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만민공동회 평양지부와 지인들
고종과 내각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한 지 1년 만에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경운궁은 1907년 고종폐위 이후에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여 덕수궁으로 개칭된다. 친러파 내각은 경운궁에서 1897년 10월 12일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1898년 부산의 절영도 조차권을 요구했다. 마침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면서 정부의 잘못을 공격하고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만민공동회는 점차 입헌군주제와 의회설립 운동으로 진전되었다. 독립협회는 평의원 제도를 채택하여 민주적인 운영을 시도해 나갔다. 1898년 8월 말, 독립협회 회원 수는 4천 2백여 명에 달했고, 특히 청년회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안창호는 필대은과 함께 용강군 바위고지로 근당 임기반 선생을 찾아갔다. 근당은 청년이 된 안창호와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 창립을 위해 앞장섰다.
근당의 원래 이름은 임형주(1867~1932)로, 4세에 천자문을 떼고 14세에 사서삼경과 역사독본인 십팔사략을 통독하고, 17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근당은 개화사상을 갖고 있던 선각자였다. 동학혁명이 나던 해에 계급타파를 외치며 양반 복색을 벗었다. 근당은 생활 개혁과 자력갱생으로 국난을 타개하자고 나섰다. 감리교에 입교하고 용강 선돌감리교회와 사숙을 설립하여 평양 일대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근당의 처가는 강서군에서 이름이 난 갑부였으며 이들 부부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먹이고 입히고 돌보기를 좋아했다. 목동 소년 안창호도 근당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애국 자주독립의 기치로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창간되어 널리 알려지자 근당은 기지개를 켰다. 그동안 지배 관료층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민권운동으로 개화 자강 운동을 펼쳐왔던 터라 독립협회 운동을 평양지방에서도 펼치고자 했다.
마침내 근당의 사랑방에서 애국 청년들이 모여 만민공동회 평양지부를 결성했다. 이때 안창호는 이강과 임준기를 만났고, 최광옥, 안태국, 차리석, 김지간 등을 만났다. 안창호는 이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동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 관계 맺기의 핵심은 소통과 신뢰, 그리고 개방성이다. 이들은 사안을 혼자 결정하지 않고 언제나 공론을 통해서 결정했다. 안창호는 자신을 낮추며 동지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어려운 상황에 빠진 동지에게는 희생과 헌신으로 임했다. 엄혹한 시대. 안창호는 이들과 함께 비로소 역사적인 삶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안창호는 이때 만난 사람들과 평생동지의 인연을 맺었다.
1898년 7월 25일(음력) 고종황제의 생일날, 안창호와 관서지부 인사들은 쾌재정에서 대중 집회를 계획하였다. 청년 연사로 안창호를 세웠다.
안창호는 쾌재정의 3쾌 즉, ‘군민 동락’, ‘관민 동락’, ‘만민 동락’으로 말문을 열고, 정부 관리들의 부패 현상에 대해 18가지의 쾌재와 18가지의 불쾌를 조목조목 파헤쳤다. 안창호의 연설은 호소력이 있었고 논리 정연했다. 우리 민족이 우리 힘으로 값진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안창호는 연설 마무리에서 힘주어 강조했다. “힘을 갖자면, 우선 우리 모두가 근대 학문을 배워 눈을 떠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깨닫고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위보다도 무겁고 강철보다도 강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안창호의 열띤 호소는 군중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쾌재정 연설 이후 평양 일대에서는 안창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1898년 11월 5일, 정부의 수구파 관리들은 만민공동회 집회로 열리는 의회설립 운동에 위협을 느끼고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했다. 탄압과정에서 황국협회 보부상을 앞세워 집회를 습격했다. 그들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마구 잡아들이며 탄압을 시작했다. 안창호는 다행히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인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체포를 모면했다. 안창호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근당 선생의 사랑방에 활동가들이 다시 모였다. 마침 필대은도 와 있었다. 독립협회 해산으로 이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당 선생이 근심에 쌓인 청년들을 살피며 말했다. “역사는 과거로 회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보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깨어나고 권리를 자각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결집하고 발전합니다.”
필대은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만민공동회로 발전한 독립협회는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가야 할 세 방면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안창호는 귀를 기울였다.
같은 또래인 이병확이 필대은의 말을 재촉했다. 이병확은 이강의 오촌 숙부였다. “만민공동회의 외침이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필대은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헛된 일이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헛된 일이겠지요. 만민공동회의 유산이라고 함은 첫째로 사대주의적 질서관을 벗고 독립국의 국민 의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권독립에 대한 자각이요, 둘째는 국민의 재산권과 생명권을 지키려는 민권 자각 운동입니다. 독립협회는 의회 설치안을 정부에 제출했지요. 이것이 탄압의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자강을 위한 경제근대화 운동인데 지주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자본주의 근대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눈을 감고 필대은의 말을 경청하던 근당 선생이 말했다. “주권독립, 민권자각, 경제근대화. 이 세 가지는 조선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요. 이를 위해 신교육이 필요하단 말이지.”
안창호가 말했다.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당장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이에 수긍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