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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2 (상)

2화. 자유시 참변과 이동휘의 고뇌 (상)

by 은명

2화. 자유시 참변과 이동휘의 고뇌 (상)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분주한 안창호에게 안정근이 찾아왔다. 안정근은 왕삼덕의 소식을 전했다. 간도로 파견되었던 왕삼덕은 김좌진 부대에 남아서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있었다. 왕삼덕은 1921년 6월 23일에 터진 자유시 참변 소식을 낱낱이 전해왔다. 자유시 참변은 대한독립군단이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주도권 다툼 속에서 막대한 피해를 본 사건이라고 했다.

안정근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찼다. 자유시 참변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자유시 참변이라니! 아니, 어떻게 이런 참변이 있단 말이오? 일본군도 아닌 우리 진영 내에서 어떻게 이런 몹쓸 일이! 아우님, 자초지종을 말해 보오.” 안창호도 큰 충격을 받았다. ‘수습에 나서려면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안정근은 당혹스러워 하는 안창호를 보고 오히려 차분해 졌다. 안정근은 언제나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있는 인물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아니 간도참변 이후 3천 500명의 병력을 다시 추스른 대한독립군단이 밀산에 집결하여 자유시로 간다고 보고드린 바 있지요?”

“그렇소. 2개 여단,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라고 기억되는데.... 짖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그들이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했소. 계속해 보오.” 안창호가 재촉했다.

“왕삼덕 형님의 보고에 따르면, 1921년으로 들어서자 대한독립군단 지도부가 코민테른에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답니다. 레닌이 약소국 해방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이지요. 서일,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등은 대병력을 이끌고 문창범의 안내로 안전지대 이만(달네레첸스크)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 오하묵을 만났답니다. 오하묵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였지요. 오하묵은 자유시에 이들을 위한 군대주둔지를 마련하겠다고 나섰는데, 이때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다면서 자유시로 가는 것에 반대했답니다. 그들의 눈총을 샀겠지요. 김좌진은 극비리에 부대를 이끌고 이만에서 간도로 회군했고, 나머지 부대는 하바롭스크를 거쳐 자유시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북간도 사정에 밝은 안정근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안창호는 김좌진을 이해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대종교 민족주의 신념을 가진 장군이 아닌가.’ “오, 그랬군요. 서일 장군의 입장이 곤란했겠군. 계속하오. 그래서?”

“소련 측은 대한독립군단 예하에 먼저 도착한 부대에 공산당을 위해 싸워달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이를 거절한 부대는 무장해제를 당했고요.”

“저런, 막무가내 상황에 직면하면 반발도 심했을 터. 이해와 협력을 구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인데.” 안창호는 안타깝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유시에 모인 대한독립군단 부대는 서일, 지청천, 홍범도, 최진동, 안무 그리고 러시아 지역의 무장세력인 이만군(김표돌), 다반군(최니콜라이), 이항군(박일리아), 자유대대(오하묵), 독립단군(박그리골리) 등입니다. 크게 보면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로 나뉘어 있었지요. 공산주의 계열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갈라졌고요.” 안정근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안창호는 고려공산당이 두 파로 나뉘게 된 이동휘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동휘는 105인 사건에서 풀려난 후, 북간도 나자구무관학교 설립과 사관 양성에 몰두하던 중 일경에 쫓겨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권업회 활동을 했다.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 소식을 접하고 신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1917년대 말, 이동휘는 그를 쫓고 있던 밀정의 밀고로 독일 간첩의 누명을 쓰고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다행히 한인 최초 공산당원이고 실력자인 김알렉산드라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유동열, 오하묵, 오성묵, 오영준, 박일리아, 김립, 이인섭, 박애, 전일 등이 모여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볼셰비키 원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토체코프가 지원했다. 한인사회당은 공산주의 단체 중 유일하게 국제공산당 연합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동휘와 유동열 등은 정통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있었다. 그렇게 이동휘는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했고, 1920년 12월 28일 이승만 부임 이후로 임시정부 개혁안을 놓고 대립하다가 1921년 1월 24일 총리직을 사임한 것이었다.


안정근이 계속해서 자유시에서 벌어진 정황을 보고했다.

“아시아 대륙 탈환을 노리던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1918년 4월 시베리아에 간섭군을 파견했지요. 당시는 볼셰비키가 흑룡강성에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반혁명파 체코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했을 무렵이었지요. 일본군의 목적은 한인 무장부대 소탕이고요. 연해주 공산주의파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에 협조했습니다. 일본은 1920년 3월 12일 니콜라옙스크(니항 市) 기습공격으로 수천 명의 적군과 조선인 빨치산 4백여 명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았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습격해서 한인 지도자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른바 최재형 선생이 희생되었던 4월 참변입니다.” 말하던 안정근은 잠시 목이 메었다. 중근 형님과 가족을 돌봐준 최재형 선생의 고마움에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모양이었다.

“최재형 선생의 참변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어떻게 그렇게 희생될 수 있는가 말이오. 정근 아우가 마음의 상처가 깊었겠구려.” 안창호는 최재형 선생의 인자한 얼굴과 이에 놀랐을 이강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울화가 치밀었으나 곧 평정심을 회복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안정근의 보고가 이어졌다.

“독립군과 적군은 북방 하바롭스크로 후퇴했고,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극동 공화국의 자유시로 이동했습니다. 자유시에는 극동 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 대대가 주둔해 있었고요. 이만 군대, 다반 군대 등 공산주의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했습니다. 그러나 연해주에 남아 있던 한인사회당 잔류세력은 일본군에 의해 1920년 4월 7일에도 묻지마식의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들은 일본군을 피해 이르쿠츠크로 본부를 이동하고 조직을 정비했습니다. 이들은 이르쿠츠크파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7월부터 전노한인공산당 창당 준비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로 간 이동휘, 김립, 박진순, 한형권 등이 배제되었습니다. 이르쿠츠크파는 국내 3개 조직을 포함한 남만주 등 32개 단체 연석으로 1921년 5월 4일부터 15일까지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당명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답니다. 고려공산당은 조선의 노동자 및 근로 농민의 당임을 천명하고, 식민지 해방과 소비에트 국가건설을 강령으로 제시했습니다. 오하묵, 오성묵, 이인섭, 임호, 전일, 남만춘, 한규선, 이성, 김철훈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을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라고 합니다.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장 보리스 슈미야츠키가 배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이르쿠츠크파가 동방민족부 산하 고려부에서 한인 사회주의운동을 총괄했지요.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이들 예하의 대표적 무장부대는 자유시에 주둔하고 있는 오하묵의 자유 대대인데 이들은 연해주를 장악하고 있던 반혁명파 콜챠크 부대와 일본의 연합군을 물리친 빨치산 주력부대입니다. 이들은 극동공화국 소속 특립 한인 보병 대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경청하고 있던 안창호가 물었다. “자유시에 모인 대한독립군단 부대는 서일, 지청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의 부대였다고 했지요?”

안정근이 말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군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부대라고 할 수 있는데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공산당은 내부에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갈라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하묵이 간도참변 이후 새로 추스른 대한독립군단을 환영하고 자유시 이동을 도왔다. 그러나 이항 군대 박일리아를 대표로 하는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자유 대대 오하묵이 대표인 이르쿠츠크파는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안창호는 내전으로 치닫게 된 사정을 듣고 혀를 찼다.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땅이고, 오하묵 군대는 극동공화국 소속이다. 서일, 홍범도, 안무, 지청천 등의 대한독립군단은 오하묵의 자유 대대에 편입되었다. 당연히 상해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테지.”

“그렇습니다. 이때 상해파 박일리아 부대가 자유 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습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대한국민의회나 자유 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 화근입니다. 박일리아는 사할린의용대로 구성된 이항 군대를 대한의용군으로 개편하여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밑에 두려고 했었답니다.” 안정근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무력에 의한 주도권 다툼이 비극이다.’

“자연히 갈등과 대립이 심해졌겠군.” 안창호가 말했다.

“1921년 2월 중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즉시 군대 관리에 착수했고, 박일리아는 명령 집행 주도권을 가지고 이미 오하묵 자유 대대로 편입되어 버린 이만 군대와 다반 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답니다. 오하묵 자유 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고 이만 군대와 다반 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하묵 부대는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 강제 편입되었습니다. 자유시로 집결한 대한독립군단 통수권도 상해파 박일리아에게 돌아갔고요.”

안창호는 이동휘 총리의 명령을 받으러 상해에 왔던 이용을 기억했다.

“그때 이동휘는 이용을 통해 박일리아에게 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국민의회를 규탄하라는 밀명을 내렸던가 봅니다. 그리고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라고 하면서....”

안정근이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니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이르쿠츠크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로 가서 한인 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습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고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오하묵과 이르쿠츠크파의 손을 들어준 셈입니다.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 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는 오하묵을 임명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비극! 이동휘 형님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는데....” 안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 (하)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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