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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2 (하)

제2화. 자유시 참변과 이동휘의 고뇌 (하)

by 은명 Mar 07. 2023

제2화. 자유시 참변과 이동휘의 고뇌 (하)


 안정근은 참변 당시 사정에 대해 왕삼덕의 보고를 그대로 전했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총사령관 칼란다리쉬빌리는 다음 날 자유시에 있는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임시고려혁명군 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8일 박일리아에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대한독립군단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임시고려혁명군 군정의회에 계속 반항했다. 그러한 가운데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대한의용군이 소속되어 있는 사할린의용대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까지도 칼란다리쉬빌리에게 투항했다. 칼란다리쉬빌리는 박일리야 부대의 무장해제 단행을 결정했다. 사할린의용대에는 상해파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대한독립군단 부대도 함께 있었다.”

 안정근은 한숨을 몰아쉬면서 계속했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로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박일리아는 끝까지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는 결국 공격명령을 내렸다. 오후 4시,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 대대가 사할린의용대와 대한독립군단을 향해 기관총, 장갑차, 대포 등을 이용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대한독립군단 뒤쪽에는 강이 놓여 있어 피해를 더욱 키웠다. 사상자는 최소 36명에서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970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편입되었다. 칼란다리쉬빌리의 명령을 이행해 자유시로 미리 들어와 있던 서일, 홍범도, 안무, 지청천 등은 민족상잔의 참극 속에서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정근은 보고를 마친 뒤 그제서야 안창호의 표정을 살폈다. 

안창호가 참담하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분열은 죽음이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싸우면 죽는다...!”     


 공산당의 분열을 예감한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사직하고 상해에서 김립 등과 1921년 한인사회당 대표회를 서둘러 개최하고 당명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이동휘는 공산당계 내부 분열을 원치 않았지만,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1921년 5월 20~23일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를 개최했다. 자유시로 가다가 빠져나온 이용과 왕삼덕도 참여했다. 이 대회에서 조선공산당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생산력 증진, 사회정의의 확립을 위한 생산과 분배의 공공성 확립, 무료 국민 교육 실시, 연령별 의무 노동제, 여성해방, 자본가계급의 재산 몰수 등의 방향을 언급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이동휘는 서둘러 모스크바 대장정을 결심했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레닌을 만나 상해파가 수립한 고려공산당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하였다. 이동휘는 1921년 6월 19일 박진순, 홍도(홍진의), 이극로와 함께 상해 항을 떠나서 인도양, 스에즈운하, 지중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독일을 거쳐 10월 말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4개월이 걸렸다. 일본 밀정을 따돌리고 이르쿠츠크파 본부가 있는 지역을 통과하기 곤란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철도 대신 뱃길로 나선 것이다. 이동휘 일행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서야 자유시 참변 소식을 접했다. 이동휘는 충격에 휩싸였다. 주도권 다툼 때문에 동족상잔이라니! 이동휘는 즉각 모스크바로 가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볼세비키 지도자들을 만나 자유시 참변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르쿠츠크 군 감옥에 갇혀있는 상해파 당원과 군 포로 석방을 간청했다. 다행히 박일리아 등 이르쿠츠크 군감옥에 갇혀있던 장교와 병사 80여 명의 석방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이동휘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극동인민대표회의(1922.1.21.~2.2) 참가를 박진순에게 위임하고 이르쿠츠크로 갔다. 12월, 이동휘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볼세비키들, 대한국민의회파와 오하묵 등 이르쿠츠크파 간부들과 만나 파쟁 중단과 연합을 위한 조치에 합의했다. 또한, 상해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구성안에도 합의하고 다시 모스크바 회의장에 뒤늦게 참가했다. 


 한편, 여운형은 1922년 1월 21일부터 약 열흘간 개최되는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 참가 준비를 총괄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1920년 1월 국무회의에서 이동휘 총리 조치로 모스크바 외교원에서 공식 제외된 후 이에 실망하여 이동휘와 결별하고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었다. 여운형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앞두고 좌파진영단체의 모스크바대회 참가를 위해 이르쿠츠크파 대표로서 모든 실무적 준비를 맡게 된 것이었다. 여운형은 마침 구미위원부와 임시정부 학무총장을 모두 물러난 김규식을 설득하여 모스크바대회에 동행, 참석하게 하였다.

 여운형은 1921년 가을부터 상해와 천진 등에서 국내외 참석 대표들의 여권 수속 등 편의를 도왔다. 한국은 23개 단체, 52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대표단을 구성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의장단으로 선출하였다. 대표단으로 박진순, 장건상, 박헌영, 임원균, 김단야, 김시현, 나용균, 권애라 등이 명단을 올렸다. 이동휘도 명단에 올렸다. 이들은 몽골 횡단철도로 장가구를 출발하여 북경, 몽골 울란바토르, 이르쿠츠크에서 시베리아철도로 갈아타고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여운형과 대표단 일행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김규식, 김원경, 김단야와 대회운영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44명의 각국 대표들이 자리한 가운데 여운형은 개회식 연설에서 한국의 피압박 현실을 토로하고 민족과 인민의 해방을 강조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두 차례 레닌을 접견하여 원조를 청했고, 지노비예프, 트로츠키 등 러시아 공산당 지도자들과 만나서 도움을 청했다. 또 일본 공산주의 지도자 가타야마 센과 접촉하고 한일연대와 국제 연대를 논했다.      


 자유시 참변 수습을 끝내고 뒤늦게 도착한 이동휘는 집행위원회 의장단 여운형, 김규식 등과 회합을 열고,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구성안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동휘는 그가 파견한 박진순 일행이 대회 참가에 배제된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사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대표단의 통합을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박진순 일행은 대표단에 의해 따돌림당한 꼴이 되었다. 이동휘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이동휘는 상해 국민대표회의 대표단 구성 등 이르쿠츠크파와 맺은 모든 협의 사항을 백지화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연합은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모스크바 코민테른은 연합에 실패한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모두 해체했다. 그리고 1923년에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고려局)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강제로 통일시켰다. 이동휘는 얼마간 꼬르뷰로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내 사퇴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1923년 2월 초, 북만주 영고탑에서 결성된 적기단 간부들이 신한촌에 머물고 있던 이동휘를 찾아와 지휘를 청했다. 적기단은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삼고 <적화운동결의> 선언문을 통해 불완전한 사회제도 타파와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내세웠다. 이들은 일제 관공서 파괴, 요인 처단, 친일부호 재물 착취 등을 명시했다. 적기단원은 대한국민회 간부인 최웅렬, 한상오 등과 의열단원 오성륜, 김강, 이열, 노은 김규식 등이었다. 이동휘는 이들 후원에 나섰다. 이는 한민족해방을 위해서라면 민족혁명이든 공산혁명이든 가리지 않겠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전선에 이동휘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적기단은 우익 신민부와 대립하다가 1926년에 소멸한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끝내 내부 파벌을 극복하지 못했다. 파벌의 뿌리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였다. 

 이동휘는 말년에 연해주에서 국제혁명가후원회(원동변강모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동휘는 고통받고 있는 혁명가와 가족 후원 활동을 하던 중 심한 독감에 걸려 고생하다가 신한촌 그의 자택에서 1935년 1월 31일 끝내 타계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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