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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7/10

7화. 국민대표회의 만주 유세

by 은명

7화. 국민대표회의 만주 유세


1922년 1월 하순,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광복군총영 참모장 이탁과 함께 환인현 하구로 나섰다. 이탁의 전언에 의하면 양기탁 선배가 안창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겨울 만주는 설국이었다. 산이며 들이며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인해 서간도 주력 부대는 밀산으로 이동하여 통합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1921년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주도권 다툼 속에서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흩어지고 총재 서일은 자살했다.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각자 흩어져서 서로군정서, 광복군총영, 광한단, 광정단, 한교공회, 의성단 등을 결성했고, 장백현 중심으로는 대한독립군비단, 광복단, 흥업단, 재진단, 태극단 등 독립군단체들에 흡수되었다. 이 단체들은 다시 1921년 10월, 임시정부 산하 대한국민단으로 재편성되었다. 대한국민단은 1924년 한족회와 통합하여 정의부로 탄생하게 된다. 참변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되돌아와서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참변에서 중립을 지켰던 홍범도는 지청천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홍범도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혁명 활동에서 배제되었다. 지청천은 이르쿠츠크에서 오하묵 등과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소련당국은 지청천의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 삼아 1922년 4월경 그를 체포했지만, 다행히 그해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서로군정서에 합류했다. 홍범도는 시베리아 이만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1922년 6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파 이동휘, 이르쿠츠크파 문창범과 함께 연합 조직인 고려중앙정청을 조직하고 9월부터 치타에서 한인사회 자치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김좌진 부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회군하여 북로군정서를 유지했다. 김좌진 부대는 1925년에 신민부로 통합되었다. 신민부는 민족주의와 대종교적 공화주의 표방으로 군사 김좌진, 외교 조성환이 활동하다가 20년대 후반에 가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나뉜다. 군정파는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의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으로, 민정파는 국민부에 참여하여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으로 갈라진다. 민족주의 독립군 대부분 공산주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모두에 등을 돌렸다.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1923년에 북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투쟁 결사대 이동휘의 적기단이 사회주의 성향이라는 이유로 대립했다.


이탁은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 직후 결성된 남만주 중심의 17개 단체 71명의 대표를 소집해 놓고 있었다. 대한국민군단,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독립청년단, 보합단, 광한단, 광복군사령부와 광복군총영, 한족회, 한교민단, 부민단, 대한정의군영, 평북판독부 등이었다. 이 단체들은 간도 학살 이후 일본군과 부분 전을 벌이면서 만주지역을 어느 정도 수복했으나 통일 단체를 결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양기탁이 통일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군사 통일 문제를 제안했다. 양기탁은 안창호의 독립전쟁 준비론을 지지해 준 든든한 대선배였다. 신민회 결사는 양기탁이 선봉에서 총책임을 져왔다. 양기탁은 신민회 총감독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1917년 12월 『한인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동지인 이동녕, 이동휘와 해후했다. 이들과 한인사회당 창당에 관여하였으나 양기탁은 신념의 차이로 이동녕과 함께 서간도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서간도에서 이상룡과 김동삼을 만났다. 양기탁은 김동삼이 일으킨 백서농장과 연계하여 독립군 50여 명을 하바로프스크 사관학교로 파견하는 등 신민회에서 결의했던 독립군 기지개척과 사관 양성에 주력하면서 만주 독립군 통합운동의 선봉에 섰다. 양기탁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에 부임한 안창호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임시정부에서 고군분투하는 안창호에게 양기탁은 천군만마와도 같은 든든한 큰형님이었다. 양기탁은 1920년 8월 미의원단 방한 때 이탁을 통해 안창호의 국내 작탄 거사 지령 소식을 듣고 소리 없이 솔선에 나섰다. 이때 양기탁은 남대문정거장에서 독립청원서를 미의원단에 배포하다가 발각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전위원장 안창호는 이탁을 앞세워 양기탁 구명운동에 나섰다. 양기탁은 1922년 1월, 이탁 참모장이 광복군총영에서 파견한 이관린, 장철호의 도움으로 만주 관전현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로 양기탁은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앞장섰다. 양기탁은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 준비를 위해 만주유세에 나선 것을 알고, 이번에는 남만주촉성회 조직에 앞장섰다.

안창호는 양기탁을 보러 나섰다. ‘문제의 해법을 알고 계신 선각자다. 통일이 힘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강조하신 분이다.’

양기탁은 움막에서 안창호를 반겼다. 양기탁은 대한독립단 채상덕(1862~1925), 전덕원(1871~1943) 등과 함께 있었다. 전덕원은 상투에 두루마기 차림을 하고 있었고, 채상덕은 멋진 턱수염을 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안창호를 환대했다. 이탁에 의하면 채상덕과 전덕원은 의병장 출신 독립군이었다. 연배가 가장 높은 채상덕은 최익현의 문하이고 전덕원은 유인석의 문하였다.

양기탁이 안창호를 보자마자 얼싸안았다. “오, 도산! 통합의 지도자가 오셨군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허허.”

안창호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진작부터 뵙고 싶었습니다. 재작년 미의원단 방한 때도 그렇고. 잇따라 선봉에 서서 옥고를 치르느라 몸이 많이 상하셨을 텐데... 괜찮으신 거 맞지요?”

양기탁이 수염을 만지면서 말했다. “내 그동안 도산의 노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임시정부를 간신히 통합했는데, 지도자들이 말썽이라.... 그래도 도산이 임시정부를 나오니까 이런 반가운 시간도 있구려.”

안창호가 계면쩍어하면서 말했다. “통합의 실패는 공론형성의 실패나 다름 아니지요. 각양의 주의 주장들을 인정하면서 독립을 향한 하나의 최고 단체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통절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채상덕 선생이 걸쭉한 소리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국민대표회의 준비를 위한 행보는 어떻소? 그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터인데. 내 문일민과 임병찬한테서 그대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안창호가 공손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공론이 만들어지고 절대복종이 따르면 독립으로 가는 길이 한결 아름다운 일이 될 텐데 말이지요. 세 분 선배님, 통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전덕원이 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한제국 백성이오. 용천에서 사냥으로 먹고살다가 나라가 망해서 의병이 됐지. 나는 무식하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다 나라를 바친다기에 독립군으로 나섰소. 나는 공화주의가 뭔지는 잘 모르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 아니오? 제정신이오?”

이탁은 네 사람의 만남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안창호가 전덕원의 거친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간곡한 어조로 겸손하게 말했다. “오, 선배님, 미국에 나라를 바치다니요!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항일전을 하려면 흩어진 독립군이 통일되어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겠지요. 적은 일본입니다. 간도 동포가 겪었던 경신년 참변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자유시 참변 같은 일도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고요. 동포가 통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지요.”

양기탁은 채상덕을 흘끗 바라보면서 말했다. “같이 노력해 봅시다. 우리가 통일하지 못하면 독립도 불가할 것이오. 여기도 복벽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문제가 있소.”

채상덕은 웃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 임금께 충성하는 것이라 그렇소. 지금은 임금님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이 양반 덕분에 이제야 알았소. 허허.”

양기탁이 같이 웃었다. 안창호도 웃었다.

“네. 임금님 때 나라를 잃었고 지금은 우리 국민이 모두 나라의 임금이지요. 그래서 나라를 되찾아야만 합니다. 임금님이 돼야 하니까...!”


1922년 2월 초 환인현하구. 눈 쌓인 골짜기 움막촌에 독립군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눈 덮인 야산에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채상덕, 지청천, 전덕원, 김동삼, 오동진, 백운기, 현정경, 현익철, 백남준, 최명수, 이웅해, 강제하, 이관린, 김영화 등의 얼굴이 보였다. 안창호는 김동삼에게 이상룡(1958~1932) 선생의 안부부터 물었다. 정정하시다고 했다. 오동진은 안창호가 대성학교 스승님이라며 부하들에게 자랑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이탁이 큰 소리로 대표들에게 안창호를 소개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나 이탁의 대성학교 스승입니다. 대한제국 말 스승님은 우리나라가 독립전쟁 준비를 하지 않으면 일본에 먹힌다고 강조하셨지요. 3,1운동 후 스승님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호령하시다가 지금은 정부를 사임하고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스승님은 임시정부 산하 공식 군대로 대한광복군 총영을 설치한 분입니다. 저기 오동진이 총영장이며 나 이탁이 참모장입니다. 선생님은 간도참변을 누구보다도 아파하며 간도 돕기에 나선 의인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의 처지와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17개 단체가 통일하여 대한통군부로 재편하기 위해 왕림했습니다. 대한통군부는 계속 다른 단체들과 통일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통의부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안창호가 대표들을 향해 연설했다.

“여러분, 자랑스러운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 벌써 4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도 4년째, 우리 민족의 새 역사도 나이가 들며 깊어져 갑니다. 아울러 우리 국민의 지각력도 나날이 발전해 갑니다. 간악한 저 일본을 대적하는 마음도 점점 강해지고 동족을 갈라 서로 혐오하던 우리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점점 바뀌고 있습니다. 갈라지면 멸망하고 뭉치면 승리할 줄을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또 세계정세에 비추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점점 분명해져 질서 있는 투쟁의 길에 들어섰음을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식민지에 매여 있는 우리 민족을 가엾이 여겨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와줄 나라는 결코 없다는 사실도 그간의 정부 외교를 통해서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힘, 우리 스스로 일어나 독립을 앞당기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힘은 공고한 단결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공고한 단결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통일합시다! 통일 단체를 만들어 큰 방침을 세웁시다. 우리의 큰 힘을 중앙으로 집중시켜 큰 진행의 원동력이 되게 합시다. 오늘 여러분의 대한통군부 결성은 그 첫 단추입니다.”


70여명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온 골짜기로 퍼져나갔다.

이날 새로 결성된 대한통군부는 그 자리에서 안창호를 연호하면서 총장으로 뽑았다. 대부분 안창호를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안창호는 채상덕 선배를 총장으로 모시자고 했다. 그러나 그날 분위기는 자리 양보로 겸양지덕을 발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양기탁 선배는 이곳의 복벽주의를 극복하려면 안창호가 일단 책임 있는 자리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안창호는 총장직을 일단 수용했다. ‘다음 단계인 대한통의부 결성 때까지만이다.’

안창호, 양기탁, 김동삼, 이탁은 이날 결성된 대한통군부를 오래지 않아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하여 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가기로 합의했다. 광복군총영은 대한광복군 총사령부로 조직을 개편하고 중앙최고 기관의 역할을 맡기로 했다. 대한통군부는 1922년 8월 30일,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총장은 김동삼이고, 부총장은 채상덕이었다. 대한통의부는 무력투쟁과 자치행정을 겸하는 남만주 군정부였다.


1922년 3월 초, 안창호가 남만주에서 상해로 돌아오자마자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강과 해후했다. 이강이 숙소로 찾아온 것이다. 뜻밖이었다.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서로 얼싸안았다. 안창호가 먼저 반갑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어떻게, 아니 언제 왔소? 아주 온 거요? 잘 오셨소. 여기 앉아 보구려. 정래(이강의 이름)가 맞는지 자세히 봐야겠소.”

이강이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상해 도착은 며칠 되었소. 안식구와 애들도 데리고 왔소. 임시 거처로 월세도 정했소. 마침 현순이 도와줍디다. 예전 이동휘 총리를 모시러 신한촌에 왔을 때 서로 사귀었소. 그도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워싱턴에 있다가 상해로 막 돌아왔다고 했소. 도산은 어디 갔다가 오신 거요?”

안창호가 말했다. “혜빈 씨도 같이 왔다니, 정말 아주 온 것이 맞구려. 나는 남만주를 돌아다니다가 왔소. 독립군부대들을 통합시키고 국민대표회의 참가 준비를 강조하고 돌아왔소. 임시정부를 나오니 내가 할 일이 그 일입디다.”

안창호는 이강을 마주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친구를 이렇게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창호가 계속 말했다. “그나저나 시베리아 동지들 안부가 궁금하오. 정재관은 잘 있소?”

이강이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정재관은 하늘이 불러서 갔소. 그날이 지난달... 그러니까 2월 27일이었소. 병이 났는데 회복하지 못하고 가버린 거요.”

안창호가 깜짝 놀라 맥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식이란 말이오? 어떻게 그런 일이...! 아, 너무나 안타깝소. 서로 얼굴을 보기도 전에 떠나 버리다니....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면 얼굴은 볼 줄 알았는데....”

이강이 말했다. “그 친구는 수청지방에서 김경천, 김규면 등과 일제의 하수인 마적 떼들을 토벌하는 유격대 활동을 지휘했소. 창해청년단이라고, 그 단체의 참모장이었지. 작년에는 대한의용군사회를 조직해서 항일전을 벌였고. 당연히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면 도산을 만났을 거요. 훌륭한 지도자였는데....”

안창호는 이강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연해주와 시베리아는 여전하다. 적군파와 동락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창해청년단을 조직해서 군정과 민정을 지휘했다. 치타공화국 공산당과 협약을 체결하고 거주민의 안정과 식산을 도모했다.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했다. 둔전병도 실시했다.’ 안창호는 공립협회 시절 정재관의 앳된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있다. 정래도 나도 어느덧 마흔넷. 정재관은 두 살이 연하였지.’

이강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오?”

안창호가 이강에게 말했다. “정래, 그대가 상해로 이주했다고 하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듯하오. 여기서 나와 함께 지냅시다. 실은 내가 무척 외로웠다오...! 친구는 역시 옛 친구라는 말이 맞는가 보오. 내가 챙기지 못하고 있는 일들, 같이 할 일들이 많다오.”

이강이 미소를 지었다. “흥사단은 잘 되고 있소? 원동흥사단.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현순이 그럽디다. 도산이 흥사단으로 사람을 모으고 있는 게 악평의 핵심이라고. 허허. 도산이 야심가이면 차라리 좋겠소.”

안창호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흥사단을 공개하는 것이 조금 망설여진 것은 사실이오. 내가 기호파를 빗대어 말하면 안 되겠지만, 저들은 건건이 시비요, 견제요, 시기심에 나를 욕하더이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이동녕과 이시영 영감님에게 따져 물었소. 그랬더니 오해가 풀렸다고 합디다. 역시 토론이 중요하고 대화가 중요하더이다. 그분들은 역시, 양반답다는 생각이 들었소. 훌륭하신 분들이오. 지금 원동흥사단에 모이고 있는 사람들은 일단 서북계가 맞소. 충실한 인재들이지. 사리와 이치에 밝은 사람들이오.”

이강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흥사단에 들어가겠소. 한 날 정해서 입단 문답을 해 주시오.”

안창호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하리다.”

“참, 상해에서 김립이 피살됐다 하오. 그 소식은 알고 있소? 김립은 이동휘 선생 비서 아니었소?” 이강도 안창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안창호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나도 그 소식을 들었소. 정근이 알려줍디다. 이동휘 형님과 고려공산당 상해파들이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정신을 쏟고 있을 때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다가 변을 당했던가 보오. 정말 안타깝소. 왜들 그러는지.... 이동휘 형님이 무척 아끼던 재사 김립. 연해주 망명 때 나를 경계하던 그 친구, 아주 명석하고 사회주의 전략통이라고 했는데. 레닌 지원자금 일부를 사적 용도로 남용했다나?”

“김구, 김구 형님이 시킨 일이라고들 하던데.... 쯧쯧.” 이강도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안창호는 만주에서 대한통군부를 결성하고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안정근을 만났었다. 안정근이 상해에서 일어난 근황을 알려주었다. 안정근은 앞뒤 안 가리고 행동부터 하는 김구의 불같은 기질을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안정근은 이번 일로 김구가 공산계열 청년들의 공분을 많이 샀다고 말했다. 안창호도 이 점이 걱정되었다. ‘화근이 될 것이다.’ 안정근은 동생 공근이 김구와 각별한 사이라는 점이 불안했다.

안창호가 이강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친구에게 고백해 둘 일이 있소. 이동휘의 참모인 한형권이 나한테 그 문제의 레닌자금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주겠다고 했었소.”

이강이 놀란 듯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오, 그래서 어찌 됐소? 그 골치 아픈 돈은?”

안창호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받을 수 없소. 임시정부로 보내시오!’ 그랬지. 혹시 그 돈이 말썽이 된 것인가? 김구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되었던 게요.”

이강이 역시 도산답다고 칭찬했다. “잘하셨소. 역시 도산이오. 출처와 쓰임이 분명하지 않으면 거액도 물리치는 사람이지. 하하.”

안창호가 기억을 환기하듯 말했다.

“아니오. 나도 구국모험단이 폭발 사고를 냈을 때 프랑스 장교 부상치료비와 손해배상금 거액을 마련하느라고 혼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미국에서 난리가 났었소. 그 돈이 북미실업주식회사 돈이 아니냐고 의심하면서 출처를 밝히라는 것이었지. 내 명예가 실추될 뻔했는데, 이재수 형님과 송종익, 임준기가 농장개척 기금을 맡긴 것으로 밝혀져 살아났다오. 아찔했었소.”

이강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일엔 도산의 부정을 캐라는 이승만의 지시가 있었겠지.”

안창호는 짐짓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들어갈 비용도 만만치 않을 거요. 그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데...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일이라, 김구와 임정 총장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문제가 첩첩산중이오.”


안창호와 이강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강은 안창호에게 그림자와 같은 친구였다. 안창호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부터 이강이 자신의 대안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못하면 이강이 대신한다!’ 안창호는 이강을 남중국으로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화남지역은 복건, 광동, 광서, 해남, 운남, 귀주 등 만주지역 2세 청년들이 중국국민당 군사훈련을 받고자 쏠려있는 지역이었다.

안창호는 이강을 흥사단 동지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소개했다. 안정근이 제일 반갑게 맞았고, 손정도와 차리석도 반겼다. 조상섭과 이유필, 선우혁도 이강을 따랐다. 안창호는 흥사단 동지들과 마주할 때가 마음이 제일 편했다. 일이든 돈이든 사람이든, 뭐든 의논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치유였다.


이강은 1922년 10월 28일에 한국노병회 창설에 김구를 이사장으로 앞장세웠다. 자신은 노병 모집, 군자금 모금 등 무엇이든 돕겠다고 했다. 이강은 1924년 조상섭 의정원 의장 때 부의장으로, 1925년에는 의정원 의장으로 선임된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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