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국민대표회의(1923.1.3.~6.6)
1923년 1월 3일 마침내 상해 프랑스 조계 민국로 침례교회에서 국민대표회의 본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 2월에 처음 발의되어 거의 2년에 걸쳐 성사된 회의였다. 회의는 4개월간 계속되었다. 민족단체와 좌파 공산계 등 135개 단체가 참여 의사를 나타냈고, 대표단은 자격 심사 후 124명으로 결정되었다. 각 처에서 일제의 방해 공작이 있었고, 교통 사정 등으로 개회 첫날 62명이 참석했다.
안창호는 미주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명단을 올렸다. 첫날 회의에서 대표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크게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었다. 창조파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북경군사통일회에 소속된 대표들로 우사 김규식, 김만겸, 윤해, 문창범, 원세훈,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이었다. 이들 창조파는 이승만 불신임과 임시정부 해체 그리고 새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개조파는 미주 국민회 의견을 수렴한 안창호를 비롯해 임시정부 초기 인사들, 여운형, 김철, 윤자영 등 신한청년당과 교민단, 고려공산당 상해파, 그리고 김동삼 등 서간도 독립군단체 대표들이 있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인적 개편과 독립운동 세력 강화에 초점을 두었다.
본회 첫날, 대표부 선출에서 윤해는 임시의장격인 안창호를 향해 자격 시비를 걸고 나섰다. 이유는 안창호가 미국 정부에 위임통치를 요청했던 미주대한인국민회 대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해는 1922년 11월 한형권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소비에트 외무부에 보관했던 나머지 20만 루블을 수령하여 상해로 왔다. 이 돈은 1923년 1월부터 개최되는 국민대표회의 진행 과정에서 창조파의 활동경비로 사용되었다. 김립이 비명에 죽고난 뒤, 그와 단짝이던 윤해가 20만 루블을 집행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윤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난상토론 끝에 김동삼을 의장으로, 부의장을 안창호와 윤해로 선출했다. 그러나 회의 장소가 상해였기 때문에 회의의 모든 실무는 결국 안창호가 끌고 갔다.
회의는 경과보고와 정세 토론으로 시작되었다. 대표들 선서와 선언에 이어 군사 ‧ 재정 ‧ 외교의 독립운동 진행방침과 생계 ‧ 교육 ‧ 노동문제, 국호 및 연호, 헌법 ‧ 과거 문제 해결 등 순으로 토의안을 결정했다. 과거 문제는 위임통치건, 자유시 참변, 레닌자금 60만 루블 사용처 등이 의제로 포함되었다.
이동휘 편에서 활동해온 윤자영을 비롯한 19명의 연서로 3월 8일, 임시정부 개조안이 제출되고 3월 12일 전체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개조안은 “첫째, 본 회의는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운동과 통일전선을 형성한다. 둘째, 본 회의는 항일 혈전에 중점을 두고 이를 조직적으로 추진한다. 셋째, 본 회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헌법, 제도, 정책 및 기타 일체를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틀 후 창조파는 신조직 제의안을 제출했다. “향후 우리의 독립운동은 전 민족의 유일한 철혈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과거 5년 동안 조직된 각 기관과 단체는 모두 폐지하고, 본회에서 결정되는 적합한 헌법에 따라 통일된 깃발 아래 임시정부를 새롭게 조직하자.”라는 내용이었다.
본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의 안을 토론했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국민대표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임시정부는 이동녕과 김구가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현 정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시정부를 개혁해 나가자는 입장이었고, 이른바 임정 고수파로 분류되었다. 한편,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 25일 의원 11명의 연서로 이승만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국민대표회의는 무효라면서 분노를 폭발했다. 이에 이승만 옹호 세력은 고수파와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승만 탄핵안은 1년 후인 1924년 4월 말, 이동녕 국무총리 때 다시 거론되어 이승만 탄핵안이 본격적으로 재추진된다.
6월이 되도록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은 좀 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창조파는 비밀회의를 따로 열고 6월 3일 조선공화국을 선포했다. 조선공화국은 1921년 11월 상해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북경군사통일회가 노령국민의회와 의견 일치로 수립한 임시 군정부였다. 대통령 이상룡, 국무총리 신숙, 내무총장 김대지 등을 선출하고, 공식 발족을 미루다가 국민대표회의 막바지 과정에서 새 국호와 연호를 선포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후폭풍이 불었다. 개조파 위원 57명은 즉각 이에 반대성명을 냈다. 실망한 서간도 단체들은 김동삼과 대표들을 소환했다. 임정 이승만계는 국민대표회의 무효를 선언하고 탈퇴하였다. 임정 고수파는 국호와 연호를 새로 정한 창조파의 행위를 반역으로 규정했다. 내무총장 김구는 1923년 6월 6일, 63차 회의에서 국무원 포고 제1호를 발포,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안창호, 이동휘, 여운형이 민족유일당의 밑그림으로 그렸던 국민대표회의는 통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이런 와중에, 전라도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김인전이 5월 12일 과로로 운명했다. 충남 서천군 출신 목사 김인전(1876~1923)은 평양신학교를 나와 전주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3.1운동 때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의정원 4대 의장을 지냈다. 김인전의 장례는 임시정부 주관으로 거행되었고 상해 만국공묘에 안치했다.
국민대표회의 결렬은 안창호와 여운형뿐만 아니라 한국노병회와 흥사단 계에도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민족유일당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불멸의 시동을 걸었다. 1923년 7월, 임정계 이동녕, 김구, 노백린, 조완구와 흥사단계 이유필, 조상섭, 송병조 등과 대독립당 결성을 목적으로 한국독립촉진회를 다시 조직한 것이다.
한국노병회와 흥사단도 흔들림 없이 창립 당시의 목적을 위해 꿋꿋이 독립운동의 저변을 이끌어 갔다. 한국노병회는 김구 후임으로 이유필 시대를 맞이하여 조상섭, 손정도 그리고 여기에 이강이 가세하여 적극적인 증모 활동과 재정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흥사단은 차리석, 선우혁, 장덕로 등 남경에 토지를 확보하며 동명학원 설립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국민대표회의를 무산시킨 창조파의 조선공화국은 얼마 가지 못했다. 창조파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새로운 정부 형태로 국민위원회를 조직했다. 국민위원회는 군사, 외교, 재정, 교육, 시설 등 5개 분과를 설치했다. 신숙, 윤덕보, 김응섭이 주도했다. 그러나 1923년 말, 소련과 일본은 어업협정을 빌미로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의 시베리아군 철수를 대가로 한국독립군 추방을 요구했다. 창조파의 새 임시정부는 1924년 2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당했다. 창조파 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우사 김규식도 상해로 강제 추방되었다. 당시 여운형과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 소속이었다. 두 사람은 국민대표회의의 성공을 약속하면서 여운형은 개조파, 김규식은 창조파로 역할을 분담했던 것이다. 국민대표회의 결렬은 김규식에게도 낙망이었다. 김규식은 독립운동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다. 이후 1927년부터 4년간 천진 북양대학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다.
한편, 안창호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김마리아를 7월에 로스앤젤레스로 보냈다. ‘혜련이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마리아의 단짝 차경신도 미국에 비자를 신청했다.
여운형은 국민대표회의 해산 이후 상해 사립학교 동방대학에 영문학 교사로 취직했다가 이듬해 타스통신사 중국지부에 취직했다. 북경 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국공합작에 일조하면서 중국혁명운동에 동참했다. 여운형은 포타포프, 카라한, 보로딘 등 코민테른 원동부 실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을 손문에 소개하여 러시아와 연계하고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연아용공(聯俄容共)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여운형은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당원 대접을 받았으며, 장제스를 만나 한인 청년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에 다리를 놓았다. 또한, 1925년 4월 17일 윤자영(1894~1938), 조봉암(1899~1959), 박헌영(1900~1955) 등 19인이 국내에서 발기한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 원동부의 승인을 받도록 지원 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 낯익은 명단 속에는 여운형의 절친 조동호와 김두봉의 동생 김두전(약수1893~)뿐만 아니라, 김낙준(김찬1894~ 사료편찬위원), 최원택(1895~), 정운해(1893~) 등이 있었다. 또 여운형이 인솔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 지인들도 여러 명 있었다. 이들은 1926년 12월, 2차 당 대회를 열고 조선노농총동맹 조직을 탄생시킨다. 노동자와 농민을 분리하고, 계급혁명의 근간인 노동쟁의(노동총동맹)와 소작쟁의(농민총동맹)를 전술로 삼아 이들을 민족혁명의 추진세력으로 발전시킨다. 이들은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하는 주축이 된다.
(제 7장 마침. 다음 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