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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3/10

3화. 워싱턴회담과 외교후원회

by 은명

3화. 워싱턴회담과 외교후원회

임시정부 이동녕 내무총장은 북경특파원 안창호에게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대응하는 외교전략을 수립하라는 과제를 안겼다. 미 대통령 하딩이 7월에 발표한 이 회의는 강대국 이권 재조정을 위한 회담이라는 것을 안창호는 간파하고 있었다.


1921년 7월 말, 안창호는 상해 흥사단 사무소에서 동지들을 만났다. 마침 조상섭, 장덕로, 손정도, 이원익, 김병조, 송병조 등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목사로 지난 3월 3일 대한야소교진정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국내외 교단에 발송하는 선전 활동에 주력해 왔다. 안창호는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에 관해서 이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안창호가 소리 없이 등장하자 모두 일어나 반겼다. 좌장 격인 김병조가 먼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정부에서 방면되시더니 국민대표회의 소집일로 더 바빠지신 것 같소.”

손정도가 이 말을 받아서 인사를 건넸다. “임시정부를 살리자고 시작한 일일 테지요. 재야로 물러섰는데도 책임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신 듯합니다. 우리가 죄송합니다.”

안창호가 손정도의 말을 듣고 손사래 치며 화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정부에서 물러나니 짐을 내려놓았다는 기분은 잠시뿐이었소. 지금으로서는 독립운동하자는데 네 몫, 내 몫이 따로 없고 오직 역할 분담이 있을 뿐이더이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갈 길이 먼듯하오.”

김병조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사람들은 지름길을 외면하고 에둘러 가는 길을 좋아하는 것 같소. 상해 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면 간단한 일을 왜 이리 애를 먹이는지 모르겠소.”

손정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우리가 우왕좌왕 다투고 있는 중에도 세계 패권은 강대국 중심이오. 달걀로 바위 치기랄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면 일본만 이익을 보게 생겼어요. 죽기로 작정하고 외쳤던 만세운동처럼 한목소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국민대표회의가 그래서 중요하지요.”

안창호가 입을 열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잘 되면 유일당을 구성해서 이당치국으로 가야겠지요. 참, 그런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요. 숙의 토론을 하고 있던 분위기였는데요.”

조상섭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상섭은 국무원 회계 검사원 겸직으로 지난 2월 28일 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미국 대통령 하딩이 워싱턴에서 군축회담을 연다는 소식을 받고 어떻게 해야 하나 숙의 중이었습니다.”

안창호가 조상섭을 향해 물었다. “워싱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왔소?”

손정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군축회담에 참가하여 발언권을 얻고 하려면 외교자금이 필요하답니다. 만들어서 보내라고.... 서재필 박사와 대표단을 구성하겠답니다. 문제는...”

조상섭이 말을 이었다. “군축회담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이 해군 군비 축소와 태평양 지역 나라들의 당면한 문제들을 의제로 다룬다고 합니다. 이번 회의야말로 독립운동의 사활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김병조가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신뢰를 저버린 마당이라... 사리에 밝은 도산이 정부 내에 계신 것도 아니고.... 그러니 믿을 근거를 숙의하던 중이었소.”

안창호가 이 말을 듣고 격앙되어 태평양회의 외교후원에 대한 소신을 털어놓았다.

“태평양회의의 본질은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회담일 뿐입니다. 유럽 대전 이후로 일본은 만주와 시베리아 침략에 군사력을 쏟아붓고, 해군력을 증강하여 태평양을 노리고 있소. 태평양회담의 본질은 일본의 해군 군비 축소에 초점을 두고 있을 것이오. 강대국들이 일본견제를 위해 한반도 독립 승인을 할 것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소. 이는 가면에 불과하오. 여태껏 동양평화를 운운한 세계회담은 모두 위장이었소.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무시하고 약탈하면서 평화를 부르짖어 온 사실을 기억해야 하오. 이런 사실을 두고도 미국이, 아니 강대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고 언론에서 떠드는 소리는 모두 국민을 속이는 것이오.”

모두 숙연해졌다. 모두들 안창호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안창호는 문득 분위기를 생각했다. 그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치능력과 독립 자격을 키워야 합니다. 그 표준은 개인과 국가가 지식의 힘, 금전의 힘, 신용의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기초를 닦아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독립할 자격. 우리 돈과 우리 지식과 우리 법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독립의 날을 기약하지 않고 태평양회의니 뭐니 하는 것은 다 입에 발린 거짓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최선은 이러한 사실을 기반해서 대표되는 인물이 누구건 그를 거국일치로 응원해야 합니다. 금전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하니 금전을 후원합시다. 또한, 외교 자료를 공급합시다. 다만 전 국민이 일치합시다. 통일, 단결! 이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하자는 것입니다.”

안창호의 정부 사임 이후 국무위원직을 맡게 된 손정도가 입을 열었다.

“도산 각하. 역시 도산의 통찰은 믿음이 가오. 역시 재야인이 되어도 우리의 지도자요. 그렇다면 우리 목사들은 회담에 제공할 진정서를 만들고, 후원회 조직은 균형되게 인선을 구성합시다. 우리가 마음을 비웁시다. 이동녕 영감께서 한시름 놓겠습니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더이다.”

조상섭이 긴장을 풀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홍진 의정원 의장을 후원회 조직 임시의장으로 모시고 후원회를 조직하겠습니다.”


8월 13일, 프랑스 조계 백이로(白邇路) 439호 교민단 회관에 100여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홍진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를 조직했다. 홍진은 이 일에 주력하고자 임시의정원 의장 자리를 김인전에게 물렸다. 그리고 8월 18일 제2차 총회에서 54명이 출석해 규칙을 제정했다. 조상섭은 재무전담 간사답게 의무금과 기부금으로 수입계획을 짜서 외교 후원비용으로 70%를 쓰고, 나머지는 기관지 『선전』 발행과 본회 경비로 지출하도록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조직은 계파 균형을 맞췄다. 3차 총회에서 간사장 홍진, 서무 전임 장붕, 서기 이병주, 간사 김태연, 장덕로, 이탁, 여운홍, 조상섭, 김인전, 양기하, 신현창 등 11명의 간부를 선출했다. 기관지 『선전』은 장붕을 주필로 1회 발행했고, 자금 모금을 위한 연설회와 각종 진정서 등을 외교 자료로 제공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축회담은 예정대로 1921년 11월 12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다. 태평양회담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포루투갈, 중국, 일본의 9개 강대국의 원수가 참여했다. 반면 모스크바 회의는 극동 피압박민족 인민대표단이 주체가 되는 회의였다. 러시아는 워싱턴회담에서 빠졌지만, 일본은 아이러니하게도 모스크바 회의와 워싱턴회담, 양쪽 모두에 끼어 있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상황을 나름대로분석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광수 이후로 『독립신문』 편집국장을 담당하고 있는 차리석과 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안창호가 말을 꺼냈다. “이번 워싱턴과 모스크바 회의의 결과는 어떨 것 같소? 워싱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서재필 박사의 외교활동이 굳게 닫힌 회담장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차리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일본이 참가하고 있으니 역시 회담장 진입은 어렵겠지요.”

“미국이 일본을 주목하고 있으니 또 모르는 일이오. 그 일로 대통령이 임시정부를 비우고 떠났으니 어떠한 성과라도 가지고 돌아와야 할 텐데.... 그래야 외교후원회의 그간 노력이 명분을 찾을 수 있을 테지.” 안창호는 이승만의 외교를 걱정하고 있었다.

차리석은 안창호의 의중을 간파했다. “도산 형님은 파리 외교에 비추어 이번에도 성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계시지요?”

안창호는 그런 차리석을 믿고 있었다. ‘나의 쉴 곳, 뜨거운 여름날 느티나무 같은 존재.’ “내가 대태평양외교후원회 구성 때 했던 말은 회담 결과보다는 준비과정에서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대통령 외교를 후원하자는 뜻이었소. 단결훈련이라고 할까? 이를 계기로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박차를 가하자는 그런 뜻 말이오.”

“압니다. 형님 연설의 깊은 뜻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차리석이 말했다.

“워싱턴회담의 본질은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 영일동맹을 해체하는 것이 본래 취지일 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에는 중국, 다음에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지. 무서운 나라요.” 안창호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에 치를 떨었다.

“이번 회담의 압박으로 일본은 시베리아에서 일단 철군할까요? 그러면 우리 무장 독립군도 영향을 받을 텐데요.” 차리석도 나름대로 정세를 읽고 있었다.

안창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시베리아 철군은 만주침략으로 이어질 것이오. 동북 3성 땅이 좀 크오? 문제는 코민테른이요. 모스크바 레닌 정부가 중국혁명을 돕고 있고 극동피압박민족 해방을 지원한다고 나섰으니 일본도 긴장하겠지.”

“중국이나 한국은 새로운 혁명이념에 갈등이 표출될 테지요.”

“그래서 우리는 조속히 만주 독립군단체들을 통합해야 하오. 국민대표회의가 잘 진행된다면 좌우 단체 통합으로 독립전쟁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텐데.... 걱정이오.” 안창호는 만주 통합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극동인민대표회의는 외교전문가 여운형과 김규식 동지가 앞장서 파견되었으니 좋은 소식이 오겠죠. 제발... 진영 내부 분열만 없어도 성공인데....”

안창호는 차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재필과 대표단을 구성하여 우리의 목소리를 내겠다던 워싱턴 외교활동은 역시 성과 없이 2월 6일에 막을 내렸다. 안창호가 대태평양외교후원회를 구성할 때 예견했던 내용대로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회담 내용이 전해졌다. 안창호가 예견한 대로 워싱턴 본회의장에서 서재필과 이승만 대표는 본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우리의 주요 관심 대상인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 관계가 해체된 한편, 미국이 일본 함대의 현상 유지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미국과의 연대가 돈독해졌다. 일본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대 해군력을 보장받은 셈이었다. 이는 소련의 동양 남하를 경계하기 위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1922년 2월 6일 자로 워싱턴 군축회담은 막을 내리고, 상해에서 후원회도 해산되었다.

차리석은 『독립신문』에 회담 결과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은 우리 국민을 좌절하게 했고, 미국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의 외교 좌절은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게 했으며, 동시에 임시정부의 붕괴를 가속시켰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서둘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임시정부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이른바 창조파의 입김이 거세졌다.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앞두고 되돌아 가버린 이승만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서재필, 이대위 등 미주 지도자들과 국정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큰 과제라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1921년 9월 14일 미주 방문 비자를 신청했으나 거부 당했다. 비자 거부는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현진이 쓰러졌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윤현진은 임시정부 활동을 통해 얻은 안창호의 최애 측근이었다. 윤현진(1892~1921)은 경남 양산 출신으로 만석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동래부사와 사천군수 등을 지냈다. 16세에 일본 메이지로 유학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에서 활동했다. 메이지 법과대학을 졸업한 윤현진은 귀국하여 고향에 의춘학원을 설립했고, 소비조합운동을 하면서 부산 백산상회를 경영했다. 3.1운동 이후 30만 원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고 상해로 망명했다. 윤현진은 당시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를 만나 임시정부 청년 각원 재무차장으로 봉사하였고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윤현진은 도산의 인격, 기획력, 통찰력에 감동하여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따랐다. 안창호도 윤현진의 밝은 두뇌와 굳은 의지, 재정운영 경험 등에 신뢰를 보내고 신임하여 가까이 등용했다. 임시정부 초기 윤현진과 이광수는 안창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만큼 아끼는 인재들이었다. 둘은 서로 동갑이며 메이지 출신으로 한 사람은 재정에, 또 한 사람은 언론에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몸이 약했다. 건강 문제는 이광수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만류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안창호가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나올 무렵, 윤현진도 따라서 사직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안창호가 이를 말리며 거의 밤샘 토론을 한 일도 있었다. 안창호가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최고기관의 위상을 차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국민대표회의 운동을 전개하는 일에 윤현진은 적극적으로 안창호를 도왔다.

여운형이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 참가 대표단 구성으로 한창 바쁠 때, 안창호는 8월 상해에서 윤현진 등과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주비위원회는 상해 기성회 회원 30명, 북경 교민회 선출위원 15명, 북경군사통일회 선출위원 5명, 천진교민회 선출위원 5인으로 구성되었다. 윤현진은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윤현진의 소식을 듣고 안창호는 프랑스 조계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오!”

안창호의 외마디에 병상을 방문 중이던 신익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뇌출혈이 아닌가 합니다.”

“오, 이런...!” 안창호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각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신익희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윤현진은 의식이 없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눈을 감은 채 조용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안창호는 신익희를 향해 울먹이듯 낮은 소리로 물었다. “우리에게 어찌 이런 시련이 있단 말이오. 일어날 수 있겠지요?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신익희도 눈물을 떨구었다. “임시정부의 동반자, 나의 의형! 제발 일어나시오...!”

신익희의 슬픔에 안창호도 목놓아 울고 싶었다. “신 동지, 여긴 내가 지키겠소. 의식이 깨어날 때까지. 동지들 병시중은 내 전문이라오.”

신익희가 소리 죽여 말했다. “언젠가 우리끼리 주고받은 말이 있습니다. 조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유골을 선산에 묻지 말자고. 자녀들도 혼인시키지 말자고....”

안창호가 이 말을 듣고 더욱 애끊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 조국독립! 우리는 이렇게 분열하고 있는데...!”

안창호는 정성껏 병실을 지켰다. 동지들이 많이 다녀갔다. 다들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1921년 9월 17일, 윤현진은 마침내 숨을 거뒀다.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졌다. 상해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했다. 안창호는 입원비용과 장례비 일체를 부담했다. 이는 소중한 후배를 위해 아낌없이 주고자 했던 안창호의 사랑 비용이었다. 나중에 윤현진의 형이 상해로 와서 안창호에게 비용을 갚으려고 했으나 안창호는 이를 거절했다. 일제는 아사히 신문에서 윤현진의 사망을 기사로 다뤘다.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망. 그의 죽음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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