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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6/10

6화. 이광수의 깜짝 방문

by 은명

6화. 이광수의 깜짝 방문


1922년 새해가 밝았다. 안창호의 나이는 44세.

1월 초 이른 아침, 안창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명상을 끝내고 찻물 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았다. 이날 따라 밖에서 까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안창호는 테라스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마셨다. 아직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작년 이맘 때 쯤엔 이광수와 아침마다 체력단련을 위한 정좌법에 들어갔다.


작년 정월부터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이동휘 총리 사퇴와 새 총리 인선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그 사태 수습 때문에 안창호의 마음은 복잡해져 있었다. 그러던 와중 2월 18일에는 이광수가 허영숙(1897~1975)을 데리고 안창호를 방문해 귀국을 선언했다. 허영숙은 서울태생이며 부유층 상인의 딸로, 진명여고와 한성여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나온 재원이었다. 두 사람은 1917년 동경에서 이광수가 결핵으로 병원 진료를 받으러 다닐 때 만났다. 허영숙은 1920년 서대문에 산부인과 병원인 영혜의원을 개원했다. 그런 그녀가 상해에서 『독립신문』 주필을 맡고 있던 이광수에게 귀국을 설득한 것이었다. 안창호는 이광수의 귀국을 말렸다. 그러나 허영숙을 먼저 보낸 뒤 고뇌하던 이광수는 결국 3월 말, 압록강을 건너려다 심양에서 체포되었다. 다행히 이광수는 『매일신보』 사장 아베 요시이에의 소개장을 가지고 있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매일신보』는 본래 신민회 기관지였던 『대한매일신보』를 조선총독부가 매수하여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되었다. 이광수는 1917년에 『매일신보』에 「무정」에 이어 「개척자」라는 장편 소설을 연재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이광수가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일을 놓고 그를 비난하는 소리가 상해는 물론, 국내외에서 들끓었다. 안창호는 이광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여운형 동경초청 방문 때도 그랬다. 아무 일 없었다. 동지를 믿고 속아야 한다.’


까치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잘 있겠지. 결혼식도 올렸을 테고, 건강도 많이 좋아졌으리라. 몸 관리, 체력 복귀는 역시 부인의 힘이 절대적일 것이다.’ 안창호는 문득 혜련이 그리웠다. ‘내 사랑, 혜련...!’

이광수는 상해를 떠나기 직전 바로 이 시간에 인사를 하러 왔었다.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었다. 여운형 때와는 달리 가지 말라고 말리긴 했으나 이광수는 결국 국경을 넘기로 작정했다.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었다. 조국의 상황이 그랬다. 이광수는 일본이 눈독 들이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운형도 그랬다. 놈들의 전향 전술은 치밀하고 무섭다. 안창호는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를 통해 그것을 경험한 바 있기에 평생 긴장을 놓지 않았다.

작년 5월, 박현환과 김공집이 비행사가 되기 위해 중국 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비행사 기술교육 진학이 좌절되자 김공집은 러시아 비행학교로 갔고, 박현환은 고향으로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안창호는 마침 이광수의 제자인 박현환을 뒤따라 귀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동경으로 파견하여 청년 김도연,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등을 입단시키고 돌아온 김항주를 이번에는 국내 이광수 옆으로 파견했다. 미주에서 불러온 김항주와 박선제는 상해 원동위원부 조직을 발족시킨 흥사단 핵심 인재들이었다. 안창호는 이들이 있어서 임시정부 일에 주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미주 흥사단에서 실무를 보던 김태진이 귀국을 희망한다고 해서 비슷한 시기에 이광수 옆으로 보냈다. 이들은 이광수를 중심으로 ‘흥사단주의’를 실천할 것이다. 동맹수련, 정의돈수. 그러나 서울에 흥사단을 조직한다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안창호가 찻잎을 담은 찻잔에 끓는 물을 부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까치가 모시고 온 손님이로군. 누구일까?’ 안창호가 현관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이광수가 중절모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웅크린 자세로 서 있었다. 안경을 써서 못 알아볼 뻔했다. ‘위장술일까?’ 안창호는 반가웠다.

“아니, 그냥 들어오시지 그랬소? 밖이 추운데. 어서 들어오오!”

이광수는 그 자리에서 모자를 벗으며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세배하러 왔습니다.”

안창호는 이광수의 언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니, 기별도 없이 이렇게 와도 되오? 내 그렇지 않아도 자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오.”

이광수는 말없이 웃음 지었다. 그의 검은색 뿔테 안경에 김이 서렸다. 그는 안경을 벗었다.

안창호는 이광수를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고 찻잔 하나를 더 가져와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추운데 이것 좀 마시고. 그래, 어떻게 지냈소? 아니, 어떻게 온 것이오? 건강은 좀 좋아졌소? 동지들은 만났소?” 안창호는 질문을 쏟아냈다.

이광수는 두 손으로 따뜻한 찻잔을 감쌌다. 언 손이 금세 녹는 듯했다. “선생님, 박현환에게 당부 말씀 귀담아 잘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은 김종덕(항주) 형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동맹수련하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기뻤다. 박현환과 김종덕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이들의 소식을 듣게 되어 안심이 되었다. “흥사단주의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지. 동맹수련, 정의돈수. 문답 때 주고받았던 말, 기억하오? 흥사단주의는 진리라고 그대가 답했었소. 하하.”

이광수는 안창호의 환대에 긴장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선생님, 그래서 저희는 서울에 흥사단을 조직하고 싶습니다. 그 일을 의논드리고자 왔습니다.”

안창호가 진지하게 이 말을 받았다. “음, 국내 살이에서 흥사단 단우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오.”

이광수는 안경을 추스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년 내내 졸작에 몰두했습니다. 민족개조에 관해서 썼습니다. 선생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받은 영향이 귀에 쟁쟁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가져오진 못했습니다.”

이광수와 허영숙은 1921년 5월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11월에 논문 형태의 「민족개조론」을 집필해 놓고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안창호는 신중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음, ‘민족개조’라.... 우리가 문답 과정 때 민족 전도 대업을 토론하면서 우리 민족의 근대성 결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우리가 우수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문명 개혁에 대해 무지했고 봉건적 유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고하를 막론하고 무실역행이 부족했다. 그러니 흥사단주의를 일으켜야 한다. 흥사단주의에서 자아개조는 근대성으로 깨어나는 것이며 주인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 혁명은 특히 정의돈수하면서 동맹으로 해야 한다. 자아 혁신과 동맹수련은 흥사단주의의 실천 원리이며 이것은 진리이다.〉”

이광수는 문답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상해 동료들이 방청했었지.’ “그렇습니다. 저는 흥사단주의가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고 이를 따르려고 합니다. ‘구불도자 궁겁부진’의 자세로요.”

안창호도 입단문답 때처럼 유쾌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기 마련이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옵니다. 하하.”

이광수가 말했다. “비밀결사로 가야 할지, 아니면 단체 등록을 하고 공개적인 수양단체로 위장하고 가야 할지 고민입니다.”

안창호는 문답 과정에서 이광수가 정치불신에 대해 강경한 어조로 대답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안창호는 물었었다. “언제 우리에게 다시 나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이광수는 이 물음에 “우리에게 독립 국민이 될 실력(힘)이 생긴 때에야 우리에게 독립한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었다.


이광수는 3.1운동이 민족의식을 각성시켰고 세계에 독립의사를 천명했지만, 임시정부를 둘러싼 내분을 겪으면서 인격의 기초가 안 된 정치가들로 인해 좋은 기회가 소용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광수는 임시정부의 정치가들을 불신했다.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산업의 기초인 교육력이 없는 것은 정치가들이 정치를 안 하고 사리사욕과 눈치 보기에 바빠서 그리됐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지역과 계급 감정을 앞세운 파쟁은 실력이 없어서 나타난 쏠림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제 흥사단주의가 있다. 흥사단은 큰 단결을 이룰 수 있는 옳은 주의의 단체이다.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단체가 아니다. 흥사단은 내가 수양하고 남도 수양하게 하는 단체이다. 흥사단주의는 인격혁명으로 정치가도 되고 교육가, 실업가도 되어 건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는 기초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이광수는 국민 개개인이 저마다 제 직업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서 안심하고 살아가게끔 해주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자 좋은 정치라고 했다. 장시간에 걸친 문답 과정을 통해서 안창호와 이광수는 결론을 냈었다. “흥사단은 정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치보다는 수양이 먼저다. 수양의 핵심은 사랑 공부이다.”


잠시 침묵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안창호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3.1운동 이후 반일 국민운동의 현 단계는 민의 혁명이오.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온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다.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낙심하지 말고 건전한 인격자가 되어라.’ 청년학우회 때는 근대국가의 이념을 자유주의에 기초한 공화국에 두었소. 그래서 민권의 각성, 신민新民 훈련이 필요했었소. 지금은 구국 독립운동 민족혁명의 시대. 인격혁명과 신성단결 훈련도 반드시 해야 할 기초 운동이오. 다만 흥사단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조국독립이오. 민족전도대업의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오.”

이광수가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단체명칭을 수양동맹회로 정할까 합니다.”

“음, 청년학우회라고 할 수도 없고, 흥사단 명칭을 내세울 수도 없으니.... 수양동맹회라.... 수양은 자아혁신, 인격혁명을 뜻하고, 동맹은 신성단결, 동맹수련을 뜻하고. 수양동맹은 흥사단 철학이 잘 녹아있는 것 같소.”

안창호는 ‘수양동맹회’라는 명칭을 몇 번이고 반복해 보았다. ‘괜찮다. 현 단계 국내 흥사단운동으로는 무난한 명칭이다. 미주와 상해에서 사용하고 있는 흥사단이라는 명칭을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이 낫다.’

이광수는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말했다.

“돌아가 당국에 신고할 때 비정치 단체임을 내세우겠습니다. 단우 모집 때 문답을 하고 집회 때는 흥사단창립 정신에 입각하도록 이끌어 가겠습니다. 조직도 상해 위원부를 참조해서 반 모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겠습니다. 선생님께 업무보고를 자주 하겠습니다.”

안창호는 당부했다. “매사 신중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오. 동지들과 의논하면서. 독단은 금물이요. 그러나 공론은 언제나 중요하오. 흥사단주의에서 가장 핵심은 동맹수련과 정의돈수! 공론형성과 복종이오.”

이광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을 버리고 남의 주장도 인정하는 것, 내게 옳음이 있으면 남에게도 옳음이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노력을 많이 하겠습니다.”

이에 화답하듯 안창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귀국이 상해 동지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오. 일본은 그대를 주목할 테지. 언제든 빈틈을 노려 전향을 설득해 올 수 있소.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내가 놈들을 알기에 걱정이 많다오. 돌아가거든 수양동맹회를 잘 끌고 가길 바라오. 시간을 가져 봅시다.”

이광수가 고개를 숙였다. “제 이탈 행동에 대한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이광수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22년 2월 12일, 서대문 그의 집에서 미주와 원동 흥사단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 밤샘 토론 끝에 수양동맹회를 창립했다. 창립회원 명단은 박현환, 김항주, 김태진, 이항진, 김윤경, 곽용주, 김기전, 원달호, 강창기, 홍사용 등이다. 그리고 1924년 12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친 정인과가 귀국하여 수양동맹회에 합류했다. 이들은 도산 사상을 앞세워 민족주의, 준비론, 점진론, 개조론, 인격 수양 등을 운동 이념으로 표방하기로 했다. 안창호는 이광수가 비정치 활동과 수양을 내세운 것을, 일본의 엄혹한 국내 지배 현실에 대응한 나름의 조직 생존전략으로 이해했다.


이광수는 잡지 『개벽』 1922년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고 수양동맹회는 비정치 단체임을 선언했다. 잡지 『개벽』은 천도교에서 1920년 6월 25일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발간한 종합월간지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발표되자마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가져왔다. 이광수는 인격개조를 강조하려다가 오류를 범했다. ‘민족의 도덕적 타락을 민족 쇠퇴의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도덕과 수양에 기반한 문화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공분을 일으켰다. 일본이 동양평화를 깨고 무력 침략을 감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근대화의 내적 동력을 상실했다고 먼저 짚었어야 했다.

근대적인 문명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자각이 요구된다. 따라서 혁명은 국민이 역사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로서 참여하도록 훈련하는 사업이다. 그것이 바로 국민개조 운동인 것이다. 안창호는 이러한 운동을 흥사단운동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당시 이광수는 신문학을 선도하는 소설가로, 동경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이자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인물로, 또 『독립신문』을 발행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도산 안창호가 총애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민족개조론」은 누구나 도산 안창호의 경륜이 반영된 것으로 읽히고 알려졌다.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안창호는 난감했다.

안창호는 「민족개조론」을 보고 자탄했다. ‘내 탓이다. 민족 개조 문제에 관해 더 철저하게 검증하는 토론과정이 필요했다.’ 이광수는 계파 정치가들을 혐오했다. 그는 임시정부 분열을 보고 새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그러나 안창호는 일본의 자치론을 경계하면서 국민의 근대적 개조와 더불어 계파 갈등을 넘어선 임시정부의 정치 개조 역시 중요한 당면 과제로 여겼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지배자의 논리에 명분을 안겨준 꼴이 되고 말았다. 고민에 빠진 안창호는 원동위원부 단우들과 의논했다.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고심 끝에 결론을 내고, 1922년 7월 11일 원동발 제6호 ‘단우처벌에 관한 의견서’를 미주 본부로 보냈다. 결국 이광수는 무기 정권 조치되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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