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토 히로부미의 회유 공작
1907년 11월.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던 안창호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최석하(1864~1912)를 통해 여러 차례 만남을 요청해왔다. 최석하는 의주 태생으로 이승훈 선생과 연배가 같았다. 이갑에 의해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26세 때 일본 고베에서 보통과를 졸업하고 1908년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최석하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을 하면서 ‘동양 평화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라고 서약한 일로 졸업 때 일본 훈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최석하는 정치에 뜻을 두고 안창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갑에게 접근했다. 이갑은 안창호에게 최석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토를 한번 만나보면 어떨지 제안했다. 안창호는 이갑 등 동지들의 요청도 있고, 또 너무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동지들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당당하게 그와 만나서 일본의 속셈을 알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창호는 면담에 응하겠다고 했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1868년 메이지유신에 이바지한 대가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870년 사절단으로 미국 등에 파견되어 과세, 예산 제도, 조약 개정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돌아왔다. 1878년 그가 추종했던 유신 인물, 내무상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로 그의 뒤를 이어 이토 히로부미가 내무상으로 승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정적들을 견제하고, 1889년 입헌군주제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초대 내각 총리로 1894년 영국과 조약을 맺어 영국 지배권에서 벗어났으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그 이후 1901년까지 4차례나 총리를 지낸 절대 권력자였다. 이토는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85년 이홍장과 톈진조약을 통해 청의 조선 간섭을 중지시켰고, 18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독립을 비롯해 요동 반도와 대만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건을 성사시켰다.
1905년 러일전쟁 후, 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실질적인 감독권을 획득했고, 대한제국과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는 1905년 12월에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일본 유신 세력들은 대륙으로 뻗어나갈 이론적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여 고대사 왜곡도 마다하지 않았다. 만주 길림 성 집안 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 광개토대왕 비문을 자신들의 것으로 왜곡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날조된 이론에 근거하여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를 우선 정벌한다는 ‘정한론’을 명분으로 삼았다.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모든 계획이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의 기틀을 만들고 동아시아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구체화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공공의 적이었다.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와 당당하게 마주 앉았다. 안창호는 29세의 젊은 애국 청년이었고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는 66세의 노련한 정치가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과 한국과 중국이 서로 힘을 합해서 동양 평화를 이루자며 서슴지 않고 야망을 드러냈다. 안창호는 조용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이에 응수했다. 일본은 우리 왕실을 능멸하고,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경제를 침탈하고,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일들을 강압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양의 평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안창호는 이 면담을 통해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망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임을 확인하고 치를 떨었다. 회담장을 빠져나오면서 안창호는 마음이 급해졌다. 간교한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지 않으면 국권 회복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이강과 안중근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강에게 편지를 썼다. 조만간 하얼빈에서 만나자고 했다.
안창호는 신민회 창립총회를 마치는 대로 평양으로 가서 약속한 사업들을 추진할 청사진을 다듬었다. 그리고 대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머물다가 북만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안창호는 정영도에게 하얼빈 기차 편을 자세히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친일파 미국인 기자 스티븐스가 처단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열 사건이었다. 안태국이 『공립신보』를 들고 ‘빅뉴스’라고 외쳤다.
“도산, 도산, 이것 좀 보오! 미주 동지들이 일을 냈습니다.”
안태국이 신문을 말아 흔들며 안창호에게 다가왔다. 좀처럼 흥분하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는 안태국이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안창호는 신문을 받아 펼치며 말했다. “아니, 이건?” 안창호는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흥분했다. 신문에는 대동보국회 장인환과 공립협회 전명운이 친일파 미국 기자 스티븐스를 처단했다는 내용이었다. 일제 통감부 고문관인 미국 기자 스티븐슨은 일본 황실을 드나들며 을사늑약의 조치가 당연하다는 기사를 실어 동포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그가 이번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페리 부두에 도착해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을사조약은 조선을 위해서 취해진 당연한 조치요,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정치를 지지하고 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이 기사를 보고 한인사회가 크게 분노했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회원 50여 명이 연합해서 항의 집회를 열고 4명을 대표로 선발하여 호텔로 스티븐스를 찾아갔다. 정재관, 최정익, 문양목, 이학현. 네 사람은 호텔 로비에서 스티븐스와 대면했는데, 그가 여전히 고종황제를 비난하자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3월 23일 마침내 공립협회 전명운과 대동보국회 장인환이 거사에 나섰고 스티븐스는 총에 맞아 절명했다. 이 항거는 을사늑약에 대한 부당성을 규탄하는 항일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 소식은 『공립신보』에 게재되어 국내는 물론 연해주 일대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이 사건은 이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두 단체가 힘을 합해 거사를 치렀다. 대중적인 저항운동은 민족혼을 살려 빼앗김 없는 역사를 계승하는 일이고, 무력 활동은 꺼져가는 불꽃을 되살려 대중에게 힘을 실어주는 운동이다.’
안창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안태국에게 물었다. “안 형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오?”
안태국은 샌프란시스코 의거는 실보다는 득이 더 많은 쾌거라고 생각했다. 장인환과 전명운 앞에 닥친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는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횃불을 밝힌다면 모두 저항의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도산, 중요한 것은 기회요. 기회가 왔는데도 지나쳐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소. 아니, 기회는 자꾸 만들어 내야 합니다. 공립협회 동지들은 항거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겁니다. 아주 훌륭했던 거사입니다.”
안창호는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안태국이 고마웠다. “음, 기회는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순간이라도 깨어 있어야 한다!”
안태국이 귓속말하듯 작게 속삭이다 말끝을 흐렸다. “도산도 알고 있지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래서 미주 행동대 동지들과 숙청단을 별동대로...!”
안창호는 주변을 살피며 말을 받았다. “겉으로 티를 내선 안 됩니다. 내가 공립협회에서 온 사실이 널리 퍼져있으니 가까이 밀정이 염탐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조심합시다.”
안태국이 물었다. “당연하오, 도산. 그런데 평양은 언제쯤 행보하렵니까? 한 곳에만 있으면 놈들에게 쉽게 노출될 텐데.”
안창호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대로라면 사관생도를 키울 아카데미 학교설립도 그렇고, 비밀 연락망 태극서관 설치도 그렇고, 모범적인 실업 주식회사를 만드는 이 모든 일은 결국 형님과 동암이 도맡아 줘야 합니다. 특히 평양지역의 신민회 사업들은 모범이 되어야 하고요. 동지들이 주목할 것입니다.” 동암은 차리석의 아호다.
안태국은 이승훈 선생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남강 선생께서 도산 연설에 감동하여 무슨 일부터 해야 하는가 하고 나에게 물어왔소. 나는 오래전부터 남강 선생의 상업 기술을 배워보려고 가까이 지내 왔지요.”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동오 형. 우리나라는 지금 산업진흥에 걸음마 단계요. 일본이 산업진흥의 싹을 자르려고 어떤 방해를 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남강 선생의 자산을 우리 생명처럼 지켜드려야 합니다. 선생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작년 평양 방문 때는 경황이 없었지만 서둘러서 다시 뵈어야겠습니다.” 동오는 안태국의 아호다.
안태국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난해 7월, 도산 연설을 듣자마자 당장 가산을 정리하고 의숙을 개교하겠다고 정주로 가셨소.”
안창호는 안태국의 말에 감동했다. “오, 그랬군요. 참 스승이십니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평북 정주의 빈민층 출신이다. 정주는 납청정 유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승훈은 노동과 행상을 하다가 유기상으로 성공하여 대 실업가가 되었다. 이승훈은 을사늑약 이후 뒤숭숭하던 시기에 청년 안창호의 애국 연설에 감동하여 상투를 자르고 신민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곧바로 평안북도 정주 고향으로 내려가 강명의숙을 설립하고 12월에는 중등 과정의 오산학교를 개교하면서 교육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오산학교는 대성학교와 더불어 서북지역의 인재 양성에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안태국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산, 내가 이승훈 선생을 모시고 태극서관 사업과 자기 회사설립을 추진해 보겠소. 도산은 교육기관 설립에 집중하면서 때를 보도록 하오. 북만주로 가봐야 하는 것 아니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사업의 진행에 대해서는 정영도 군이 가운데서 심부름해 줄 것입니다. 만약 제 신변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류들은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될 테니....”
“알겠소.” 그러면서 안태국은 서울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조만간 평양으로 뒤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
안창호는 이재명을 떠올리며 안태국에게 다짐을 뒀다. “그럼 일단 사업 추진을 하면서 때를 봅시다. 일간 내가 이재명이라는 젊은 동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작년 10월에 미국에서 임치정과 오대영을 따라 귀국한 젊은 동지입니다.” 안창호와 안태국이 말하는 ‘때’란, 공립협회가 결의를 다지고 있는 ‘숙청단 사업’이었다.
안태국은 안창호와 약속한 바대로 1908년 5월에 서울, 대구, 평양에 태극서관을 설립했다. 태극서관은 외형적으로는 서적 판매와 서적 출판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실상은 신민회의 비밀 연락 처소로 계획된 것으로, 서적 출판의 비영리사업을 표방하되 비밀 거점 사업을 병행했다. 이러한 치밀한 계획 수립은 안창호가 창안한 것이다. 비밀 연락망으로 활용될 거점은, 이후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로 이용될 교통국 설립과도 같은 맥락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