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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8/10

8화. 여운형의 모스크바대회 보고와 민족혁명당

by 은명

8화. 여운형의 모스크바대회 보고와 민족혁명당


여운형이 인솔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 한국대표단이 1922년 3월 상해로 돌아왔다. 여운형은 먼저 안창호에게 모스크바 회의 내용과 결의 사항들을 보고했다.

“극동인민대표대회. 본래 취지는 극동 피압박인민대회인데 일본이 참가하는 바람에 극동인민대표대회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중국, 일본, 몽골, 자바, 러시아, 한국까지 6개국 대표 144명이 참가했습니다. 그중 한국대표단은 23개 단체 52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했습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도 같이 참가했는데, 이르쿠츠크파가 더 많았습니다. 저와 김규식이 한국 대표 의장단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코민테른 러시아집행위원장이 기조연설을 통해 워싱턴 회의의 기만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또 다른 사파로프라는 사람이 ‘민족,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공산주의자의 위치 및 민족혁명당과 공산주의자의 협동’이라는 연설을 통해 한국의 혁명단계를 논했습니다. 한국은 아직 계급 운동의 단계가 아니라면서 민족혁명을 위한 임시정부 개혁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이에 따라 한국 문제 결의안이 작성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이번 상해 국민대표회의를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시베리아 열차로 돌아오는 길에 김규식 형님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지청천을 만나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고 했습니다. 민족운동 노선의 앞날을 위한 역할 분담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운형의 보고를 듣던 안창호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말을 되새겼다. 약속된 모스크바의 지원금에서 나머지 140만 루블의 금화는 고려공산당 분규로 인해 집행정지되었다. 결국, 우리 민족 스스로가 기초를 쌓아 우리 힘으로 직접 민족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창호가 여운형에게 물었다.

“몽양, 코민테른 지도자가 한국의 혁명단계는 계급운동의 단계가 아니라고 지적했던 말, 그 말이 자꾸 귓전에 맴돌고 있소. 그대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오?”

여운형이 답했다. “모스크바에 가보니 거기는 확연하게 생산자의 주류가 산업 노동자였습니다. 자본가층이 혁명 과정에서 다수파 볼셰비키당에 권력의 자리를 내준 셈이죠. 이들에겐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곧 근대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유럽다수국처럼 생산자 계급이 참정권 확대 투쟁으로 스스로 시민계급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죠. 그러기에는 러시아의 경우 자본가층이 약했다고 볼 수 있고요. 러시아는 산업 후진국이었으니까요.”

안창호가 다시 물었다. “음, 중국은 어떻소? 작년 7월에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는데 현 단계는 내부 모순과의 투쟁인 듯하오. 민족혁명 단계지. 우리는 어떤 것 같소?”

여운형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도 완전독립을 이루려면 국민의 의식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가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지요. 도산 각하께서 하고 계신 일이 맞습니다.”

안창호는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나라의 최우선 과제는 민족해방이오. 하지만 혁명 주체가 미약하오. 일본은 한국의 혁명 주체 세력이 커지기 전에 우리 국민을 황국신민으로 길들이려 하고 있소. 혁명의 주체는 국민이어야 하오.”

안창호는 ‘한국의 현 단계 독립운동은 민족혁명단계’라고 단정했다. 민권 자각의 단계에서 이제는 민족혁명의 주체로 나아가야 한다. 민족공동체. 민족개조는 곧 민족혁명으로 가는 길이다. 흥사단의 현 단계도 수양을 넘어 실천단계로 가야 할 때다. 건전인격과 신성단결 그리고 전도 대업을 향한 실천. 안창호는 이광수를 생각했다. ‘수양동맹회는 잘 되어 가고 있을 테지.’

여운형이 안창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했다.

“상해는 현재 열강들의 자본 투자가 한창이고 노동자계급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근대화 과정이라는 게 그렇듯이 열악한 노동조건이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지요. 그들이 종국에는 떨치고 일어나 중국혁명의 동력이 될 것입니다. 한중호조사 동지들 말로는 열강 자본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문제가 노동자 농민계급의 연합 투쟁이랍니다.”

“계급의식이 혁명을 일으킨다.” 안창호는 이 말을 되새겼다.

여운형이 말했다. “한국이 갈 길은 너무도 멀게 느껴집니다. 제가 선생님께 미쳐 소개해 드리지 못했는데 이번 극동대회에서 박헌영이라는 친구를 주목했습니다. 1921년에 상해로 망명해서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했습니다. 지도력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고려공산당청년동맹을 조직해서 책임 비서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왔지요. 그 친구는 국내로 갔습니다.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동휘 선생이 후원한다고 합니다.”

“음, 박헌영이라.... 몽양이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군요.” 안창호는 결국 2세대 인물들이 미래 한국의 십자가를 짊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여운형이 문득 만주의 둔전병 이야기를 꺼냈다. “1910년대 만주의 둔전제가 민족의식의 각성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면, 상해에는 독립혁명의 주체로 국민 노병제를 도입하는 것은 어떨까요?”

안창호가 말했다. “옳거니, 나도 그 생각을 했다오. 국민개병주의. 농촌 둔전병과 같은 도시 노병제. 직업훈련과 군사훈련을 병행해서 실시하는 기관 설치. 그런데 이 일의 적임자는 김구요. 어떻게 생각하오?”

여운형이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조직의 명장 도산 각하께서 지도자가 되셔야 납득도 설득도 가능할 텐데....”

“무슨 염려인지는 알겠소. 그러나 내가 워낙 야심가라는 혹평을 받고 있지 않소? 그래서 마땅히 돼야 할 일인데 안된다면, 그것도 난처한 일이오. 그러나 염려 마오. 손정도 목사가 있고, 이유필도 있고, 조상섭도 있고, 또 몽양에게는 조동호가 있고. 우리 주변에 인물이 많소.” 안창호는 동지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여운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동호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나에게는 조동호가 있다.’

유정 조동호(1892~1954)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14년 여운형과 함께 남경으로 망명하여 금릉대학 중문과를 졸업했다. 조동호는 여운형을 따랐다. 동제사 활동, 신한청년당, 임시정부 초대 29인 의정원의원, 사료편찬위원회, 『독립신문』 기자, 한중호조사, 한국노병회 등 모든 활동에서 여운형과 함께했다. 조동호는 1923년 말 귀국해서 동아일보사에 입사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어 당강과 규약을 기초했다. 또한, 조선공산당 승인을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으며 상해지부에서 활동했다. 1928년 2월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송환,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 감옥생활을 했다. 1933년 만기 출옥하여 여운형과 『조선중앙일보』에서 같이 일하고, 1944년 여운형의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에서 내무부 활동을 하게 된다. 여운형과 조동호는 평생 동지였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이념적 방향을 민족통일전선구축으로 하고, 국내외를 망라한 한인 단체 대표들을 소집하는 국민대표회의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워싱턴회담에 대한 실망과 모스크바대회 결과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현안 과제로 떠오르게 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국민대표회의가 잘 성사되면 곧바로 민족혁명당을 구성하여 이당치국으로 위기의 임시정부를 개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다시 창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았다. 결국, 임시정부 개조론은 북경과 노령지역에서 들고나온 임시정부 창조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1922년 4월 14일, 홍진이 이끌던 임시의정원은 국민대표회의 소집 청원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3대 의정원 의장 홍진은 의장직을 김인전에게 물려주고 의정원을 나와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에 동참했다. 이에 따라 1년 전 5월 29일에 발족한 상해 국민대표회의 발기회는 1922년 5월 10일 전체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소집을 선언하고 각 단체에 회의 소집 통고문을 발송했다. 준비위원회에는 위원장 남형우, 김철, 원세훈, 나용균, 서병호가 실무로 선임되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1922년 5월 23일부터 한 달간 북경, 천진 등으로 순회에 나섰다. 북경과 천진에서는 박일병, 주현칙, 김위택 등 교민단체를 지도하던 인사들이 안창호의 유세가 끝나자 흥사단 입단을 원했다. 흥사단 원동위원부 소속으로 천진지부가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특히 주현칙(1894~1942)은 김필순과 세브란스의학원 동기생으로 신민회에 가입했고 105인 사건을 겪었다. 1921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와 재회하고, 연통제 평북 참사, 재무부 참사 등 임정 활동을 비롯해 대한적십자사 상의원을 맡고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하는 등 안창호를 지원하는 활동을 해 왔다. 북경에서도 입단을 원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단우 수가 20명에 가까웠다. 안창호는 인접한 두 지역을 묶어 원동위원부 산하 천진북경지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안창호의 민족유일당운동을 지지했다. 동시에 국민대표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열망하고 나섰다. 안창호는 이들에게 독립운동 근거지 확보를 역설하고 이 지역 탐사를 주문하기도 했다.


상해에서는 6월 6일 안창호가 부재중인 가운데 국민대표회의 기성회 제1차 총회가 열렸고, 안창호가 임시의장에 선출되었다. 안창호는 6월 24일 일단 상해로 돌아왔다. 7월 4일 미주에서 국민대표회의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가지고 상해로 파견되어 온 천세헌 단우를 접견했다. 천세헌(1879~1945)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미주에서 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하고 서재필과 활동을 같이 해 왔다. 천세헌도 안창호의 유세 길에 합류했다. 안창호는 직예, 산동, 안휘, 강소 지방을 순회하면서 미주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북미뿐만 아니라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후원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정부의 활동과 전체 독립운동 방향 전환’ 의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한 가운데 한형권이 안창호에게 주겠다고 했던, 문제의 레닌 지원자금 20만 루블 사용처가 이슈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창조파, 개조파, 고수파 간의 노선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났다. 홍진의 뒤를 이어 임시의정원 제4대 의장이 된 김인전은 내부 갈등을 조율하기 위해 시사책진회를 조직할 것을 공표하고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제5대 임시의정원 의장은 조소앙에게 넘어갔다.

1922년 7월에 구성된 시사책진회는 62명이 참가했다. 손정도, 이유필, 이탁, 차리석, 안정근, 김홍서, 천세헌, 조상섭, 유기준 등 흥사단 계가 많이 참석하였다. 마침 주미대사를 자칭하다가 이승만에게 해임된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 현순도 이에 참가했다. 회장은 안창호, 간사로는 여운형, 신익희, 김용철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시사책진회는 7월 20일 4차 회의에서 임정 옹호파 입장이던 조소앙을 비롯한 임시의정원 의원 5~6명과 이승만 옹호세력이 탈퇴에 가세하여 갈등만 표출되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8월 11일 해산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8월 14일 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개최하고, ‘각파혁명이론비교연구회’를 구성하여 탐구 작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노병제 연구와 한국노병회 창설에 박차를 가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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