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5/10

5화. 교육운동과 실업운동

by 은명

5화. 교육운동과 실업운동


신민회가 창립되고 방방곡곡에서는 신민 양성을 위한 근대 교육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소학교와 중등 과정 학교설립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많은 애국지사가 이에 동참했다. 이미 을사늑약을 전후해서 국내는 물론이고 간도와 만주, 연해주 등지에도 수많은 민족학교가 설립되었다. 방방곡곡에서 자생적으로 기금을 모아 설립된 학교들은 대부분 소학교였다. 신민회의 학교는 중등 과정으로 소학교를 지도할 수 있는 교사 양성을 목표로 했다.

안창호는 중등 과정의 사관 예비학교 설립을 구상해 둔 바 있었다. 평양에 학교를 세워 교육과정규칙 등 운용 규범을 마련하고, 직접 운영하여 근대 학교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대성(大成)아카데미’. 크게 이룬다는 큰 뜻을 가진 명칭이었다.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우는 일에 차리석을 적임자로 점찍어 놓았다.


1908년 봄, 안창호는 대성학교 개교 준비를 점검하기 위해 차리석을 대동하고 평양 방문에 나섰다. 차리석은 신민회 실무를 보면서, 이미 대성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확보와 교사 건축 등을 추진해 오고 있었다. 안창호는 그에게 옛 점진학교 운영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차리석은 점진학교 교사였다. 점진학교는 안창호가 도미 유학을 떠난 후 자금난으로 폐교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평양지역 사람들이 꿋꿋이 지켜내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초등교육 기관으로 살아남아 민족교육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안창호는 기뻤다.

“아우님, 최광옥 동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소? 보고 싶소. 지난번 서우학회 창립 때 최 동지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소. 탈은 없겠지요?”

차리석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안창호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형님,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나누지 못했소. 신민회 사업에 정신을 다 쏟아 넣다 보니....”

안창호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은 내 진작부터 물어보고 싶었소. 최광옥 동지는 건강하신 게요?”

차리석은 이야기보따리를 풀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광옥과 나는 형님이 유학을 떠난 후 점진학교를 지키면서 숭실학교에서 기독교와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1904년 우리는 1회 졸업생이 되었어요. 광옥이 형은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오래 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의주에 있는 양실학교 교장으로 교육과 계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만나기 어렵겠구려.” 안창호는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이제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형님의 활동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차리석은 안창호를 안심시켰다.

안창호는 최광옥이 청년학우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최광옥 동지는 조지 워싱턴 같은 인물이야. 조선에서 아마 머리가 제일 좋은 사람일걸? 최 동지에게 청년학우회를 맡기면....’

안창호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차리석이 물었다. “혹시 형님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무엇을 말이오?”

“광옥 형은 얼마 전에 일본 번역서 『교육학』(1907)을 출판했습니다. 그 일이 과로를 불러일으켜 그만....”

차리석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문득 불길한 생각에 안창호는 발길을 잠시 멈췄다. “뭘 말이오? 최광옥 동지한테 무슨 변고라도?”

차리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변했다. “광옥 형은 지금 건강이 나쁩니다. 심장병이 있

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바로 돌아온 이유도 아마 건강 때문일 겁니다.”

안창호는 이 말을 듣자마자 낙담했다. “그래요? 그랬군요. 동경에서 유길준 선생을 방문하고 국민 국어 교과서를 만들어 달라 했다고 들었소.”

차리석이 말했다. “아, 그 일 말이군요. 광옥 형님은 유길준 선생이 몇 번째 고쳐 쓴 『대한문전』 미 완성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그것을 가지고 양실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지요.”

안창호는 최광옥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지병이 있다니 아마도 그래서 그동안 꼼짝도 안 했던 것이리라. 안창호는 탄식했다. ‘아, 나랏일을 해야 하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니, 건강,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 체력이 나라에 힘이요, 자본인 것을!’


신민회의 학교설립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이토 히로부미는 사립학교령(1908.9.1)을 공표하여 탄압을 예고했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안창호는 마침내 1908년 9월, 평양시 모란봉 근처에 대성학교를 개교하고 당당하게 학생 모집 광고를 신문에 냈다. 21살 때 점진학교를 만들어 놓고 미주 유학을 떠났던 안창호가 이번엔 대성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대성학교 입학을 서둘렀다. 9월 26일 개교식 때 예비과와 초등과에 신입생 수가 90명이나 되었다. 개교식에 참가한 내빈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대성학교는 이렇게 성황리에 시작되었다. 대성학교 설립을 위해 돈을 내겠다는 기부자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오치은, 오희원, 김진후 등 유지들이었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한 함북 출신 이종호도 기부에 참여했다. 이종호(1885~1932)는 대한제국 왕실의 재정관리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의 손자로, 이종호와 그의 동생 이종만은 신민회 회원이었다. 안창호는 자신의 비밀수행원 정영도도 대성학교에 입학시켰다.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서울, 대구, 광주 등 8도 중심지에 모두 세울 계획이었다.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 제1호 학교인 셈이다. 안창호는 윤치호를 교장으로 내세우고 본인은 대리 교장을 자임했다. 학교 경영의 원칙을 수립하고 한국 혼의 기초를 세워 놓기 위함이었다. 안창호는 이 대성학교가 전국에 세워질 학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학생들을 직접 가르쳤다.

안창호가 가장 강조한 것은 건전인격이다. 건전한 인격이란 거짓이 없는 떳떳한 인격을 말한다. 안창호는 거짓이야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라고 강조했다. 또한 애국가를 부르고 교칙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했다. 최광옥, 차리석, 문일평, 이상재, 서병호 등이 교과를 제작하여 가르쳤다. 예비과의 국어는 안악면학회에서 발행한 유길준의 『대한문전』을 교재로 썼다. 한문은 공자의 『오경(五經)』 대신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의 내용을 편집해서 안창호가 직접 가르쳤다. 노백린이 명예교사로 무관 교육을 담당했다. 이 밖에도 체력 관리와 정서 교육에도 힘을 썼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오락 시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는 노래 부르기를 권장하고, 자신이 직접 여러 가지 노래를 지어 학생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는 대자연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경치를 즐기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참된 인간성을 기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안창호의 이러한 가르침을 받으려고 전국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대성학교로 모여들었다.

이렇듯 대성학교 교육의 기초를 다지던 1908년이 저물고 1909년 새해가 왔다.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가 융희황제를 모시고 평양을 순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토는 순행하는 지역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하고, 환영 군중 역시 양손에 두 나라 국기를 들고 거리로 나올 것을 강요했다. 대성학교는 이러한 지시에 저항했다. 이 일로 대리 교장 안창호가 평양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대성학교 폐교설까지 나돌았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런 부당한 사태를 사회에 고발했다.

1년 후 1909년 8월 안창호는 교장직을 최광옥에게 위임했다. 또 김필순의 추천으로 황해도 장연 출신 장응진(1881~1950)을 학감으로 초대했다. 안창호는 동경 태극학회 회장을 지낸 장응진이 졸업하자마자 귀국 여비 300원을 챙겨 보내서 대성학교로 오게 했다. 장응진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교육계의 인재였다.


안창호는 실업운동에도 박차를 가하기 위해 안태국과 함께 정주로 이승훈 선생을 찾아갔다. 이승훈 선생은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이승훈은 안창호가 태평양 건너 구미에서 보고 경험한 문명 근대국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안창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미주에서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만주 밀산현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사관학교 설립을 위한 기지 개척이 시작되었다고 전했다. 안창호는 이승훈 선생에게 금전의 자본과 신용과 지식의 자본을 민족의 3대 자본이라고 설명했다. 이승훈은 실업 주식회사 설립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안창호는 평양 마산동에 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일으키는 운동의 주춧돌을 놓았다. 마침 평양 대동강 상류는 사기 재료로 널리 알려진 진흙이 명품으로 유명했다. 안창호와 안태국은 어르신 이승훈 선생을 앞장세웠고, 여기에 평양의 재산가, 이덕환, 김남호가 가세하여 회사를 발기하였다. 마산동 자기 회사는 민간인이 세운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회사 이름은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 고려 시대의 자기를 민족 산업 부흥의 상징으로 삼아 설립한 것이다. 이승훈은 안창호의 경제 공개념에 동감하여 평안북도 정주 납청정에 무역상사 겸 도매 상사인 협성동사를 설립했다. 정주 납청정은 유기 제조 공업의 중심지였고 양조업과 정미업이 발달한 상공업 지역이었다. 이승훈은 선천과 용천에도 이와 비슷한 상무동사를 설립하여 실업자본을 일으켰다. 평양에는 조선실업회사를 발기하고 주주를 모았다. 황해도 안악에는 방직공장과 연초공장을 설립했다. 이뿐만 아니라 황해도 사리원에 모범농촌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공사를 하던 중이었으나, 일제 병탄으로 중단되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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