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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5/10

5화. 인성학교 교장 취임, 동명학원 설립 구상

by 은명

5화. 인성학교 교장 취임, 동명학원 설립 구상


안창호는 여운홍의 후임으로 1921년 11월,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교장 여운홍은 태평양외교후원회 간부로 활동했다. 몽양 형님이 시키는 대로 안창호를 도운 것이다. 그러던 여운홍이 돌연 귀국하겠다고 했다. 보성전문학교 영문학 교수로 초빙된 것이다. 덕분에 안창호는 여운홍 교장이 비운 잔여 임기를 대신해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나오니 이제야 교육현장으로 돌아왔군.’ 하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내무총장 취임 전 선우혁과 대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상해 교민단 자녀들의 초등교육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선우혁은 선천지역에 미 북장로교단의 후원으로 설립된 신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선우혁은 상해 망명 후 여운형, 한진교 등과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회 소속 기독소학교를 설립했다. 선우혁은 이념과 재정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었다.

“형님께서 내무총장에 부임하신다면 국가 비전과 함께 공교육제도 확립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상해로 모여드는 교민은 계속 늘고 있는데, 이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녀 교육문제일 겁니다.”

인성학교의 처음 시작은 1916년 가을이었다. 당시 만주와 시베리아에는 영세하나마 많은 민족학교가 있었지만 상해는 이렇다 할 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나마 동제사가 1913년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가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여운형, 한진교, 선우혁, 김철 등 청년들은 한인들이 다니던 상해 교회에 한인 기독소학교를 설립했다가 1917년 2월, 공동조계 북풍로(곤명리) 재복리 75호 소재지로 소학교를 이전했다. 그리고 인성학교로 개명하여 교민들의 정식 초등 교육기관으로 출범시켰다. 초대 교장은 여운형이었다.

내무총장에 부임한 안창호는 인성학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원에 나섰다. 안창호는 인성학교를 장차 정부 산하 공립소학교로 개편하여 아동 의무교육을 제도화하고자 했다. 교육방침은 덕육, 체육, 지육을 기초로 하는 민족교육과 민주적 시민훈련 교육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립과 자활능력을 길러주고자 했다. 이는 대성학교의 교육구국운동의 전통이념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인성학교는 1920년 여운홍 교장 때 모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체계화되어 갔다. 한진교 등의 기부금으로 교과서도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가르쳤다. 7~13세 학령 아동이 입학하여 4년 후에 졸업했다. 차츰 2년제 보습 과정을 설치하여 6년제로 기간을 늘리고, 졸업자가 중국 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영어, 수학, 한문 등을 가르쳤다. 국내에서 전문학교나 중등교육을 졸업한 교사들이 채용되었다. 여운형, 서병호, 최창식, 현정건, 김두봉, 김문숙, 신언준 등이었다.

그러나 인성학교는 만성적 재정난을 겪었다. 이에 이동휘 총리를 비롯하여 이동영, 이시영, 신규식, 안창호, 남형우, 손정도 등 정부 내각 총장급과 의정원의 특별후원이 시작되었다. 1921년 통합임시정부 학무총장에 부임한 김규식은 학무부 직속 교육과를 두고 학무위원회를 설치했다. 공립소학교를 의무화하여 교육 기회균등의 이념을 제도화했다. 인성학교가 디딤돌이 되었고, 인성학교를 거류민단 소속으로 두었다.


1921년 11월, 여운홍의 잔여 임기로 교장에 취임한 안창호는 임시정부와 교민단, 특히 흥사단이 참여하는 10인으로 구성된 인성학교유지회를 조직했다. 회장에는 김인전, 위원으로는 안창호(교장)와 윤기섭(학감)을 포함하여 조상섭, 남형우, 여운형, 차리석, 한송계, 김구, 박진우, 김종상 등이 참여했다.

인성학교는 1924년 조상섭 교장 때 보습 학과가 강습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학교건축을 위해 성금을 모금했다. 국내에서도 성금을 보냈다. 이렇게 모인 건축비로 1926년에 프랑스 조계 마랑로 협성리 1호에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학교를 이전하였으며, 6년제로 확대되었다. 이 무렵 인성학교 졸업생은 100여 명, 재학생은 50명이었다.

1932년에는 유치원과 야간 학교도 설치되었다. 수업시간 이외에 학예회, 연주회, 가극대회 등의 과외 활동을 했으며, 학생들의 자치조직으로 상해소년회가 조직되어 일정한 주제로 토론 대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문예 잡지 『상해소년』을 발간했다. 1935년 폐교 당시에는 『인성학우』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1932년 상해 사변 이후 일제는 공동조계 당국에 항일단체의 해산을 요구하고 친일단체 육성을 통해 상해 한인을 모두 일제의 통치하에 두려고 했다. 인성학교는 1935년 11월 10일 상하이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식민지교육을 강요받아, 11일부터 무기 휴학을 선언하여 사실상 폐교되었다. 그러나 ‘인성학교’라는 이름은 상해에서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으며, 1975년에 폐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대 교장에는 여운형, 여운홍, 안창호에 이어 김태연, 손정도, 선우혁, 이유필, 조상섭, 김종상, 최중호 등이 역임했다. 흥사단 동지들이 많았다.


안창호는 인성학교 교장 부임을 계기로 정부 산하에 중등과정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대성학교의 모델을 중국 땅에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재정지원기구인 인성학교유지회 회합을 하루 앞두고 흥사단 사무소에서 차리석과 선우혁, 장덕로를 만났다.

“교장 형님,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셨군요!”

선우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농담처럼 인사했다. 모두 따라서 일어났다.

“내가 아무리 바쁘다고는 하지만, 동지들의 지혜를 얻는데 시간이 아깝겠소?” 안창호는 다들 그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좌장이 오셨는데 일어나야지요. 근데 형님께서는 무슨 지혜가 필요하신가요?” 차리석이 앉으면서 말했다.

안창호도 의자에 앉았다. “흥사단 동지들에게 묻고 싶었소. 우리가 내일 인성학교 후원방침에 대해 의논할 텐데, 내친걸음에 중등교육 기관 설립에 대해서도 의논하고 싶소.”

“중등교육 기관이라면 대성학교 같은 교육기관 말씀인가요?” 선우혁이 짐작이 간다는 듯 말했다.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가 지금은 잠시 인성학교 일을 보고 있지만, 동지들과 나는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소? 인성학교는 정부와 교민단에서 잘 끌고 나갈 것이지만, 흥사단은 중등교육 기관이 필요하지 않겠소?”

선우혁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인성학교도 흥사단 지원 몫이 있겠지만, 중등교육 기관 설립에 관해 의논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과 같은 교육기관이 필요합니다. 국내에는 조선총독부가 대학설립이나 대학교육을 규제하고 있으니 국내 인재들은 유학이 아니면 상급교육의 기회가 막혀있는 셈이지요.”

듣고 있던 장덕로 목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국내에서도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설립 운동을 추진하고 있나 봅니다. 이승훈, 조만식, 송진우, 김성수 같은 분들이 기독교 회관을 빌려 모임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안창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교육혁명을 이룰 것입니다. 나도 중국 대도시에 장차 우리 민족 대학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그에 앞서 우선 해외 유학을 희망하는 청년들의 가교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것입니다.”

차리석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것도 역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 계획에 있어야 하는데.... 미주 흥사단의 도움을 받는다면, 흥사단의 역량이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소. 나는 미주 동지들을 믿고 있소. 그들은 자금을 마련해 줄 것이오. 내 조만간 미주를 다녀오려고 하는데 비자를 거부당했습니다.” 안창호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차리석이 안창호를 위로했다. “형님,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도 있는 법입니다. 정 안된다면 중국 이름을 빌려 여행권을 신청해 보시지요.”

안창호가 다시 표정을 바꿔 선우혁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학원을 설립한다면 어느 도시가 좋겠소? 나는 금릉대학이 있는 남경을 생각해 봤다오. 금릉대학은 왠지 정감이 많이 가오. 혁 동지도 다녔고, 동생 훈이도 다니고 있고. 몽양도, 약산도 모두 금릉대학 출신들이 아니오?”

선우혁이 으쓱하며 말했다. “남경 좋지요. 우선 상해와 가깝고. 북경, 서안, 낙양과 나란히 한족의 역사를 이끌어 온 중심도시로 꼽히지요. 산업이 발달해서 일자리가 많고 먹거리가 풍성해서 굶는 일은 없답니다. 10년 전 손문이 이끈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곳이기도 하고요. 한국과 중국의 청년들이 교류하기 좋은 도시입니다.”

차리석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도산 형님께서는 금릉대학 입학을 돕기 위한 예비과로 중등과정의 학원을 설치하자는 말씀이지요?”

안창호도 웃으면서 말했다. “중등과정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되, 방학을 이용해서 대학 예비과를 위한 강습소도 운영하고 구미로 유학을 희망하는 청년들에게 어학강습소도 운영하고. 이 모든 게 필요한 교육 아니오?”

차리석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형님, 포부가 너무 크신 것 아닌가요? 아직 이렇다 할 중등 교육기관도 없는데....”

장덕로가 거들었다. “형님들,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학원설립 이후에 장차 대학을 설립하지 말란 법도 없겠지요. 다만 도산 말씀대로 기초를 공고히 다져놓아야 하니 적합한 학교 땅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창호가 장덕로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소. 나는 공과대학도 설립하고 싶고, 군사학교도 설립하고 싶소. 대학설립은 내 꿈이오! 참, 학원 이름은 뭐라고 하면 좋겠소?”

“이름 짓기는 도산 형님께 위임합시다. 전문가시니. 하하!”

차리석이 소리 내어 웃었다. ‘도산과 토론하다 보면 언제나 힘이 난다. 불가능한 일은 없을 터!’

안창호가 말했다. “좋소. 우리는 지금 맨땅에 꿈을 심으려 하고 있소. 장 목사 말처럼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싶소. 우리는 할 수 있소! 나는 조만간 미국을 방문하고 돈을 모아 보겠소. 혁 동지는 학원설립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해 주시오. 장 목사는 남경에 땅을 매입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시고. 차 동지는 모든 업무를 총괄해 주세요. 나는 돈을 만들고 가르칠 교사 동지들을 찾아 나서겠소. 참, 학원 이름은 내 마음대로 정해도 된다고 하셨지요?”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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