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망명, 거국가
안중근 의거로 용산헌병대에서 풀려난 안창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김필순은 국내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이 확실하니 국내를 탈출할 것을 권했다. 해외로 가서 신민회 사업을 추진하자고 했다. 이갑도, 이종호 형제도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침 북경에 머물던 이강이 은밀하게 안중근 처형 소식을 전해 왔다. 일본은 1910년 3월 26일, 중국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의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1910년 4월 초, 안창호는 비밀리에 총감독 양기탁을 모시고 신민회 비밀회의를 소집했다. 신민회 실무진과 간부들이 모였다. 이갑과 이동녕, 유동열, 전덕기, 차리석, 김구, 이종호 그리고 이재명 거사로 얼마 전에 풀려난 안태국 등이 모였다.
안창호가 말문을 열었다. “일본은 열에 받쳐 강제병합을 서두를 것입니다. 안태국 동지, 많이 수척합니다. 놈들의 괴롭힘을 견뎌내다니, 장합니다. 이회영 선생 일가는 예정대로 무사히 서간도로 이주하셨지요?”
안태국이 대답했다. “작년 하얼빈 쾌거 직후 도산이 대성학교에서 체포, 감금되었을 때 양기탁 선생 집에서 긴밀하게 모였습니다. 그때 이회영 선생은 운 좋게도 명동 일대의 가산을 처분했다고 했습니다. 떠날 준비가 된 셈이라고. 일단 서간도 삼원보로 떠나신 듯합니다.”
이동녕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받았다. “그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소. 그 양반은 이미 이상설과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했던 경험이 있어서 아마도 성공적으로 안착할 거요. 나도 망명을 떠나야 한다면 일단 그곳으로 가려 하오.”
김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날, 이회영 선생은 안동 출신 이상룡과 김동삼을 불러들여야겠다고 했소. 황무지 개간과 이민자 훈련에 그분들의 추상같은 지도력이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 ”
유동열이 안창호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청년학우회의 정신훈련 못지않게 무장훈련도 필요하니 봐서 나와 김희선 동지가 그쪽으로 갈 생각도 있습니다.”
안창호는 기운이 솟았다. “아, 네! 좋은 생각입니다. 기지 개척과 군사훈련 두 가지가 동시에 훈련되어야 합니다. 미주 공립협회... 아니지, 미주 국민회가 투자해 둔 봉밀산 기지 개척지도 있습니다. 신민회 회원인 김성무와 정재관이 파견 가 있지요. 문제는 자금입니다.”
긴급회의 분위기는 사뭇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자금 마련’이라는 안창호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숙연해졌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신민회 동지들이 뜻을 합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이 솟는 일이라니! 역시 힘은 인격과 단결에서 나온다. 자금은 지혜를 모으면 된다.’
그때 차리석이 주위를 돌아보며 긴장된 얼굴로 회의를 진행했다. “놈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애국지사들을 무차별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안태국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섰다. “그렇습니다. 이에 대비하여 위험한 사람들은 국내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수척해진 이갑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당당한 군인의 풀이 꺾인 듯이 보였다. “도산의 말처럼 독립군양성을 위해 해외 기지 개척은 아주 중요합니다. 나는 러시아로 가서 이범진 공사의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양기탁이 이갑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렇소. 어느 곳으로 가든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훈련소와 학교도 세우고,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 근거지도 개척해야 합니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신민회 해외 기지는 이회영 선생의 서간도 삼원보와 미주 국민회가 시작한 밀산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고, 두만강 국경지대인 왕청현도 가능성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안창호가 좌중을 둘러보며 이동휘의 안부를 물었다. “이동휘 선배는 어디에 계십니까? 풀려나신 것은 확실합니까?”
유동열이 대답했다. “성재 선배님은 2월 20일에 풀려나 함경도 성진으로 가셨다 합니다. 일본의 불법 무도함을 꾸짖고 일본이 망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고 호통을 친 일로 더 가혹한 고문을 당한 것 같습니다.”
안창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 이동휘 선배가 왕청현 나자구에 의병 잔류 대원들을 모집해서 이들을 훈련 시킬 무관학교를 세우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유동열이 말했다. “나도 언뜻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망명하실 예정인지.... 사실, 의병운동이 시들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기와 군사훈련의 문제요. 최신 무기로 무장하려면 결국 자금이 문제지요.”
안창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잠자코 있었다. ‘맞는 말이다. 자금, 자금이 문제다.’
이갑은 이종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종호는 아무 말 없이 선배들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종호는 안창호와 이갑에게 5천 루블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이종호도 안중근 의거로 3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이갑은 이종호 형제와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갑이 긴급회의 종결을 서두르며 말했다. “자, 그럼 이번에 탈출하는 사람들은 일단 7월에 청도에서 만납시다. 일진회 잔당들과 밀정들이 날뛰고 있으니 모두 조심하세요.”
안창호도 동지들에게 다짐을 두듯이 주먹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그럼 각자 조심해서 탈출합시다. 다만 우리가 어디로 가 있든지 우리의 독립운동 방향은 초심대로 공화국 건설과 독립전쟁 준비입니다.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기지 개척을 서둘러야 합니다.”
간부들은 공화제 수립과 독립전쟁 준비를 신민회의 종지로 결의했다. 망명 동지들은 이를 위한 해외 기지 개척 사업과 독립군양성에 주력하기로 합의하면서 경과보고나 진행 상황을 부총감 안창호에게 알리기로 결의했다.
1910년 4월 6일, 안창호는 신채호, 김지간, 정영도와 함께 탈출에 나섰다. 사전에 모든 준비는 김필순과 그의 제부이자 대성학교 교사인 서병호가 마련해주었다. 서병호는 아버지 서경조(1852~1938) 목사에게 연락했다. 서경조 목사의 거처는 서대문 밖 독립문 근처에 있었다. 서경조는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의 담임 목사이다.
안창호는 4월 6일, 이른 새벽부터 종일 인력거를 이리저리 갈아타면서 밀정을 따돌렸다. 그리고 정영도를 시켜 김지간과 신채호를 은밀하게 서 목사 집으로 불러들였다. 밤 10시, 4인은 미리 와 있던 서병호의 큰 아버지 서상륜 선생이 보낸 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탈출 경로는 마포 행주에서 작은 배를 빌려 타고 황해도 장연 송촌리 서상륜의 집에서 잠시 거처하다가 중국인의 소금 배에 옮겨 타기로 계획되었다.
이들은 밤새도록 행주 나루를 찾아 헤매다가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대기하고 있던 풍범선에 무사히 올라탔다. 밀정을 따돌리고 몰래 조국을 떠나는 심정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안창호는 거국가를 읊조렸다. 동행자들은 모두 같은 심경이었다.
거국가
1절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4절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때는 빈주먹을 들고가나
이후 상봉할 때에는 기를 들고 올 터이니. 눈물 흘린 이 이별이 기쁜 환영 되리로다.
악풍 폭우 심한 이때 부대부대 잘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신채호가 침묵을 깼다. “형님, 그 노래가 제 마음을 울립니다.” 동행자들 모두 숨죽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안창호의 ‘거국가’는 1910년 5월 12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조국을 떠나는 심경을 노래에 담은 거국가를 동행자 신채호가 작자 ‘신도新島’로 기재하여 『대한매일신보』에 타전했다. 신도는 ‘신민회의 도산’으로 해석된다.
이후 거국가는 청년들의 애창곡이 되었으며 조국을 떠나는 망명 인사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 안창호는 대성학교에서 ‘애국가’와 함께 수많은 노래를 만들어 보급했다. 안창호의 애국 창가는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학도가’, ‘야구단가’, ‘격검가’, ‘항해가’, ‘한반도가’, ‘단심가’, ‘혈성대’, ‘한양가’, ‘모란봉가’ 등. 모두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이 노랫말은 서양 민요나 고전 명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신채호는 안창호의 노랫말들이 모두 한편의 ‘시’나 ‘시조’라고 했다.
거센 풍랑으로 배가 요동을 치면서 교동도에 이를 때 신채호가 다시 입을 뗐다.
“형님, 나는 더 이상 배를 못 타겠소. 이놈의 멀미가 말썽입니다. 나는 여기서 내려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겠습니다. 청도에서 뵙죠.”
잠시 망설이던 김지간도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그럼 저도 여기서 내려 단재 형님을 모시고 압록강을 건너겠습니다. 서간도 땅이 궁금합니다.”
신채호와 김지간은 교동도에서 내려 개성으로 갔다.
안창호와 정영도는 예정대로 황해도 장연에 도착했다. 풍범선을 보내고 송촌리 마을로 가기 위하여 하루 묶을 객실을 찾았다. 항구는 중국인, 일본인 배꾼들과 뒤섞여 북적였다. 망명객으로서는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곳이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송촌리 서상륜 집에서 일주일간 묵을 수 있었다. 송촌리에는 천여 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고, 서상륜과 김필순의 맏형 김윤방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 민간인 교회, 소래교회가 있었다. 서상륜은 만주 동관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어판 신약성경 루카 복음을 번역하여 국내로 들여온 장본인이다.
서상륜(1848~1926)은 의주 출신으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고아가 되었다. 그는 만주 일대를 떠돌며 홍삼 장사를 했는데,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구호로 완쾌되어 장로회 신자가 되었다. 그 후 같은 교단의 심양(선양) 동관교회 목사인 로스(Ross, J.)와 친교를 맺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한국말 선생이 되었다. 서상륜과 로스는 중국어로 번역되어있는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82년 가을에 우리나라 최초로 『예수셩교젼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서가 간행되었다. 서상륜은 성경 인쇄를 위한 식자와 인쇄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이듬해 서상륜은 이 성서를 가지고 귀국하려고 만주 봉황산 변문 마을에 있는 고려문을 지나다가 붙잡혔다. 성서 인쇄물을 모두 빼앗기고 의주 감옥에 갇혔으나 지인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고향을 떠나 황해도 장연 송천리로 이주했다. 서씨 형제는 송천리에서 김필순의 맏형, 윤방을 만나 자생적 교회를 설립하고 이 소래교회를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지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884년에 나머지 신약 마태복음서와 마르코복음서를 번역했다. 『예수셩교젼서』 4복음서가 완성된 것은 1887년이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미국과 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언더우드(1859~1916)와 아펜젤러(1858~1902)가 선교 활동을 목적으로 제물포로 입국했다. 이들은 1884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미국인 청년선교사들이었다. 언더우드는 장로회, 아펜젤러는 감리회 교파였다. 언더우드는 1886년 서상륜과 김윤방의 초청을 받아 장연 송천리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을 때 교인 14명 가운데 13명이 서씨 형제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선구자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고향도 아닌 황해도 장연에서 김 판서 댁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이들이 세운 소래교회와 해서제일학교는 명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와 김필순의 여동생 김순애, 김필례 그리고 조카 김마리아 등이 이 학교에서 초등과정을 마쳤다.
안창호는 송촌리를 떠나기 전날 서상륜의 부탁을 받고 해서제일학교에서 고국에서의 마지막 연설을 했다. 마을 주민과 청년 학생들은 애국심을 고취 시킨 이 연설에 감동했다. 서상륜은 거액을 주고 안창호를 안전하게 태워 줄 중국인 상선을 예약했다. 그 소금 배는 천진(톈진)까지 가는 배였다. 4월 하순. 마침내 고국 땅을 떠나는 날, 안창호는 서상륜 집안 식구들과 눈물로 작별했다. 그리고 소금 배에 올라탔다. 소금 배에는 중국인 선장과 일꾼 3명 그리고 안창호와 정영도, 모두 6명이 탔다. 소금을 싣고 있어 갑판까지 물이 차올라 출렁거렸다. 안창호는 신채호와 김지간이 뱃길 탈출을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배는 소금을 팔기 위해 해안 포구마다 들렀다. 참으로 위험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정이었다.
소금 배는 황해를 건너 20여 일 만에 마침내 중국 땅 연태(옌타이)에 도착했다. 뱃값은 천진까지 가기로 이미 지불된 상태였지만, 안창호와 정영도는 연태에서 조그만 통통배로 갈아타고 천진으로 갔다.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진에서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