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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4/10

4화. 김붕준의 가족과 김마리아

by 은명

4화. 김붕준의 가족과 김마리아

윤현진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안창호는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창호는 주변의 가까운 동지들 면면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마치 앞으로는 절대 동지를 죽음으로 잃지 않겠다는 듯이.

안창호는 짬을 내어 프랑스 조계 보강리 65호로 김붕준 가족을 방문했다. 김붕준의 아내 노영재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노영재는 김마리아와 함께 무사히 국내를 빠져나와 얼마 전 상해로 망명했다. 노영재는 아들 덕목과 어린 두 딸을 데리고 7월 10일 인천항에서 상해로 오는 중국 상선 새우젓 배를 탔다. 김마리아는 병중이었으며 탈출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노영재의 재치와 헌신적인 수발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김붕준(1888~1950)은 용강 출신으로 재림교인이며 상해 흥사단 창립 회원이다. 서울에서 보성중학을 다닐 때 신민회와 서북학회에 가입하면서 박은식, 노백린, 이동녕과 안창호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 105인 사건을 피해서 황해도 대동강 지류에서 간척과 개간에 종사하다 3.1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황망하게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통합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서기로 복무하다가 1920년에는 교통부 참사로 전보되어 선전위원장 안창호의 지령에 따라 고향으로 밀파되어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리고 대한적십자사 상원의원과 의정원의원과 비서장 등을 역임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안창호에게 김붕준은 소리 없이 뜨고 있는 큰 별과 같은 존재였다. 김붕준은 1938년 흥사단 원동위원장을 지냈다. 또 제15대 의정원 의장을 할 때 도산 안창호의 민족 통일전선 유업에 따라 김원봉계의 민족혁명당 의정원 등원을 결단했다가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942년 10월, 흥사단 동지인 송병조 의정원 의장 때 좌우합작에 성공하면서 명예를 회복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붕준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늘 걱정되어 이들을 상해로 이주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창호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를 통솔하던 김순애는 안창호에게 김마리아의 탈출을 의논해 왔다.

김마리아(1894~1944)는 모교 정신여고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남산 왜성대로 잡혀갔다. 그 이후 모진 고문을 당해 회복이 어려운 난치성병을 얻고 1919년 8월 4일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독립정신으로 활활 타올랐다. 김마리아는 정신여고 출신들과 기존의 여성단체들을 통합하여 1919년 10월 19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 2천 3백원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했다. 그러다가 동료 오현주 남편의 밀고로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추가 선고받았다. 그녀의 몸이 더욱 악화되어 사경에 이르자 1921년 5월 22일 다시 병보석으로 나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안창호에게 김마리아는 억울하게 죽은 김필순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김필순이 안창호에게 넘기고 간 숙제이며 김필순에 대한 보은의 기회였다. 동경 2.8독립선언과 국내 3.1운동 조직운동가 김마리아의 탈출 계획은 일경을 따돌려야 하는 모험이 따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안창호는 교통부 참사 김붕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탈출 비용을 지원했다. 김붕준은 김마리아의 은닉을 위해 중국 상선 새우젓 배를 마련했다. 그의 아내 노영재는 아들 덕목과 어린 두 딸 효숙과 정숙 그리고 김마리아와 함께 1921년 7월 10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여 만에 상해 항구에 도착했다. 김마리아는 상해 홍십자병원에 입원했고, 노영재와 자녀들은 무사히 김붕준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안창호가 김붕준의 집에 도착하여 쪽문을 두드리자 8살 소년 덕목이 문을 열었다. 덕목은 인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안창호는 과자가 담긴 봉지를 덕목에게 건네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엄마 아빠 안에 계시지요?”

안창호의 예고 없는 방문에 김붕준과 노영재 부부는 당황해 했다. 김붕준이 말했다. “어서 오세요, 각하. 미리 말씀해 주시면 집안 정돈이라도 해 놓는 건데....”

안창호는 어린 효숙을 번쩍 안으며 말했다. “일 없소. 갑자기 온 것은 내가 미안하오. 음, 이 꼬마가 둘째?”

어린 덕목이 깔깔대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닌데, 효숙인데요?”

안창호가 이번에는 정숙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럼 네가 5살 정숙이로구나.”

노영재가 웃으며 말했다. “효숙이가 6살 큰 애, 정숙이가 둘째랍니다. 연년생이라 이 양반도 가끔 헷갈리나 봅니다.”

안창호는 기분이 좋았다. 순간 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에서 뛰어놀던 수산과 수라가 생각났다. “오, 노 여사. 내 그대를 만나면 큰절을 하려고 했소. 마리아를 데리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노영재가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리아 언니는 대한의 보석같은 존재이지요. 그러니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언니가 가슴 통증이 너무 심하던데 이십일 넘게 배를 탔으니 많이 아플 것입니다. 일간 저도 병원 방문을 하려고요.”

안창호는 모처럼 아이들과 놀아주며 김붕준의 가족과 함께 오후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아, 가족의 일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헌신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 가족. 이 아이들은 부모의 나라 사랑 정신을 배우며 미래 대한의 일꾼으로 성장할 것이다.’


노영재(1895~1991)는 바느질 솜씨가 훌륭했다. 틈틈이 넥타이를 만들어 생활비를 벌고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1924년 남편 김붕준은 국무원 비서장으로 박은식 제2대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필했으며, 임시헌법을 국무위원제로 개정 공포할 때 이를 직접 낭독했다. 노영재는 박은식 임시대통령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해 성심껏 뒷바라지했다. 1928년 상해교민단 단장을 거쳐 1930년 인성학교 교장에도 취임했다. 교장 재임 중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조직 명령을 받고 광주로 파견, 그곳에서 아이들 셋을 중산대학에 보냈다. 안창호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로 인해 도산 안창호가 체포되자 김붕준의 아들 덕목도 관련 인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때 덕목의 나이 19세 당당한 청년이었다.

덕목(1913~1977)은 1934년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1939년에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에 참전하여 중국군사위원회 군령부첩보학교에서 중국군 상위계급으로 활동하고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참모가 되었다.

큰딸 효숙(1915~2003)은 1936년에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 선전공작에 앞장섰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서 활동하면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했다. 1941년에 임시의정원 의원, 1944년 민족혁명당감찰위원, 광복군 제2지대에서 종군심리전에 나섰다. 효숙의 남편 송면수는 중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을 지냈다.

작은딸 정숙(1916~2012)은 1937년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언니와 함께 활동했다. 1938년 한국독립당에 참가했고,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임시정부 각부 비서 활동을 했으며 1945년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한국어 전담 선전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4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화대표단 비서직을 역임했다. 정숙의 남편 고시복은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9사단에서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1940년에 서안광복군에 참여했고 1943년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45년에는 광복군 정령이 되었다.

김붕준과 노영재의 세 자녀와 두 사위 모두 독립운동 공로자로 서훈된다. 일가족 대부분이 흥사단에 입단하고 ‘흥사단주의’로 나라에 헌신했던 위대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안창호는 홍십자병원으로 김마리아를 보러 갔다. 안창호에게 홍십자병원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곳이었다. 동서 김창세는 작년 9월에 미 재림교단의 로마린다의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창세는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공중보건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공중보건과 위생실태는 엉망이었다. 김창세의 관심 분야는 ‘민족건강개조’였다. 안창호는 김창세가 추구하는 보건 의학에서 독립 대한의 보건위생과 환경개조, 그리고 음식과 운동 등 체력향상을 위한 생활 개조 운동의 비전을 보았다. 덕, 체, 지의 수양과 동맹수련이야말로 신국건설의 진리이자 ‘흥사단주의’였다.

안창호가 병실을 노크하고 들어서니 김순애와 차경신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김순애가 말했다. “선생님, 드디어 귀한 시간을 내셨군요. 감사합니다.”

안창호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내 진작에 왔어야 했는데.... 홍십자병원을 믿고 이제야 시간을 냈소. 마리아는 좀 어떻소?”

마리아가 눈을 떴다. “... 안창호 선생님?”

“그렇다오. 안창호라오. 자네가 어린 소녀였을 때 봤었지. 몸은 좀 어떻소?”

마리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선생님을 뵈니 이제야 상해로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고생이 많았소. 이제는 안심하고 오로지 몸 건강만 생각하세요. 그런데 여기 또 한 분 환자가 계셨군.” 안창호는 그제야 환자복을 입고 있는 차경신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김순애가 차경신을 소개했다. “여기는 차경신. 마리아와 절친입니다. 이 친구도 몸이 아파서 이 병원에 같이 입원했답니다.”

“선생님, 저는 차경신입니다.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세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서 대한청년단연합회에서 총무로 활동하다가 이번 경신참변을 피해 상해로 왔습니다.” 차경신의 목소리가 따뜻한 햇살처럼 럼 울렸다.

“오, 대단하오. 그럼 차 동지는 이탁이나 오동진 군을 잘 알겠구려!” 안창호는 반가웠다. ‘오, 위대한 대한의 여인들이여!’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김순애가 차경신과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이 두 사람이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모노 옷 띠에 감춰서 부산으로 왔을 때가 생각나요. 겁 없는 여자들이지요. 그때 형부(서병호)와 저는 이 두 분의 눈에서 대한독립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김마리아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참, 고모의 눈빛에서는 섬광이 마구 번뜩였는걸요. 호호.”

안창호는 창백했던 김마리아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느꼈다. “참, 노영재 여사가 안부를 전합디다. 김마리아는 대한의 보석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허허.”

김마리아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예요. 노영재가 보물입니다. 어린 두 딸이 저로 인해 냄새나는 배를 타고 고생 많이 했지요. 거의 한 달을 바다 위에서요. 항구에 정박할 때 8살 덕목이는 망을 보고 6살 효숙이는 새우젓 가마니 속에 저를 감추었지요. 5살 정숙이는 그 옆에서 아주 태연하게 엄마를 조르는 아기 노릇을 했답니다. 칭얼대면서요. 호호. 그 아이들이 보고 싶네요.”

차경신이 놀라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아니, 새우젓 가마니 속에 숨었다고?”

김마리아가 웃었다. “어쩌겠어? 새우젓을 실은 배니까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일경이 한 번씩 순시를 하는데, 가마니 속에서 말 그대로 가만히 숨죽이느라 죽을 뻔했지. 그래도 새우젓 비린내가 고맙던걸? 호호.”

안창호는 기뻤다. 요란한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맡겨진 비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이 여인들은 대한의 큰 보물이었다. 안창호는 이들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 혜련이 이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병실을 나오면서 안창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보게 필순이, 마리아는 걱정 마시게.’

김마리아는 쇠약한 몸으로 고모 순애가 이끄는 대로 상해대한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제10회 의정원 황해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가 막을 내린 후 1923년 7월 차경신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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