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921년 2월, 안갯속 정국
1921년 1월. 이동휘는 대통령 이승만이 주재하는 신년 국무회의에서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대통령제 폐지와 혁명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무위원제로 개편을 주장했다. 이승만과 총장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안창호를 제외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정부 실세가 모두 친 이승만계라고 생각했다. 이동휘 총리는 결국 1월 24일 사직을 선언하고 위해위로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1월 24일 자로 이동휘의 사직 선포문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이승만은 이동녕 내무총장을 임시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했다.
1921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25~26일 연석회의로 열렸다. 노백린, 김규식이 국무회의에 합류했다. 안창호는 국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동휘 총리 후임 문제가 거론되자, 이동녕은 안창호를 총리로 추천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절대 불가’라며 거절했다. 안창호는 대통령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총리 후임에 관한 수습책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학무총장 김규식은 재정 안정을 이유로 대통령을 집정관 총재로 하고, 총리직은 없애고, 총장은 부장으로, 그 이하는 부원으로 하자는 실무중심 안을 제시하였다. 신규식 법무 총장도 가세하여 직명을 모두 변경하자는 새로운 안을 국무회의에 제안하였다. 일종의 임시정부 개조안이었다.
노백린은 환영회 석상에서 호소한 대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2월 국무회의 참석을 통해 결국 이승만을 지적하며 ‘사퇴하세요!’라고 일갈했다. 이승만은 감정이 상해서 ‘그렇게 하겠다.’라고 회의 석상에서 맞받아쳤으나 이튿날 이를 번복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승만이 공들인 구미위원부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면서 1920년 4월 21일 현순에게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직을 맡겼다. 현순은 1921년 3월 9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일관계급박함’에 관한 업무 보고를 해 왔다. 보고서에서 현순은 구미위원부를 대한민국대사관으로 개편하여 미국 정부의 승인을 요청해야 한다며 스스로 주미대사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이승만은 이에 분노하여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4월 26일 자로 현순을 해임하고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서재필을 임명했다.
국무회의가 이렇게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북경에서 김창숙, 박은식, 원세훈 등 15인 연서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 발표되었다. 이 격문은 임시정부가 창립 당시부터 잘못되었으며 수립 이후 무능과 알력으로 국민의 기대에 이바지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전 국민의 의사에 기초한 통일적이고 강력한 정부 수립과 민족 독립운동의 방략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신채호, 박용만, 신숙 등 8개 단체 대표들도 북경에서 북경군사통일회를 조직하고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의 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통합을 이끌면서 외교와 군사에 집중하여 시정방침을 추진해 온 안창호로서는 억장이 무너졌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내 탓이다. 역시 임정 초기 내무총장 취임을 거부했어야 했다. 나는 청년들에게 약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이승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지지세력이 많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해서 6대 사업을 끌고 나가자는 것이었다. 나의 구상은 실패다. 수포가 되었다. 이제라도 임시정부 개조안에 대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은 필요하다.’
1921년 3월 1일 오후 2시, 안창호는 교민단에서 주최한 3.1운동 기념일 행사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언급했다. 그러자 3월 5일 조완구, 윤기섭 등 45인이 임정 불신임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세 총장도 협성회를 조직하고 임정 유지를 호소했다. 반 임정계인 창조파는 정구단(正救團)을 조직하여 이승만의 무능과 무책임을 공격했다. 북경파들은 4월 20일, 10개 단체를 모아 군사통일회를 개최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성토하더니 4월 27일에는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불신임하며 무효취지로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리고 5월 6일, 만주 액목현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하면서 임시의정원 개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승만 퇴진을 요구했다. 이를 지켜본 임시의정원에서는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안창호는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겠노라면서 의정원을 설득하여 이승만 탄핵안을 철회하게 했다. 그리고 5월 11일 손정도를 국무위원으로 추천하고 노동총판직을 사임했다. 이에 앞서 노백린과 김규식도 국무위원을 사임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던 날, 안창호는 북경로 한 식당가에서 손정도와 여운형을 한자리에서 마주했다. 예정했던 자리였다.
안창호가 입을 뗐다. “손 의장, 고맙소. 정부 뒷일을 부탁하오. 임시정부는 어떻게든 살려야 하오.”
손정도가 안창호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을 받았다. “형님, 제가 의정원 의장이든 국무위원이든 달라질 것은 없지요. 다만 형님의 결심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으니 마땅한 일로 여길 뿐입니다. 형님은 괜찮은 것이지요? 정부통합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데 무용지물이 되다니 허무합니다.”
선배들 이야기를 경청하던 여운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3.1운동 직후 최고기관 조직의 첫 단추를 잘못 채운 저에게 책임이 큽니다. 그때 역시 시간이 걸려도 정당조직으로 갔더라면....”
손정도가 몽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몽양, 무슨 소리요. 그때 우리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소. 그때 정당조직 의견도 많았지만, 초대의원들은 어쨌든 공론을 만들어 합의를 끌어냈소.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지요. 지금의 분열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문제요. 머리로는 독립을 외치면서도 서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없게 하는 사탄의 심술이 작동된 것이라고나 할까?”
안창호는 손정도 목사 입에서 ‘사탄의 심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피식 웃음이 났다. ‘인간은 누구나 선악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안의 사탄은 무엇인가? 원칙? 아집? 주의(主義)? 나에게 한 옳음이 있으면 남에게도 한 옳음이 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내 원칙만 옳다고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위선. 그렇다, 위선이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추진하는 일은 모두 다 옳다고 믿었다. 단결, 통일, 겸손을 가장한 고집.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여운형이 말했다. “잘못되어 가는 정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람은 도산 각하가 처음이지요. 그동안 물러선 사람들은 책임보다는 회피가 많았던 셈. 저도 그랬지요.”
손정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도산 형님은 대신 나에게 뒷일을 감당시킨 것이고요. 하하.”
침울하던 안창호는 기분이 다소 좋아졌다. “두 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오. 국무회의 뒷정리는 손 목사가 대신해 주실 것이고, 몽양은 새로운 일에 앞장을 서 줄 것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소. 하하.”
손정도가 말했다. “이제부터 두 분께서 머리와 발이 되어 혁명 정당을 향해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에 발길을 내딛는 것입니까?”
안창호가 다시 침울하게 대답했다. “지난 2년 세월이 아깝소. 그러나 임시정부를 살리려면 뭔가 다른 방도가 필요하오.”
여운형이 말했다. “대신 사람을 많이 겪었지요. 그리고 독립 비전을 나눌 동지를 발굴했고요.”
손정도가 말했다. “두 분은 대립해 있는 이념들을 하나의 과제, 조국광복의 이념으로 통합하고 균형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국민대표회의도 주도권 다툼이 있을 텐데, 이번에는 도산 형님이 주도권을 쥐고 앞으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만.”
안창호는 크게 웃었다. “손 목사, 그것은 불가하오. 내 태생이 그렇지 못하오. 대신 나는 몽양을 믿고 있지. 하하. 몽양은 세계의 정세와 흐름을 정확히 꿰고 있소. 지략과 전술, 리더십도 모두 갖췄다오. 이번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은 통일운동의 과정이오. 기대가 큽니다.”
여운형은 안창호의 말에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노령과 북경은 정부를 다시 구성하자는 주장을 고집할 것이나 공산당 계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를 것이라 특별히 주시해야 합니다. 고려공산당 자체가 상해파와 노령파로 갈라섰으니 한 자리에 설까 걱정입니다. 여기에 북경계는 이승만 불신임하는 데 다가 북경군사통일회를 따로 조직하여 만주군사 지휘 통솔권을 다투고 있는 형편이고.... 통일 운동이 사실상 험난합니다.”
여운형의 말을 경청하던 안창호는 신중하게 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소. 성심과 성의를 다해 소통을 시작해 봅시다. 다만 독립운동을 하자는 것이니 독립정신에 호소해 봅시다.”
손정도는 기도했다. ‘오, 하느님! 대한의 독립은 하늘의 뜻으로 믿고 있사오니, 대한의 앞날을 밝혀 주소서.’
노동 총판 사퇴 다음 날, 안창호는 여운형과 함께 상해 상현당에서 대중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사임하게 된 배경과 요지를 설명했다.
“우리 민족은 근본적 자격이 독립할 민족이요, 세계의 시운이 우리 요구를 맞추어 줌으로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전제하고, 독립을 완성하려면 우리 내부의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 제1의 방법은 중앙 최고기관에 총 집중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의정원과 정부를 더욱 공고하고 충실하게 하여 민족적 통일기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통일의 제2의 방법은 공론을 세우고 공론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칙이 서야 합니다. 그러니 ‘국민대표회의’라는 하나의 큰 조직을 세워 각 방면의 단체와 대표들이 모입시다. 모여서 국민의 힘을 중앙으로 총 집중하여 공론을 세우고 공론에 복종합시다. 우리 정부를 반석에 올립시다!”
이 강연회가 끝나고 안창호와 여운형은 즉시 300여 명의 찬성으로 ‘상해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조직했다. 이들의 발걸음은 바빠졌다. 두 사람은 5월 19일, 한구로 예배당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 촉구를 위한 연설회를 가진 후, 북경군사통일회와 협의를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예상했던 바대로, 북경군사통일회는 상해 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간도에 산재한 무장부대 통솔 지휘권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반임시정부 노선을 견지하며 노령 대한국민의회와 결합하고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으로 박용만, 신숙, 박건병, 남공선, 배천택을 선임했다고 했다. 박용만과 신채호는 결국 안창호를 두고 ‘이승만을 인정한 형님도 적’이라고 표명했다. 안창호는 두 사람을 향해 “그래도 일단 통일은 하고 봅시다.”라고 말하며 미소를 던졌다. ‘내가 사랑하는 아우들이다. 저들의 강경함이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 줄 것이다.’ 안창호는 그렇게 믿었다. 안창호와 여운형도 북경 선전 활동을 통해 국민대표회의 교민대표 15명을 선출했다. 안창호는 침식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이 일을 추진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계속해서 미국과 중국, 간도 방면으로 진력했다.
북경 유세를 마치고 안창호와 여운형은 숙소로 향했다. 안창호가 여운형에게 귀엣말로 말했다. “역시 그대와 내가 예상했던 바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 놓고서도 공론 성립에 결론이 나지 않아 결렬될 수도 있겠구려.”
여운형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거 원, 독립운동이 무슨 자존심 싸움도 아닌데 왜들 그리 강경한지.... 상해 본 회의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안창호가 여운형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 법이오. 이당치국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겠지만, 그 길이 대안이라면 민족유일당 건설은 진리요. 국민대표회의가 깨져도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최고 정당조직을 위해 또 다른 시도를 하겠지. 기운을 냅시다!”
여운형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년에 워싱턴 태평양군축회담(21.11.12~22.2.6) 기간에 모스크바에서는 극동인민대표회의(22.1.21~2.2)가 열립니다. 두 나라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일전에 말하지 않았소. 군축회담? 결과가 좋으면 좋겠지만, 어려울 테지요. 일본은 머지않아 미국을 겨냥해서 패권에 도전할 텐데 군축이 되겠소?”
여운형이 말했다. “일본이 양쪽 회담에 모두 걸쳐 있으니 우리는 양쪽을 모두 주시해야 합니다. 1차 대전으로 득을 본 나라는 일본이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미국은 영일동맹이 해소되길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육로로 동북 3성을 장악하고 중국과 한판 전쟁을 벼르겠지요. 그래서 코민테른 외교는 아주 중요합니다.”
안창호는 여운형이 내다 보는 국제정세에 공감했다. ‘역시 몽양은 지도자의 아우라를 가졌다.’ “일본이 참가할 태평양군축회담도 중요한 의제이니 나는 외교후원회 조직을 기회로 국민대표회의 성립을 위한 멍석 깔기에 나서겠소. 우리도 워싱턴 군축회담을 주시하자는 뜻이지.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취지가 되겠지만 홍진이나 장붕과도 친교를 맺겠소. 그리고 흥사단 몇몇도 설득할 것이오.”
여운형이 말했다. “생각이 참으로 깊으십니다. 저 대신 운홍이를 도산 각하 옆으로 보내겠습니다.”
안창호가 유쾌하게 말했다. “좋소. 상해로 돌아가면 나는 태평양회의를 대비해 외교후원회를 챙길 터이니, 몽양은 극동인민대표회의 참가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오.”
여운형이 말했다. “네. 준비하면서 국민대표회의 본회에 참가할 대표자들도 만나겠습니다. 참, 그리고 이번 모스크바 여정에는 김규식 형님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안창호가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동휘 형님도 참가하시나?”
여운형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고려공산당 대표이시니.”
안창호가 말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갈라져서 그렇지, 사실 이동휘 형님은 공산주의 사상에는 흥미가 별로 없을 거요. 반일 민족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맞아요. 내 생각에... 종지에는 상해파나 이르쿠츠크파도 통합될 거라 믿소. 그 형님이 그런 운동을 주도하시겠지.”
여운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1921년 5월 29일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발기회가 결성되었다. 발기인은 안창호, 김규식, 남형우, 윤현진, 이규홍, 김철, 나용균, 이탁, 김병조, 송병조, 도인권, 양헌, 한진교, 최동오, 신숙, 여운형, 원세훈, 서병호 등 25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임 6개월 동안 체제 안정에 실패하였다. 이승만은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노백린, 손정도 5인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고 이동녕을 총리 대리로 확정 발표했다. 그리고는 1921년 5월 28일, ‘외교상의 긴급’과 ‘재정상 절박’이라는 교서를 남기고 상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때를 맞춰 구미위원부 서기 정한경은 6월 13일 자로 독립신문사 안창호와 이광수 앞으로 위임통치문제 해명서를 보내왔다. 이승만은 6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귀착하여 지지세력을 규합, 1921년 7월 7일 하와이에서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날 안창호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에 있는 흥사단 앞으로 장문의 편지 ‘동지들에게 주는 글’을 보냈다. 편지에서 안창호는 흥사단 원동사업에 대한 신념과 기대를 재확인시켰다.
‘나는 원동에 흥사단주의를 발전시켜 큰일을 감당할 인적토대를 확고히 세우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다. 미주 본부는 기초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야 할 것이다.’라고 안부를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이 말씀이다. 참배 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 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금전의 힘, 지식의 힘, 도덕의 힘을 기르자. 힘은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에서 난다. 건전한 인격을 위해 4대 정신과 3대 육을 수련하자. 신용의 자본, 지식의 자본, 금전의 자본을 동맹 저축하자. 단우는 단을 위해 희생하고 단은 국가 민족을 위해 희생하자. 배우는 것도 흥사단을 위해, 돈을 버는 것도 흥사단을 위해 하자. 그러나 지금은 특별히 희생정신을 요구하는 때이다. 우리 흥사단은 흥사단을 본위로 하지 말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자.’
홍언은 『신한민보』에 이를 게재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