다.

임준기도 반가운 얼굴로 화답했다. “종조부는 오로지 안창호 형님만 최고로 아십니다. 하와이 배를 타는 목적은 1년 버텨 돈을 모아 안창호가 있는 본토로 가는 거라면서.... 아무튼, 형님들! 저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안창호는 근당 선생의 안부가 궁금했다. “내가 요코하마항을 떠날 때 근당 선생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있어 안심했었는데, 그때 하필 선생께서 신체검사에서 밀려나다니 안타까웠소.”

임준기가 말했다. “그래서 얼마 안 있다가 느닷없이 진남포 인력개발회사에 관리직책을 맡았다면서 청년들을 사랑방으로 불러 모으셨죠. 하와이 이민의 길이 열렸으니 배를 타고 떠나라는 것이었지요. 사탕수수밭에서 1년쯤 일하고 안창호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배를 타라고 조언했습니다. 나는 무조건 가족을 끌고 하와이 배를 탔던 것이고요. ”

이강이 말을 받았다. “이재수 형님과 나도 근당 선생과 의논 끝에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했었소. 하와이 한인사회는 엉망이었소. 그래서 우리는 근당 선생이 하와이로 건너와서 한인사회를 지도해 주기를 바랐소.”

안창호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서 근당 선생은 하와이로 오셨소?”

임준기가 대답했다. “급하게 호놀룰루로 오셨지요. 한인 목사들을 일일이 찾아 나서며 권익보호단체를 결성하자고 설득하셨습니다. 윤병구, 윤승하 등의 동의를 얻었고, 김익성, 최윤백 등 성공회 계와도 동의를 얻어 ‘신민회’라는 회 명칭에 합의하였는데, 임모씨가 신민(新民)이란 회 명칭과 국정쇄신 강령을 반역행위라고 정부에 고발했답니다. 그래서 8월 호놀룰루신민회 결성 대회를 앞두고 정부에 호출당했습니다.”

안창호가 신민회라는 단체 이름에 감탄했다. “신민회라...! 호놀룰루신민회! 역시 근당 어른 생각은 대단하시오. 이민 동포들이 새롭게 태어나자는 주인의식을 강조하셨던 거요.”

이강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근당 어른이 귀국하시고 호놀룰루신민회는 홍승하를 대표로 선출해 놓고 얼마 못 가 해산했소. 내부에는 언제나 보수와 진보,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얘기요. 지난 4월(1904년)에 해체되는 것을 보고 이리로 오게 되었소.”

임준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지요. 신민회가 해산된 후 윤병구와 정원명, 강영소, 김성권 등 10여 명이 정치단체 말고 친목회를 결성하자고 나섰습니다.”

이강이 화제를 돌려 말했다. “안 선생, 나는 그동안 공부하려고 이를 악물고 학비를 모았다네. 하와이 농장에서 준기 아우를 만나 간신히 이곳으로 온 셈이지.”

안창호는 이강의 말투를 흉내 내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정래, 3년만 더 있다가 공부하세. 우리 동포들의 일이 더 급하네.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권익 보호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네.”


안창호, 이강, 임준기는 리버사이드시 파차파 에비뉴 1532번지에 노동주선소를 차렸다. 이강이 미국인의 신임을 얻어 농장 주인의 돈 천오백 달러를 빌려 노동 사무소를 차린 것이다. 이들은 야학과 신학강습소를 따로 열고 한인들이 의식을 깨우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열심히 일한 결과 한 달 만에 빚도 다 갚을 수 있었다. 이에 감동한 미국인 농장 주인은 아예 회관을 거저 빌려주었다. 동포사회는 점점 안정되어 갔고 모범적인 공동체로 성장해 갔다. 1905년 3월 28일, 안창호 부부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필립(必立)으로 지었다. ‘나라가 반드시 바로 서야 한다.’라는 꿈을 이름에 담았다.


그동안 한반도는 러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이 제동을 건 러일전쟁(1904.2.8.~1905.4)에 영국과 미국이 가세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10년간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 준비를 해 왔고, 1904년 2월 8일 계획대로 한반도를 활용하여 수륙 양면 작전으로 중국의 봉천성과 여순을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전쟁을 밀어붙여 여순 앞바다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격침했다. 러시아는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발트 함대를 보냈다. 발트 함대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오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해군의 사기도 떨어지고 군수 물자 낭비도 많았다. 이때 영국은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에 가세하여 동중국해를 사수했다. 영국은 인도양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북상하고 있는 러시아 발트 함대를 대마도 해협으로 유인하였고, 일본은 진해만에 대기하고 있다가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켰다. 1905년 5월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여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미국은 7월 29일, 일본과 ‘가츠라 태프트’ 각서로 비밀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1900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필리핀을 사수하기 위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인정했다. 이는 1882년 5월에 맺어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위반한 것이었지만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러일전쟁이 종결되고 루스벨트가 중재에 나서 8월 10일부터 포츠머스에서 러일회담이 열렸다. 일본 측이 준비한 12개에 달하는 조약에는 우리나라에 관한 문제가 최우선으로 다뤄졌다. 조약의 목적은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정치권과 외교권을 국제무대에서 박탈당하고 말았다.


안창호는 1905년 봄, 리버사이드에서 노동주선소를 발전시켜 18명의 한인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공립협회를 조직했다. 공립협회는 ‘동포사회가 바로 선다.’라는 뜻을 가졌다. 리버사이드 공립협회는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흡수하여 35명이 4월 5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를 공식 발족했다.

1905년 8월 초, 하와이친목회 정원명 회장이 공립협회로 서한을 보내왔다. 포츠머스 회담에 우리나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하자는 내용인데, 하와이에서는 하와이친목회 윤병구를 대표로, 이승만을 통역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때 임치정이 나서서 공립협회는 안창호를 대표로 파견하자고 주장했다. 임치정(1880-1932)은 용강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임국로의 아들이며, 하와이를 거쳐 왔다. 하와이에서는 신민회를 둘러싸고 정치의식의 차이로 이념 갈등을 겪었다. 안창호를 만나 설득되어 공립협회 순 한글판 기관지 『공립신문』을 만들었다. 임치정은 국내 소식통이었고, 내면의 보수성향으로 늘 갈등하고 있었다.

임치정이 말했다. “안 선생이 회담에 가셔야 합니다.”

안창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리나라가 참석할 권리가 없는 자리인데 저들이 자리를 마련해 주겠습니까? 나는 안 갑니다.”

두 사람은 밤샘 논쟁을 이어갔으나 안창호는 끝내 자신의 파견을 거절했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성과를 거둔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무력을 과시하며 우리나라를 상대로 강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통감부를 설치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며칠 후, 공립협회는 을사늑약 소식을 접했다. 안창호는 11월 22일, 『공립신문』을 발전시켜 『공립신보』를 발행하고 을사늑약 소식을 전했다. 이듬해(1906) 4월 18일 새벽,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과 함께 화재가 일어났다. 퍼시픽 거리에 있던 공립협회 회관이 불에 타버렸다. 공립협회는 오클랜드로 임시 이전했다. 뜻밖에도 고종 황제가 위문금 1900달러를 일본영사관을 통해서 공립협회로 보내왔다. 송석준 총회장은 의논 끝에 총회장 명의로 당당히 이를 거절했다. 이유는 이를 빌미로 사사건건 일본영사관이 공립협회를 간섭하려 들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공립협회와 『공립신보』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러 주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리고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사는 동포들도 이 신문을 보고 서로 단합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는 1906년 1월 임시총회를 소집하고 을사늑약에 대응하는 배일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총회장 안창호를 국내로 파견할 계획을 수립했다.

공립협회는 자력으로 새로운 회관을 건립했다. 2대 총회장 송석준은 새 회관 건립에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1907년 소집된 공립협회 대의원 총회를 마친 4월 말, 과로 병사했다. 42세 일기. 안창호가 조국으로 떠난 후의 일이었다.


공립협회는 북미 전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오클랜드, 레들랜드, 라크스프링스 등에 지방회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시작된 공립협회는 1908년에 만주, 북만주, 러시아, 시베리아 등으로 퍼져 지방회가 생겨났고, 1909년에 하와이합성협회, 1910년에 대동보국회 등과 통합되어 ‘국민회’에서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게 된다. 안창호가 미래 비전으로 구상했던 세계 통일연합기관 설치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공립신보』는 『신한민보』로 발전하여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국내, 연해주, 북만주 일대로 널리 전파되는 신문이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은행으로부터 1000만 원의 차관을 얻도록 강요하면서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 지배체제로 전환해 버렸다. 강제로 빌리게 된 일천만 원은 순식간에 이자가 붙어서 1300만에서 1840만 원까지 불어났다.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가 앞장서 이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여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안창호는 식민지 체제로 탈바꿈된 조국의 현실을 두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황제는 2천만 동포를 포기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는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나라를 되찾아 근대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입헌군주 나라가 아닌 자유민주의 나라. 황제가 무너졌으니 백성이 주인이다. 우리가 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전쟁을 해서 나라를 도로 되찾아야 한다. 공립협회는 2천만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그런 나라를 구상해야 한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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