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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9/10

9화. 한국노병회 창립과 이유필

by 은명

9화. 한국노병회 창립과 이유필


일본은 워싱턴 군축회담 결과에 따라 북부 사할린을 제외한 시베리아 전 지역에서 철군해야 했다. 예상대로 일본은 볼셰비키 정권에 철군 조건을 내걸었다. 즉, 시베리아 지역 한인 독립군의 무장해제와 영내 추방을 요구한 것이다. 절대로 순순히 물러날 일본이 아니었다. 동북 3성을 장악하여 괴뢰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노출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연해주 무장세력은 대부분 빨치산부대로 일본에 맞섰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 당국은 더는 한국의 보호막이 될 수 없었다.

안창호는 만주 무장세력의 통합을 서둘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위기는 만주 3개 지역 독립군 군정부들의 통일로 맞서야 한다. 국민대표회의를 성립시켜 거기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이와 동시에 만주 군정부에 호응하여 힘을 실어주는 도시 노병회 창립을 서둘러야 했다. 안창호는 여운형과 함께 노병회 발기와 목적에 대해 개요를 토론한 바 있었다. 노병회는 도시 병력 확보와 전쟁비용 조성에 1차 목적이 있다. 또한 만주 독립군 정부를 후원해야 한다. 이에 10년 이내 1만 명 이상의 도시 노병을 양성한다. 일본은 10년 내로 그들이 목적한바 만주에 괴뢰국을 설치할 것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베리아 진출 등을 보면, 일본은 10년을 내다보고 준비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한 경계태세를 갖춰야 한다.


1922년 10월 21일, 상해 마당로 보경리 교민단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김인전, 이유필, 조상섭, 조동호, 여운형 그리고 손정도와 안창호. 이들 대부분 시사책진회 해산 이후 국민대표회의 준비를 위한 ‘각파혁명이론비교연구회’를 구성하여 연구 활동 중이었다.

안창호가 김구와 같이 들어서자, 임시의정원 4대 의장인 김인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영했다. “오셨구려.”

김구가 김인전과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도산 선생이 나와 같이 갈 데가 있다며 여기로 데리고 왔소. 무슨 회의 중이오?”

“우리는 지금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개조파 등 각 주장을 따져보고 있소. 이승만 옹호파들을 이해해 보려고 토론하던 중입니다.”

김구가 멋쩍게 웃었다. “허허, 그래 따져보니 답이 나왔습니까?”

김인전도 웃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답은 없고 주장만 있습니다. 허허.”

손정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참견했다. “각파 주장의 이해득실이 문제가 아니오. 나와 다른 생각을 품되 합리적인 공론을 도출하기 위함인데... 우리는 대부분 내 주장만 옳다 하고 다른 주장은 아예 경청하지도 않고 있어 걱정입니다.”

김구가 안창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산 선생이 3개 임시정부를 비교하고 따져서 통합해 놨지만 실패요. 그래서 이 고생을 다시 하고 있지. 도산 선생, 어떻소? 국민훈련이 답이오? 인격개조? 아니, 뽑힌 정치가들 인격개조는 어떻게 한단 말이오?”

형님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안창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답은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부터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고, 타인이라는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수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손정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산 형님이 구상하고 계신 군사력 통일과 6대 사업에서 제시한 국민개병주의의 실천, 이 논의를 해야 합니다. 몽양은 이에 대한 구상을 갖고 계시지요?”

여운형은 손정도가 자기 이름을 거론하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 구상이라기보다는 도산 선생님의 평소 구상이나 다름없지요. 생각해 둔 바가 있긴 합니다.” 여운형은 선배들 앞에서 늘 겸손했다.

김인전이 말했다. “오, 몽양! 그대가 도산과 함께 각 방면으로 국민대표회의 유세를 다닌다지요? 군사력의 통일을, 그것도 좌우를 모두 아우르느라 애 많이 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오. 어디 구상을 말해 보오.”

여운형이 안창호를 흘끗 보더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 철군을 빌미로 소련당국에 조건을 걸었습니다. 러시아 영내의 한국 독립군 무장해제와 추방령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아마 만주를 침략해서 괴뢰국을 만들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독립군부대는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또 다른 도발에 직면할 것입니다. 대한의 군사력이 그만큼을 버텨내야 하는데... 임시정부가 최고기관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면, 통솔하지 못한다면, 또 어떤 시련이 올지.... 이에 대비한 도시 노병제 대안을 생각한 것입니다.”

김구가 안창호를 향해서 말했다. “아, 아까 그래서 도산 선생이 나에게 국민개병주의 실천으로 한국노병회를 조직해 봄이 어떨지 물었던 거로군요. 나는 무조건 동의하오.”

여운형이 조동호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와 조동호 군은 이 문제를 놓고 앞으로 10년간 1만 명 노병 양성을 생각했습니다. 1만 명 정예부대로 중국군과 힘을 합한다면 일본의 만주침략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잠자코 있던 조상섭이 나섰다. “10년간 1만 명이면, 매년 천여 명을 양성한다는 얘기군요. 노병회라면 군비 자금을 회비 제도로 하고 그것이 국가에 내는 납세요, 10년간 모으면 100만원. 천명이 일 년에 100원씩 회비를 내면 군비도 축적이 되겠습니다. 회원 모집이 중요하겠군요.”

안창호는 탁자 건너편에 앉은 조상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웃음 지었다. ‘역시, 조목사는 재정 조달의 귀재다. 회계 적임자로군.’

이번에는 막내 조동호가 말했다. “몽양 형님과 노병회에 가입할 수 있는 나이, 훈련 교과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나이는 15세 이상 40세 이하로 하고 6개월 이상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1종 이상의 공업기술이나 농업기술 자격을 갖추게 하여 중국 각 방면에 노동자로 취업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안창호는 흐뭇한 얼굴로 여운형과 조동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문득 이광수 생각이 났다. ‘저 앳된 동지는 춘원과 동갑이었지. 성경책에서 한글 자음과 모음을 오려내서 『독립신문』 한글판 식자를 만들어 낸 천재다.’

국민대표회의 준비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교민단장 이유필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까지의 의견을 종합해 한국노병회 창립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교민단이 추진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병회를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군사 서적을 발행하겠습니다. 또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중국군대나 군사학교, 공업학교 등에도 위탁 교육의 길을 마련하고, 철도기술과 조선기술 등을 습득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보겠습니다. 가칭 한국노병회는 조속한 시일 내에 창립식 거행을 추진하겠습니다.”

이 말을 경청하고 있던 안창호는 든든했다. ‘흥사단창립과 독립운동 그리고 인재양성. 정말 잘한 일이다.’


1922년 10월 28일 흥안로 24호 건물, 조상섭의 집에서 한국노병회가 창립되었다. 발기인으로 김구, 여운형, 조상섭, 김인전, 이유필, 손정도, 양기하, 박은식, 한태규, 김홍서, 김현구, 박걸, 이용재, 김두만, 최준, 조동호 등이 이름을 올렸다. 창립기념식에서 조동호가 작성한 취지서를 직접 발표했다. 이어 안창호가 축사했다. 그리고 김구가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유필은 경리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노병회는 국민대표회의에 기대를 걸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성공하면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열기도 다시 크게 고양될 전망이었다.

그런데 1923년 말, 김구는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모두가 기대를 걸고 있던 국민대표회의를 김구가 내무총장령으로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이유필이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유필은 청년회원 영입과 재정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1926년 외곽단체 병인의용대와 연계하여 동북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에 긴급후원금을 전달했다. 또한 1927년 안창호가 연설 도중 길림에서 중국군에 체포되었을 때, 이유필은 노병회의 이름을 걸고 안창호와 40여 명의 일행이 무사히 풀려나도록 원조 활동을 벌였다.


<한국독립에 대하여는 할 일이 오직 전쟁이요, 전쟁하려면 군인과 군비이다. 발기인들이 군인 및 군비를 조성하고 양병 및 자금을 목적으로 하고 본회를 발기하니 대개 힘을 써서 군사를 모으고 자금을 저축하고자 한다.> 이는 조동호가 작성해서 발표한 한국노병회 취지서의 핵심이다.

한국노병회는 안창호와 여운형의 구상과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0년간 유지되었다. 한국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인적, 물적 토대를 확보하려 했던 점은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으로 남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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