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안창호 체포
1909년 10월 26일,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소식이 국내로 전해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통감 자리를 소네 아라스케에게 물려주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를 만나러 하얼빈 방문에 나섰다가 안중근 총에 맞아 죽었다.
이토는 임나일본부설로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식민지 사관으로 무장하고 만주 시찰에 나섰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긴 일본은 1906년부터 만주 경제 착취 수단으로 남만주철도회사를 세워 푸순 지역의 대규모 노천 탄광과 안산 제철공장을 개발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은 이를 시찰하기 위함이었다. 이강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던 안창호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다.
안창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중근이 해냈다! 그러나 중근의 목숨이 위태롭다. 하얼빈으로 가봐야 한다. 이강이 기다릴 것이다.”
안창호는 기록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 항상 꼼꼼하게 모든 것을 기록 정리해왔다. 업무일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만에 하나 놈들이 나를 체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신민회 증거를 없애야 한다.’ 안창호는 정영도를 시켜 신민회와 관련한 모든 문서를 아궁이에 불태웠다. 그러고 나서 정영도에게 하얼빈행 기차 시간표를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국내에서는 일본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애국지사들을 무차별 검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권이나 사법권 모두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갑, 이동휘, 이종호 등이 서울의 경무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안창호는 10월 31일, 거주하고 있던 대성학교 정원 동쪽 침실에서 체포되었다. 안창호는 태연하게 끌려 나와 평양역으로 갔다. 학생들과 정영도가 울며불며 평양역까지 뒤따랐다. 정영도는 혹시나 해서 평양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 운행표를 헌병 눈초리를 피해 안창호에게 전달했다. 서울역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안창호는 그 쪽지가 발각될까 염려하여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 신고 있던 구두 속에 깊이 밀어 넣어둔 덕에 들키지 않았다.
안창호는 용산헌병대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당했다.
“배후를 대라! 네가 그 배후지?” 헌병 대장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발악했다.
정영도는 매일 같이 헌병대로 달려가 면회를 요청했다. 그러다가 안창호를 살피는 헌병대 보조원과 끼니를 나르는 소사의 마음을 얻어 경악할 만한 정보를 알아냈다. 놈들은 안창호의 음식에 정신을 망가뜨리는 독약을 섞는다고 했다. 정영도는 삼시세끼 식사를 외부 차입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내고, 김필순의 도움을 받아 식사 수발을 들었다. 식사 준비는 세브란스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있던 필대은의 부인 고씨가 했다. 정영도가 매끼를 헌병대로 가져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헌병대 대장의 마음을 샀다. 정영도는 5주 만에 면회 허락을 받고 안창호를 면회했다. 안창호는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영도를 보자마자 안창호는 헌병 대장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놈들은 나를 독립운동의 주동자로 몰아 옥중에서 죽일 셈이다.”
정영도가 도주하자고 권했지만 안창호는 단호히 거절했다.
용산헌병대 주변으로 밤이면 밤마다 학생들이 몰려와 애국가를 합창하고 안창호가 지어서 가르친 노래들을 불러대며 시위를 했다.
12월 21일 아침 8시. 헌병대의 연락을 받고 정영도가 달려갔다. 안창호가 헌병대 대장 방으로 끌려와 문초를 받던 중, 벽에 걸려있던 헌병대 대장의 칼을 빼 들고 ‘자살하겠다!’며 소동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정영도를 보자마자 헌병대 대장 눈을 피해 말했다.
“내 편지를 오씨 헌병에게 건넸으니 그 편지에 부탁한 대로 해라.”
그 편지에는 “영도야, 너는 이제 나를 잊고 다시는 오지 마라, 나를 잊어라. 미국으로 가서 너의 아주머님을 모시고 너의 동생 필립을 기르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하면 너를 미국으로 보내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정영도는 이 편지를 받아 들고 눈물을 쏟으며 기숙하고 있던 제중원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모두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다.
다음 날 헌병대 대장은 다시 정영도를 불러 ‘2인의 보증이 있으면 안창호 선생을 석방한다’고 했다. 김필순이 윤치호와 차리석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들이 보증을 섰다.
12월 31일, 출감된 안창호는 대성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용산헌병대로 재소환되었다. 1910년 1월 9일의 일이었다. 안창호는 이날부터 40일 동안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최석하가 나서서 일본과 협상을 했다. 최석하는 안창호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도록 다리를 놓았던 인물이다. 최석하는 안창호와 이갑, 이동휘, 이종호를 석방하면 전향을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자신은 없었다. 안창호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최석하와 정운복은 자신들의 야망을 일거에 꺾어버린 안창호가 미웠다. 그들은 일본에서 받은 안창호 회유 자금으로, 밀정을 풀어 안창호와 그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게 했다.
다시 풀려난 안창호는 김필순의 거처 제중원에 머물렀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김필순이 청진기를 목에 건 채 방으로 들어오면서 말을 건넸다. “형제여, 숨쉬기는 좀 어떤가? 어디 좀 살펴봐야겠네.”
안창호는 누운 채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야 견딜만하네. 그나저나 형수께서 나 때문에 고생이 많네. 늘 이렇게 폐를 끼친단 말이지. 허허.”
김필순은 청진기로 안창호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말했다.
“내가 이 소식을 형제에게 전할까 말까 하고 있었네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기에 내 말하겠네.”
안창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면서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김필순은 정색하며 소식을 전했다. “이재명이란 친구가 이완용을 처단했다는 소식일세. 얼마 전, 그러니까 작년 12월 22일에 일어난 일일세.”
안창호는 탄식했다. “오, 결국 이재명이 일을 냈구먼. 거사는 성공한 것인가? 재명 군은 무지막지하게 잡혀갔을 테고.”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와 융희황제가 서도 지방을 순시하고 있을 때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의논하러 왔던 이재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재명 군의 눈이 유난히도 반짝거렸었지.’
“그렇다네. 독이 묻은 칼로 이완용의 복부와 어깨를 찌른 모양이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안태국이 배후로 검거되었다네. 차리석이 전해 온 소식이라네.” 김필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운 청년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고 있으니 어쩌면 좋지? 안태국이 직접 지시한 일이 아니니 매 좀 맞고 나처럼 풀려나오겠지.” 안창호의 목소리도 떨렸다.
“창호, 자네 여기를 떠나게. 가족이 기다리는 미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세. 놈들이 극악무도하게 나올 것이네.”
“음, 일단 탈출하란 말이지? 시련에 봉착할 동지들을 놓아두고 갈 수 있을까? 하긴 내 이미 청년학우회 일만 마치면 조만간 만주를 돌아보고 혜련에게 갈 생각이 있었네만. 일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일어날 줄은 몰랐네.” 안창호는 속마음을 꺼냈다.
“잘 생각했네. 자네가 말한 대로 국내에서는 점점 상황이 나빠지고 있으니 만주로 가서 기지를 개척하고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차라리 확실한 독립 준비가 아니겠는가? 나는 솔직히 여기를 떠나고 싶네. 내 의술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 뜻을 펼치고 싶단 말이지.” 김필순도 속마음을 꺼냈다.
두 사람은 기회를 봐서 국내를 벗어날 만반의 준비를 해 놓자고 결의를 다졌다.
김필순은 만신창이가 된 안창호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키고 후배 의사인 이태준을 시켜 돌보게 했다.
“오, 자네가 필순이 얘기하던 이태준인가?” 안창호는 기력을 다해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몸이 말이 아닙니다.” 이태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 몸은 자네가 잘 치료해 주고 있으니 걱정 없네.” 안창호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청년 의사 이태준에게 청년학우회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이태준은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