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부터 힘을 기르자 #4/10

4화. 인생 스승, 유길준과 서재필

by 은명

4화. 인생 스승, 유길준과 서재필



유길준(1856~1914)은 서울 출신으로 1870년 무렵 박규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공부했다. 1881년 26세 때 김홍집을 따라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갔다가 김홍집의 배려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에서 1년 남짓 사숙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0년 26세 때 일본 최초로 미국방문 사절단에 끼어 미국과 유럽 등을 견문하고, 1868년 일본 최초로 서구식 사학을 창설했다. 또한 『서양사정』 등 많은 저서를 발간하여 일본 개화 정책에 큰 공을 남긴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문명개화와 자유 민권을 주장하는 사상가였다. 그러나 1885년 이후로 자국의 국권 팽창을 위한 그릇된 정치적 목적으로 정한론에 다시 불을 지펴 대외침략론자로 탈바꿈했다. 정한론은 메이지 유신 세력인 사이고 다카모리 등에 의해서 187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첫걸음이 조선을 경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시사신보』 1885년 3월 16일 자에 ‘탈아론’을 발표하고,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라는 사설을 내고 조선 정부를 규탄했다.

유길준은 유키치의 저서인 『서양사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빨리 근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82년 5월 미국과의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고종의 총애를 받던 민영익이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1883년 6월 보빙사를 꾸려 답례차 미국방문에 나섰다. 유길준은 이때에도 대동 되었다. 민영익은 유길준이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근대문명에 관한 공부를 하도록 지원했다.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매사추세츠주 생물학 분야의 석학 모스(E.S Morse)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유학했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 동안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의 내용을 실제로 겪으며 이를 배우고 연구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소환되었고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와 유배당했다. 유길준은 귀국할 때 유럽을 여행하고 수에즈 운하를 거쳐서 돌아왔다. 귀국 후 7년간 연금 생활을 할 때 한규설의 도움으로 『서유견문』을 썼고, 1895년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어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유길준은 이 『서양사정』과, 수년 전 일본 수신사가 되었던 김기수의 『일동기유』를 비교하면서 국한문 혼용체로 『서유견문』을 완성했다. 『서유견문』은 그 당시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국민 교과서로 평가되고 있다. 『서유견문』은 모두 20권 71항목으로 구성된다. 제1, 2편과 제19, 20편은 지구 세계의 개론과 나라들의 구별, 세계의 하천과 인종·물산, 또는 세계의 주요 도시 등, 세계의 인문 지리를 주 내용으로 삼고 있고, 제3편부터 제18편까지는 서양의 정치 제도와 문명의 실태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유길준은 이 책에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 중국의 양무 및 변법론,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 및 사회계약론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책에는 입헌군주제도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개혁론은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1897년 여름, 독립협회는 제2기를 맞고 있었다. 하루는 김필순이 안창호에게 소식을 가져왔다.

“창호, 우리 학당에 협성회라는 토론회가 생겼는데, 서재필 박사가 직접 지도한다네. 8월 29일 첫 토론회가 공개적으로 열린다는군.”

안창호는 귀가 번쩍 띄었다. “음, 공개 토론회라. 그럼 여러 개화 인사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네. 이상재, 윤치호 같은 분이 토론에 나선다니까.”

김필순이 배재학당 선각 지식인들을 치켜세웠다.

안창호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되물었다. “주제가 무엇인가? 토론의 주제가 있을 텐데.”

김필순도 궁금했다. 토론이라는 공개적인 대화방식이 낯설기만 했다.

“우리나라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국민교육 문제를 다룬다고 하던걸?”

말하고 듣는 규칙이 있는 대화방식은 안창호도 낯설었다. “토론회라니 매우 흥미롭군. 함께 가보세.”


토론회는 주제와 규칙이 있는 대립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이 토론회는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대중의 공론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안창호는 협성회라는 명칭을 가진 배재학당 토론회에 준회원으로 가입하고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안창호는 이 토론회를 통해서 여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안창호는 일 년 넘게 서재필을 쫓아다니면서 토론과 강연회 등 새로운 방식의 문명개화 운동에 눈뜨게 되었다. 훗날 안창호는 서재필 박사에 푹 빠져 지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재필(1864~1951)은 전남 보성 출신으로 급진개화파 민족주의자이다. 그는 자주 국가 설립의 꿈을 안고 20세의 나이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개화당은 민씨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었고 피살되었다. 이들 가족까지 포함하여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서재필도 가족과 아들을 잃었다.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0년 미국으로 귀화하여 어렵사리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서재필은 1894년 2차 갑오개혁 때 박영효, 유길준의 귀국 권유를 받고 돌아왔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교사로 근무하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과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토론회를 통해 민주적 공론 형성의 중요성을 청년들에게 가르쳤다. 토론회는 장외로 확산, 만민공동회로 발전했다. 만민공동회가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어 의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자, 수구파들이 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듯이 돌아갔다. 독립협회는 결국, 1898년 11월에 강제 해산되었다.


청년 시절, 안창호는 서재필을 존경했다. 서재필은 안창호에게 인생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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