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부터 힘을 기르자 #10/10

10화. 공화국의 꿈을 안고

by 은명

10화. 공화국의 꿈을 안고



안창호가 4년 3개월 만에 미국을 떠나, 국내로 돌아오던 해가 1907년 1월, 29세 때 일이다. 안창호는 1월 8일, 오클랜드 임시 공립회관에서 출장 가듯 떠나느라 혜련과 필립에게 편지 한 장만 남겨 놓고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도릭호(S.S. Doric)를 탔다. 배는 1월 20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정영도가 소리 없이 안창호를 뒤따랐다. 안창호는 동경으로 가서 태극학회 총무 김지간을 찾았다. 태극학회는 동경 유학생모임이다. 안창호와 김지간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관서지부 청년 활동 때 인연을 맺었다. 김지간은 1905년 근당 임기반의 영향을 받아 재림교단에 입교하였고, 농업 생명 분야에서 근대 개화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김지간은 안창호를 반갑게 맞았다.

“아니, 형님! 미국으로 건너간 형님을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미국이 나한테 공부나 하라고 그냥 놔두지 않습디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그래머스쿨에 다니다 말았소. 하하.” 안창호는 기분이 좋았다.

김지간이 물었다. “점진학교를 설립한 교장이신 분을 몰라뵙고 홀대하였나 봅니다. 미국은 그런 곳입니까?”

“아니요, 그래머스쿨 입학 나이 조건이 대충 통하지 않습디다. 원칙이 분명한 나라지. 거짓말로 대충 넘어갈 수 없는 나라. 거꾸로 말하면 뭐든 열심히 노력해 볼 수 있는 나라입디다. 아무튼, 나는 노동을 하면서 혼자 공부하기로 하고 야학과 신학강습소를 열었지.” 안창호가 덤덤하게 말했다.

“형님을 뒤따라간 아우님들이 많은데 다들 잘 지내고 있지요? 그나저나 형님은 무슨 꿈과 일감을 가지고 귀국하시는데요?” 김지간은 정영도를 힐끗 바라보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얘긴 차차 합시다! 내 할 말이 아주 많소. 여긴 어떻소? 혹 근당 선생 안부를 아시오?”

“아, 근당 어르신...! 임준기가 이야기를 했겠군요. 그러니까 1903년에 어르신이 하와이로 가셨다가, 정부 호출로 귀국할 때 고베항에서 재림교로 개종하셨습니다. 귀국 길이 체포되는 길이란 것을 예감하셨나 봅니다. 마침 그때 손흥조와 이응현이라는 사람의 안내로 재림교 일본인 전도사 쿠니야 히데를 만나셨던 거지요. 그때 감리교에서 재림교로 개종하고 세례명을 받아 임형주를 버리고 임기반이 되었지요. 그리고 고향으로 숨어들어 평양 일대에서 처음으로 재림교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재림교단은 평양 순안에 자리 잡고 선교 사업에 성공합니다. 근당과 아는 용강 사람들은 대부분 안식일 교인들입니다. 저도 그때 재림교 세례를 받았고요. 일본 유학도 재림교단 지원으로 왔고요.” 김지간이 일사천리로 말했다.

“오, 대단하신 분이오. 나는 호놀룰루신민회 이야기를 듣고 감탄했었소. 그래서 내가 지금 안주머니에 비밀문서를 가져왔는데, 하와이 신민회가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새 신민회를 조직하려고 건너온 것이라오.”

“네에?”

“차차 알게 될 것이오. 그런데 재림교 사업을 펼치게 된 사연은 준기도 이강도 모르고 있는 눈치던데....” 안창호가 말했다.


안창호는 동경에 2주일 가까이 머물면서 김지간, 정영도와 함께 일본을 면밀하게 탐색했다. 일본 정객들이 주장하는 탈아론과 정한론에 내포된 대륙침략의 논리와, 이에 대한 평민들의 여론을 간파했다. 여론은 유신 권력의 근대화를 지지했다. 일본의 산업화 과정, 도로 ‧ 철도 ‧ 항만 시설, 대학 등 교육 시설, 정부 기관 시설과 신문사 등도 살폈다.

안창호는 조국의 현실이 위태롭다는 것을 느끼며 마음이 복잡했다. 계몽이나 각성을 촉구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리도 무언가 자력으로 근대화 사업을 서둘러 실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언젠가 일본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맞설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사람을 키우고 산업을 일으켜 힘을 준비해야 한다. 학교를 설립하고 책 출판과 도서관을 만들어 지식 자본을 키우고, 민족자본을 일으켜야 한다. 안창호의 마음은 바빠졌다.


유학생들은 애국단체를 조직하여 모임을 개최하고 시국 토론을 했다. 또 『태극학보』 기관지를 발행하여 일본에 와 있는 유학생은 물론 본국의 동포들에게까지 애국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태극학회 간부들은 2월 3일 안창호를 위한 환영회를 열고 특별 강연을 부탁했다. 안창호는 ‘학생의 분발과 전진방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안창호는 조용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세계와 아시아의 정세를 말한 다음,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일본의 침략지가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안창호는 세계정세를 통찰하고 있었고, 조국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근대국가의 방향과 새로운 국민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다. 안창호의 연설에 많은 유학생이 자극을 받았고 감동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5월 20일, 태극학회는 안창호를 다시 동경으로 초청했다. 안창호의 연설을 미처 듣지 못했던 청년들이 원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이광수, 홍명희, 최남선 등이 있었다. 안창호는 이 세 청년과 의기투합하고 이들을 일컬어 한국이 낳은 천재들이라고 칭송했다.


처음 동경에 머무는 동안 안창호는 김지간과 함께 평소 존경했던 유길준 선생을 찾아갔다. 1896년 2월, 갑오개혁의 실패로 일본으로 몸을 피한 유길준은 4년간 유폐되었다가 이후 7년째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길준은 안창호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 자네가 안창호로군! 청년들이 자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네. 미국에서 오는 길이라고?”

안창호는 마음에 품고 있던 스승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네, 선생님! 저는 『서유견문』에 기록된 그대로 문명 개화된 미국의 자유 시민사회, 민주공화국을 체험했습니다.”

“오, 그런가? 그래, 어떤가? 자네는 우리나라가 공화국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가?” 유길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중국의 양계초 서적도 지인들과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사회진화설에 근거하여 국가유기체설을 주장하면서 변법과 민족 자강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소신 있게 말했다.

“그렇다네. 나도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가려면 영국처럼 입헌군주제가 마땅하다고 보네만.” 유길준은 문득 자신의 미국방문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 시절에 문명개화에 놀라면서 인민 사상을 키웠다.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유길준은 국가주의에 주목했다. ‘인간의 권리는 국가의 국민일 때에만 권리로서 보장받을 수 있고, 국법의 보호 아래 성립된다.’라고 믿었다. 유길준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안창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과감하게 그동안 품어온 생각을 말했다. “저는 왕실을 예우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궁극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국민은 스스로 주인공이라는, 권리에 대한 자각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길준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오, 그러니까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태어나야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이천만 국민이 황제가 되고 주인이 되는 자유 공화국입니다.” 안창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신민설」에 대한 토론에서도 안창호는 미국식 공화제의 신민을 강조했고, 유길준은 영국식 입헌군주제의 신민을 강조했다. 양쪽 모두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자유주의적 문명 공화국의 새 국민을 강조했다. 국민 형성의 기초로 시민 정신 육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 노선을 강력히 내세웠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소. 대한 나라에 과거에는 황제가 1인 밖에 없었지만 금일에는 2천만 국민이 다 황제요. 제군의 앉은 자리는 다 옥좌이며 머리에 쓴 것은 면류관이외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를 이름이니 과거의 주권자는 유일이었으나 지금은 제군이 다 주권자외다.’

유길준은 안창호의 주장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황제 복위는 어렵고, 자네 생각대로 국민이 주인으로 거듭나서 나라를 일으키려면 자유 공화국으로 혁명해야 한다는 주장이군. 무엇보다도 국민 계몽과 교육이 시급한 일이군.”

안창호는 유길준을 우러러보았다. ‘이분은 다 내려놓았다. 나이 탓만은 아닐 터. 정치 공인으로서 개혁의 의지는 모두 좌절되었다. 황제 나라의 무력함. 대한제국. 망명과 유배 생활로 터득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네, 국민 계몽과 교육입니다. 국민이 신민으로 거듭나려면 근대사상을 수용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서유견문』은 위대한 국민 교재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책을 보고 자극받아 미주 유학을 감행했던 것이고요.” 안창호는 대답했다.

유길준이 말했다. “국민교육에 공감하오. 자네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점진학교를 세웠다고 들었소. 최광옥이 찾아와서 그러더군. 교재가 없어서 자네가 『서유견문』을 편집해서 가르쳤다고.”

안창호는 반색하며 말했다. “점진학교... 그랬지요. 그때 『서유견문』은 제 꿈이 담긴 모든 것이었지요. 최광옥이 선생님을 뵈러 왔었군요.”

유길준이 말했다. “최광옥이 우리말 문법이나 특징을 기술한 국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써 달라고 했다오. 사실 세종대왕의 업적인 우리말 표기와 문법 등을 오래전부터 저술할 생각이 있었소. 이렇게 무료한 생활에 지치기도 했고. 그래서 망설였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쓰고 있다오.”

안창호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선생님, 꼭 필요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국어 문법에 대한 표준이 있다면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일이 훨씬 수월할 테지요. 민족교육의 핵심은 국어와 역사입니다. 민족혼이 담긴 문장을 읽고 풀이하고 글로 짓고 하는 일. 국민이 문맹에서 벗어나는 일은 국가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과도 일치합니다. 선생님, 『대한문전』이 꼭 필요합니다.”

“내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될지도 모르지. 국민교육에 남은 생애를 바치고 사범학교도 세우고 싶소. 귀국 여지를 살펴서 가능하다면 돌아가서 흥사단을 일으키고 싶소.” 유길준이 안창호의 말에 감동해서 자기 뜻을 내비쳤다.

“흥사단...! 그러니까 선생님은 교사양성 훈련기관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안창호가 물었다.

“그렇다오. 필요하다면 사농공상에 해당하는 모든 훈련기관을 설립하고 싶소.”

“저는 청년 훈련기관으로 청년학우회를 생각했습니다만...!”

“청년학우회라... 청년을 위한 민주시민 훈련기관이 되겠구만!”

“그렇습니다. 선생님, 고종 황제의 사정이 예전 같지 않을 테니 귀국하신다면 개혁의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 애국가도 지어주시지요. 나라에 애국가가 없습니다.” 안창호는 간곡하게 말했다.

“나는 노래를 지을 재능은 없구려, 하하하.” 유길준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신민(新民)을 두고 국가가 먼저냐, 국민이 먼저냐 하는 데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정세에 대해 많은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신민 양성을 위한 국민훈련단체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유길준은 안창호를 만난 이후 1907년 8월에 『대한문전』을 가지고 귀국했다. 그 무렵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통감부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의 재가를 얻어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사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등을 탈취했다. 이어서 군대해산과 일본인 관리를 통한 차관정치를 실현하여 온갖 실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응하여 전국에서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혼란한 때에 유길준 등 일본 망명 개화파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길준은 1907년 11월 30일에 김윤식을 단장으로 하는 흥사단을 일으켰다. 유길준이 부단장이었다. 노백린, 이갑, 이상재, 안종화, 장지연 등이 같이했다. 유길준의 흥사단은 소학교 정상화를 위한 교사양성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길준은 1908년 1월에 『대한문전』을 출간했다. 출간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렸고 6월에 재판이 나왔다. 『대한문전』은 언어론과 문장론 두 편으로 구성되었고, 이상재가 머리말을 썼다. 이 책을 본 안창호와 최광옥은 만족했다. 대성학교 2대 교장 최광옥은 『대한문전』을 국어 교과서로 채택했다.


이후 유길준의 흥사단은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안창호가 추진했던 1909년 8월 청년학우회도 강제 해산되었다. 미주 망명지에 도착한 안창호는 1913년 5월 13일에 흥사단을 설립했다. 유길준의 흥사단 명칭을 계승한 것이다. 미주 당국에 단체 이름을 등록할 때는 Young Korean Academy(청년학우회)로 등록했다. 유길준의 흥사단과 안창호의 흥사단은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목적과 이념을 가진 단체였다.

유길준은 이토 히로부미가 주는 특권을 보장하는 작위를 거절했다. 그리고 노량진 그의 집에서 울분으로 나날을 보내며 신장병에 걸렸으나 집필 생활을 계속했다. 1914년 9월 30일, “이 애비는 아무런 한 일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58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1장 마침. 2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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