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
안창호가 미주에서 준비해 온 신민회 취지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우리 민족은 근대사상을 받아들이는 일과 이에 따른 신교육이 시급하다. 새로운 수양과 새로운 윤리의 제창이 필요하며 문화적 쇠퇴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학술과 근대적인 실업 육성이 시급하다. 이에 따른 제도개혁과 정치에서도 새로운 각성이 촉구된다. 따라서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대한인은 통일기관에 따라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과 자유로 그 목적을 세워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신으로 신민회를 만들어 새로운 나라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또 ‘통용장정’ 행간에는 이를 실행할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즉,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계몽 운동가를 파견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전달하고, 인민이 미혹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도록 설득하고 깨우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신문 · 잡지 · 서적을 간행하여 인민의 지식을 계발케 한다. 신문발행은 『공립신보』와 『대한매일신보』를 협력 기관으로 활용한다. 태극서관을 설치하여 도서 보급과 출판을 해나가되, 이 태극서관을 방방곡곡에 설치하여 연락과 교통망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여관 사업을 비밀리에 경영한다. 이러한 구상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비밀연통제로 맥을 잇는다.
둘째, 문무쌍전의 인재 양성을 위해 모범학교 즉, 아카데미를 세워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도록 교육과 그 경영을 지도한다. 안창호는 평양에 모범학교를 세우고 교명을 대성학교로 하기로 이미 결정해 두었다. 대성학교는 단순한 학교 개념이 아니다. 대성학교의 영어 명칭은 대성아카데미로, 이른바 사관학교의 기초과정인 셈이다. 덕, 체, 지를 겸비한 투사양성과 국민교육을 담당할 교사 양성이 양 날개 목표이다. 이러한 대성학교를 모델로 한 자발적 사립학교는 1909년에 3천여 개로 늘어난다.
셋째, 신민회가 앞장서서 실업계 합자로 실업 회사를 설치하고, 경영의 모델을 만들어 민족자본을 형성해 나간다. 안창호는 우선, 평양지역에 도자기 회사설립을 계획했다. 대동강 유역의 마산동 진흙은 예로부터 장인들에게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자원과 기술로 자기를 생산하여 민족자본 형성의 모델로 삼고자 하였다. 민족자본 형성을 위한 회사설립 운동은 이후 평북 납청정의 무역과 도매 상사를 겸한 상무동사, 안악에 방직공장과 연초공장, 평양 조선실업회사 등으로 확장된다.
이밖에 신민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포 일체 단합을 위해 신민회 회원이 산재한 각 구역에 지방회를 설치하고, 이 단체들이 연합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소통과 연대를 위한 교통 거점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대한인은 실력을 확장하여 장차 자유 공화국으로 국체를 완전케 한다.
이것이 공립협회와 안창호가 제시한 신민회의 청사진을 담은 비밀 문건이었다.
1907년 4월, 양기탁은 안창호의 비밀결사 창립에 동의했다. 양기탁, 전덕기, 이동녕, 유동열, 이갑, 이동휘, 안창호가 발기인으로 서명했다. 안창호는 발기인 중심으로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안창호의 수첩에 기록된 신민회 초기 회원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양기탁을 중심으로 신채호, 임치정, 박은식 등 언론계 인사들이 서명했고, 전덕기, 이동녕, 이준, 정순만, 최재학, 김구 등 상동교회 인사들이 서명했다. 이동휘를 비롯하여 유동열, 노백린, 이갑, 조성환 등은 군인 출신이었으며, 이강, 임준기, 김성무, 박영순 등 미주 공립협회 인사들도 서명했다. 이외에도 이승훈, 안태국, 차리석, 최광옥,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이종호, 주진수, 김홍양, 김동원, 이덕환, 김홍서, 김지간 등의 명단이 안창호의 신민회 일지에 기록되었다.
비밀리에 신민회 창립총회가 성립되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두었다. 창립 지도부는 조직원리에 따라 의사원, 집행원, 감찰원의 3부 기관을 두고 이를 중앙조직의 의사결정기구로 삼았다. 중앙조직이 최고 간부였다. 창립총회는 신민회 총감독으로 양기탁을 선임했다. 안창호는 부총감이자 집행원으로 조직과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안창호는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집행원을 맡았고, 미주 총감을 겸했다. 총서기는 이동녕, 재무부장은 전덕기였고, 유동열, 이갑, 노백린은 감찰원을 맡았다. 평안남도 안태국, 평안북도 이승훈, 함경도 이동휘, 황해도 김구, 강원도 주진수는 각 도의 총감이며, 경상도 대표 김진호, 충청도 대표 최익, 기타 도 대표로 김도희가 선출되었다. 본부 연락 책임자는 임치정이었다. 최고 간부로 안창호, 양기탁, 윤치호, 이갑, 유동열, 이동휘, 전덕기, 이동녕, 이종호, 박은식, 신채호, 이회영, 이승훈, 김구, 안태국, 조성환, 노백린, 이준, 최광옥이 선임되었다. 안창호는 전쟁준비론에 힘을 싣기 위하여 군인 출신들을 예우했다. 신민회는 당사자 2인 외에는 누가 비밀 회원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안창호는 사람을 뽑을 때 언제나 두 가지 원칙을 지켰다. 애국 사상이 확고한 진실한 사람을 찾되 각 지방에서 고루 선발하는 것이었다. 이는 안창호의 통합 철학에 의한 것으로, 이러한 원칙은 나중에 흥사단 회원을 뽑을 때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체이므로, 입회 시에는 안창호가 일대일로 마주하는 형식으로 예식을 갖췄다. 입회 시 회원의 책임에 대한 간단한 서약식도 있었다. 회원의 생명과 재산을 신민회 명령에 따라 국권 회복에 바치기로 한다는 것이 서약의 내용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신민회는 1910년경에는 약 8백 명에 이르렀고, 청년학우회를 비롯해 각종 학회 등에서 활동한 신민회 인사들을 합하면 1천 명이 넘었다. 대부분 독립협회 청년회원들로 자주와 민권과 자강 운동에 맥을 잇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민회가 전국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양기탁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가 큰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사실상 신민회의 기관지 기능을 했다. 비밀 창립을 통해 결사체로 거듭난 신민회는, 새 나라 건설을 위한 각종 사업을 점진적으로 착실하게 수행해나갈 만반의 합의와 결의를 끌어냈다. 각지에서 모든 신민회 사업이 결의한 대로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동경 태극학회 연설로 인해 안창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국내 곳곳에서도 강연 초청이 끊이지 않았다. 안창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초만원을 이룬 군중들 앞에 서서 불길 같은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한 인사들이 전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안창호는 연단에 오를 때면 언제나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차분하게 연설을 시작했다. “대한의 남자야 여자야, 묻노니,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그러다가 그의 연설은 점점 열기를 띠면서 군중의 마음속에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안창호의 연설 기조는 미주 공립협회에서 작성해온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통영장정의 내용을 풀이한 것이었다. 즉, ‘국민 모두 나라의 위기를 자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자본을 일으키려면 먼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 덕, 체, 지로 무장하고 단결해야 한다.’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단결은 동포끼리 서로 믿는 것이고, 신성단결은 목숨을 다해 신념으로 뭉치는 것이다. 새 국민, ‘대한인’이란 언제나 ‘나’부터 먼저 도덕적인 인간, 나라에 쓸모가 있는 인간, 나라의 앞날을 위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간, 목표가 서 있는 인간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안창호의 귀국과 잇단 애국 연설은 국내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이승훈, 여운형 형제, 조만식, 안중근 등 수많은 애국 인사들이 안창호 연설에 공감하여 각기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구국 실천 운동에 앞장섰다. 안창호가 새로운 나라, 새 국민의 탄생을 역설하며 밤낮으로 동지들 비밀 규합에 분주할 때, 이토 히로부미의 밀정들은 안창호의 동향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