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부터 힘을 기르자 #7/10

7화. 1902년 결혼과 도미유학

by 은명

7화. 1902년 결혼과 도미유학



이래저래 실의에 빠진 안창호는 약 3년 동안 이끌어 온 점진학교를 동지들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에서 교육학을 체계적으로 더 공부해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안창호에게는 약혼녀 이혜련이 있었다.

구세학당을 졸업하고 조교로 활동할 때, 안창호는 잠시 고향에 들렀다가 19세 나이로 뜻하지 않게 혜련과 약혼했다. 안창호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녀평등에 기초해 여성도 신학문을 배우고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남자들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기존의 관습과 낡은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 안창호는 서당 스승이자 장인인 이석관에게 이러한 생각을 밝히고, 그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며칠 후, 안창호는 약혼녀 이혜련과 누이동생 신호를 데리고 평양을 떠났다. 서울에 도착한 안창호는 그 길로 약혼녀 이혜련과 누이동생을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도 언더우드의 지원으로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였다. 이혜련과 안신호는 김필순 일가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1902년 9월, 안창호는 이혜련과 함께 미국에 갈 수 있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미국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창호, 결혼식은 올리고 떠나게.” 김필순은 친구가 멀리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으로 말을 건넸다. 안창호는 결혼식을 올리고 떠나라는 필순의 말이 고마웠다. 사실 결혼식을 하긴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창호가 멋쩍게 대답했다. “글쎄, 그러면 자네가 주선해 주게.”

김필순은 안창호가 결혼식을 올리고 떠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밀러 목사의 부인이 나서서 제중원 마당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게 도왔다. 결혼식의 모든 준비는 김필순의 친형인 김윤오가 마련했다. 이윽고 9월 3일, 밀러 목사의 주례로 제중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측 증인은 김필순, 신부 측 증인은 송석준이었다. 송석준(1865~1907)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개화 지식인이며 만민공동회 관서지부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근당 임기반 등과 교류했다. 송석준은 안창호 부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미국행에 동행했다.


안창호 부부는 결혼식 다음 날인 1902년 9월 4일,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일주일 후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려면 일본에서 일주일을 기다려서 하와이로 가는 몽골리아호를 타야 했다. 안창호는 동경에 머물면서 산업근대화 현장을 중심으로 일본의 실상을 돌아보고 우리나라의 참담한 현실을 떠올렸다. 필대은 선배가 알려준 그대로였다.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승리한 열강들은 메이지유신 세력에게 압박을 가하여 외국 선박의 자유로운 통항을 비롯해 석탄 · 음식 · 식수 등 필수품 판매, 악천후 시 항구 상륙 허가, 항구 포대 철거, 배상금 300만 달러 지급 등 5개 조로 불평등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유신파는 미국과 해외 여러 곳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선진국의 과세제도, 예산 제도, 조약 개정 등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하게 했다. 이들은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국가 자강론에 영향을 받아 동양 침략론을 정립했다. 유신파는 자신들이 4대 열강에게 당했던 그대로 전철을 밟아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안창호는 유길준 선생이 『서유견문』을 서둘러 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하루빨리 문명개화를 배우고 돌아와 국민을 깨우치는 데 앞장서야 해.’ 안창호는 다짐했다.


드디어 안창호 부부는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안창호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 이런저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청일전쟁 때 서울로 와서 구세학당을 다니며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러던 어느 날 지루하고 고단한 항해 끝에 사람들이 반가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섬이다! 드디어 육지의 산봉우리가 보인다!” 마침내 섬 하와이가 마치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창호는 이때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 하였다.

배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들렀다가 다시 항해를 계속하여 드디어 1902년 10월 14일 『서유견문』의 땅,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안창호 부부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고 앞으로 살아나갈 일이 걱정되었다. 마침 안창호에게는 제중원 의사였던 드류를 찾아가 만나보라며 김필순이 써준 소개장이 있었다. 안창호 부부는 드류를 만나서 그의 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안창호는 집사로, 이혜련은 가정부로 정착했다. 정착과 동시에 영어공부를 위해 초등학교 입학에 도전한 끝에 간신히 한 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나이 제한 때문에 입학에 얽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는 안창호의 정직성을 말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 ‘그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참된 마음이면 다 통할 수 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도 다 헤쳐나갈 힘이 된다.’


안창호는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로 구성된 낯선 땅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 미국 사회의 교육과 경제에 대한 문화적 경험은, 훗날 안창호가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서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할 때 그의 철학적, 사상적 바탕이 된다. 안창호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국민 국가 공화정체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개인의 혁신과 단결로 단체를 구성하여 세계 통일 연합기관을 구성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재미 교포 지도자로 나섰다. 안창호는 스스로 노동에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개인이 지켜야 할 시민윤리 실천지침을 마련했다.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라.’ ‘자유를 침범하지 말라.’ ‘물질적 의뢰를 하지 말라.’ ‘누구를 더 사랑한다고 나무라지 말라.’ ‘신의를 굳게 지켜라.’ ‘예절을 존중히 하라.’ 이는 안창호 7계명인 셈이다. 이 시민윤리 7계명은 1926년 「동지들에게 주는 글」에서 ‘정의돈수 7훈’으로 구체화된다.

안창호는 1903년 9월 23일 단체를 결성했다. 처음 시작은 단결과 친목이었다. 박성겸, 이대위, 김성무, 박영순, 장경, 정재관, 김찬일, 김병모, 전동삼, 박승지 등 10여 명과 조직한 한인친목회. 안창호는 초대 회장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는 미주로 이주한 동포들의 첫 번째 단체로,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생활 개조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서로 협동하는 단체였다.


6개월이 지난 1904년 3월,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리버사이드에서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왔다. 안창호 회장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조금 떨어진 리버사이드로 갔다. 리버사이드는 오렌지농장이 많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안창호는 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에 일자리를 잡고 아내 혜련을 이주시켰다. 안창호는 이곳에서도 말보다 실천으로 동포들을 가르쳤다.

“오렌지 한 개를 따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오!”

안창호는 동포 노동자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 이 말뜻에는 텃세를 부리는 일본인들에 대한 견제와 내 조국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실사구시의 철학이 담겨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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