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1899년 점진학교 설립
안창호는 수구파 관리들의 폭압을 겪으며 결국은 거짓과 부패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백성의 무지와 무능함도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기초도 없이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거야. 기초는 깨우침이야. 근대 교육. 근대적인 힘을 갖추려면 점진적인 꾸준한 방법을 찾아야 해. 힘을 기르자! 이것이 애국의 첫걸음이다.’
안창호의 생각법은 독특하지만 한결같았다. 상황을 진단할 때 언제나 자기반성에서부터 출발했다. 자아 성찰과 자아 혁신. ‘나부터’라는 실천 원리는 수기 수신의 유교 윤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이는 기독교에서 새로이 습득한 회개와 같은 맥락이기도 했다. 안창호는 1919년 임시정부 개조를 강조할 때 “나는 회개를 개조라 하오. 개조하는 일에 노력함으로써 문명을 얻을 수 있소.”라고 선언했다. 안창호는 모든 국민이 잘못된 일이나 사태에 대하여 자기혁신을 먼저 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보다 진보된 행복한 사회에서 숨 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모든 일이 ‘나부터’ 시작된다는 윤리는 ‘애기愛己’하는 방법을 웅변하고 있다. 자기 성찰은 ‘거짓 자아’를 버리는 일이다. 안창호의 말로 바꾸면 회개하고 개조하는 일이다. 또한 ‘나’ 성찰은 단순히 거울로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면서 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나 조직 안에서 상호작용해야 더 효과적인 성찰이 일어난다. 나라가 갖춰야 하는 근대적인 힘. 교육과 산업진흥 그리고 군사력이 나라의 힘이라는 생각은 청일전쟁 때부터 안창호가 평생을 통해 노력했던 독립운동의 실천 노선이었다.
근당 선생의 사랑방에 모였던 평양지역 활동가들은 민권 자각과 애국계몽을 위해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자는 안창호의 말에 동의했다. 청년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필대은은 미소를 지으며 멀찍이 앉아 있는 김종옥을 바라보았다. 김종옥은 소 잡는 일로 부자가 된, 필대은과 친하게 지내는 또래였다. 김종옥은 필대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창호는 큰형 치호가 이사한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터를 마련하여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김종옥을 비롯한 고향 사람들이 함께 나섰다.
이 학교는 안창호의 뜻에 따라 점진학교라 불렀다. ‘점진漸進’이란 쉬지 말고 끈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이다. 안창호는 점진이란 말을 무척 좋아했다. 1899년. 점진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초등 사립학교이자 남녀공학이다. 초대 교장은 21세의 안창호 본인이었다. 최광옥과 차리석, 이석원 등이 교사로 나섰다. 점진학교는 덕, 체, 지를 고루 갖춘 전인교육에 목표를 두었다. 초등과정 4년제와 중학과정 2년제로 운영했다. 안창호는 근대적 지식으로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내용으로 하는 교재를 직접 편집해서 가르쳤다. 교풍을 엄하게 하여 스스로 도덕적 수양을 겸하도록 했다.
점진학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자,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부 어른들도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창호는 먼 곳에서 오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지었다. 또 가까운 하천 땅을 메워 제방을 쌓고 황무지를 개간했다. 이처럼 새로운 농토를 개척하는 실천 학습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단합된 힘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 농지개량 사업은 점진학교의 운영 경비 마련을 위한 대책이기도 했다. 이 개간 사업도 독립협회 관서 지방 인사들과 함께했다. 안창호의 땅에 대한 사랑은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과 1920년대에 만주 독립군의 이상촌 사업으로 이어진다.
한편, 안창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고향 마을에서는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 수가 늘어났다. 그중 10여 명이 안창호의 거처에서 예배 집회를 했다. 이들은 평양교회를 다니던 김용기의 집에서도 모임을 하다가 아예 강서군 탄포리(기양)에 교회 건물을 새로 짓기로 했다. 이 교회는 나중에 기양교회로 명칭이 바뀐다. 탄포리교회에서 남녀가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상투를 튼 젊은이들은 머리를 깎았다. 마을 사람들은 낡은 풍습을 바꾸고 생활환경을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다. 안창호는 교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지도했다. 성경을 읽게 되자 젊은이들의 학구열도 높아졌다. 지역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점진학교가 활기를 띠고 자리를 잡아가게 되자 훼방꾼들이 나타났다. 독립협회를 탄압하던 수구파들이 교묘한 수단으로 방해를 놓는 바람에, 한때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 점진학교는 1932년경에도 계속 운영되고 있었는데, 평양지역 동지들이 학교를 잘 이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필대은이 급성 폐렴에 걸렸다. 지인 김종옥은 유생원이라는 요양소에 필대은과 부인 고씨의 거처를 마련했다. 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 안창호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불며 극진한 간호에 나섰다. 그러나 필대은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27세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창호는 형수 고씨 부인의 처지가 안타까워 친구 필순의 제중원에 간호보조원으로 취업을 알선했다. 나중에 필대은의 아내는 1909년 안중근 의거로 안창호가 용산헌병대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을 때, 삼시 세끼 사식을 만들어 보내며 안창호에게 보은했다.
훗날, 안창호는 대전 감옥에서 가 석방되어 고토를 순례하고 고향으로 오게 된다. 이때 김지간, 김동원, 이광수, 김병연 등과 함께 평양 서쪽 보통강 건너 서장대 예수교 공동 묘원에 있는 필대은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필대은이 세상을 떠나고 36년 만의 참배였다. 안창호는 선배 필대은을 평생 잊지 못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