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2/10

2화.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by 은명

2화.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안창호는 1924년 초, 만주 독립군 대표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다시 시작하자. 모든 어려운 일은 처음으로 돌아가 쉬운 일부터 풀어야 한다.’ 안창호는 흥사단 천진북경지부 박일병을 가이드 삼아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 산해관에서 랴오둥만에 인접한 진저우(금주), 후루다오(호로도) 등 해안 일대 답사도 예정하고 있었다. 박일병(1893~1937)은 장덕수, 장덕준 형제와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관여하고 기자로 입사했다. 장덕수와 함께 1920년 6월 민족주의 노선인 조선청년회를 발기하면서 여운형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이후에는 신사상연구회의 무산자동맹에 참여하고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박일병은 고려공산당청년회의를 구상하던 중 여운형 소개로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에 입단했다. 여운형과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 소집 유세를 다니던 때였다.


이탁이 약속대로 양기탁 선배를 모시고 산해관으로 왔다. 안창호와 박일병, 양기탁과 이탁, 네 사람은 14세기 말에 건축된 산해관의 아름답고 웅장한 자태에 감탄하면서 만리장성을 올랐다. 박일병의 설명에 의하면, 명나라는 말기(1630년)에 농민 반란군 이자성을 제압하기 위해 산해관의 성벽을 허물어 만주족인 청나라 군사들을 무혈입성시켰다. 그 결과 청나라에 중원을 넘기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외세를 끌어들인 군사 전략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을까?

네 사람은 곧 산해관을 떠나 해변 휴양지 후루다오와 금주를 답사했다. 후루다오는 고대에 진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현재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지배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동쪽으로 금주와 요동 반도로 연결되는 이 해안지역이 마음에 들었다. 한겨울인데도 그렇게 춥지 않았다. 대륙성 계절풍 기후로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김창세가 상해로 돌아오면 다시 와봐야겠다.’ 이 지역에는 북경에서 봉천으로 관통하는 철도가 있었다.


안창호 일행은 금주에서 기차를 타고 봉천을 지나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으로 향했다. 남만주지역 지리에 밝은 이탁이 안내했다. 1924년 1월, 만주는 다시 설국으로 변해 있었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저 눈에 덮인 언 땅 밑에서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을 것이다. 만주는 우리 독립운동의 확실한 근거지가 되어야 한다.’ 1922년 2월 안창호는 만주까지 와서 대한통군부 결성에 힘을 보탰었다. 대한통군부는 그해 8월 임정 산하 광복군과 다시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로 발전하여 군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야심 차게 출발했던 통일조직이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이탁은 이를 안창호에게 의논해 왔다. 게다가 이탁은 이후 김동삼이 의장을 맡아 진행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데에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약속된 한인촌에 도착하니 김동삼이 마중을 나왔다.

“어서들 오세요. 추운 날씨인데. 양기탁 선배님은 도산을 위로하려고 상해에 가셨던 것입니까?” 김동삼이 안동 사투리 억양으로 환영했다.

양기탁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우리는 산해관에서 만났소. 북경에 있었지.”

안창호가 김동삼에게 악수를 청하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소? 국민대표회의를 끌고 가느라 고생 많이 하셨소. 바로 화전으로 귀환하셨던 게요?”

이탁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김동삼이 이탁을 보고 안부를 물었다. “도산 곁을 지키고 계셨던 게요? 국민대표회의 고생은 내가 아니라 도산이 했지. 허허.”

안창호가 김동삼에게 박일병을 소개했다. “이 청년은 우리를 예까지 안내해 준 가이드 선생이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오. 우리는 공부하면서 예까지 왔지요.”

박일병은 미소로 김동삼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원로들의 대화에 기분이 좋았다. ‘이분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시다. 인상들도 모두 좋다. 살아온 날들이 험했을 터인데...!’

김동삼은 박일병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반갑소. 환영하오.”

안창호가 김동삼에게 물었다. “통의부가 다시 분열되었다고 들었소. 전덕원 선생이 의군부를 따로 편성해서 양기탁 선배님과 갈등하다가 그리되었던 것이오?”

김동삼이 호탕하게 말했다. “결국은 전덕원, 채상덕 선배들은 공화주의에 반발한 것이오. 양 선배님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 나와 오동진에 대한 적의가 표출된 것입니다.”

양기탁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진보와 보수는 물과 기름이오. 절대 섞이지 않지. 우리가 독립되어도 황제를 다시 모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일러주었건만 골수에 박힌 고정관념을 벗어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게요. 쯧쯧.”

이탁도 끼어들었다. “갈등은 탁주 안줏감일 수 있지만 어르신들 싸움으로 유혈사태라니. 있어서는 안 되지요!”

김동삼이 말했다. “국민대표회의가 깨지고 돌아와 보니 통의부 내 갈등으로 인해 독립군부대 기강도 많이 흐트러졌더이다. 그래서 11월에 각 부대 지도자들을 화전으로 불러서 상해 회의 결과를 보고하고, 새로운 군정서를 조직하자고 했으나 의견 통일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양기탁이 말했다. “화전까지 우리 지도자 도산이 오셨으니 다시 힘을 내봅시다. 남만주가 통일이 안 되면 다른 지역도 힘이 많이 빠질 것이오. 도대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산의 정세 유세가 중요하오. 우리가 지금 일본에게 어떤 위협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 알게 해야 하오.”

안창호가 김동삼에게 말했다. “김동지, 국민대표회의가 잘 성사되었다면 우리는 유일 정당을 결성하여 이당치국에 돌입했을 테지요. 어차피 통일 대당으로 가야 합니다.”

김동삼이 말을 받았다. “동의하오. 유일당 내부는 지금처럼 각양의 노선 주장들이 있을 테지만, 숙의된 토의 토론을 통해서 공론을 만들고 이에 복종하는 것을 법으로 정한다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데도 효율적일 것입니다.”

양기탁이 동의했다. “그렇소. 지금은 주장과 이해관계가 대립해 마치 이판사판 하듯 분열을 반복하고 있지만, 통일 대당이 결성되면 최고법의 권위도 세울 수 있을 테지.”

안창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는 코민테른의 지적처럼 계급혁명 단계가 아니요, 권력 투쟁의 단계도 아니요, 오직 민족혁명 단계이니 좌우합작이 필요한 시점이지요. 유일당의 최고법은 오직 항일 독립전쟁입니다.”

양기탁이 진지하게 말했다. “자유시 참변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더는 일어나서는 안 되오. 만주에서 복벽파니 공화파니 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분열하고 있는 동안 청년들은 좌파 모험주의로 기울고 있어요. 그것도 걱정입니다.”

내내 경청하고 있던 박일병이 혼잣말을 했다. “모험적 공산주의라.... 앎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다. 지식과 덕은 하나다.”

이탁이 말했다. “지금은 민족진영 내부통합과 좌우연합이 필요한 때입니다. 만주 독립군이 통일되려면 통의부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김동삼이 말했다. “통의부와 의군부가 다시 통합되어 임시정부로 흡수될 수 있어야 할 것이오.”

이탁이 말했다. “통의부 의용군 1,2,3,5 중대가 독자적 행동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임시정부 직할군대로 편입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안창호가 대안을 제시했다. “상해로 가면 임시정부와 의논해서 김승학과 이유필을 이리로 파견하겠소. 임정 산하 군정부를 결성해야지요.”

“좋은 생각입니다. 나도 임시정부가 남만주에 군정부 참의부를 결성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김동삼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양기탁과 이탁은 두 지도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안창호가 동지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통의부 말인데.... 의군부와의 갈등요인은 언제든 다시 드러날 것이오. 봉합 처방보다는 분리해서 개혁 처방을 내놓는 것이 낫지 않겠소? 차라리 통의부를 재편하여 정의부를 따로 건설합시다. 정의부는 통의부를 계승하는 것이오. ”

김동삼이 수긍했다. “깨지는 것이 두려웠소. 그러나 도산 말씀대로 갈등은 언제든 독이 될 수 있소. 그 대신 통의부를 재편해서 정의부로 재조직되어 힘을 갖는다면 의용군 조직들은 정의부에 합류할 것이오. 중립적 태도를 보이던 의용군들은 갈 길을 찾아서 가겠지요.”

이탁이 끼어 들었다. “그러니까 통의부가 정의부로 개편되고 임정 예하 참의부를 결성해서 의군부와 중립적 의용부대들을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시켜 나가는 것이군요.”

안창호가 말했다. “대등한 위치에서 만주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임시정부 군대로 재편되는 것이 독립전쟁 준비의 위엄을 세우는 일이 아닐까 하오. 이번 길에 북만주 김좌진 장군도 만나볼 생각입니다.”

김동삼이 말했다. “좋습니다. 나도 도산 생각에 동의합니다. 김좌진과 지청천 장군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하오. 민족계열이 굳건해야 공산주의 청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소.”

안창호가 지청천의 안부를 물었다. “참, 지청천 장군은 이곳에 도착해 있소?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국민대표회의에 기대감이 컸던 것으로 아는데.”

김동삼이 대답했다. “지청천 장군은 상해에 머물다 온다고 했소. 여운형과 신익희를 만나고 있을 거요. 중국국민당 인사들과 접촉하여 한국군관학교 설립 가능성을 타진해 보겠다고 합디다.”

안창호가 감탄했다. “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국민대표회의 기간에 중국은 국공합작을 결정했던 모양이오. 국민당이 최고기관의 위상으로 민족해방투쟁을 하겠다는 것인데, 여기에 공산당이 참여하는가 보오. 여운형이 광주(광저우)에서 열리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회에 가 보겠다고 했소. 우리도 국민대표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좌우를 통합했더라면.... 아쉬움이 크오.”

김동삼도 감탄했다. “젊은 친구들 생각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소. 중국과 우리는 항일전쟁을 같이 겪고 있는 셈이니 젊은 무관들이 국민당과 교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요.”

양기탁이 북경파를 겨냥해서 냉소적으로 말했다.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대화가 역시 중요하오. 오늘 우리 대화에 북경파들도 같이 있었다면 좋았을 터! 북경파들은 창조파로 결합하여 국민대표회의를 분열시켰는데 반성이 없소?”

안창호는 이 물음에는 침묵했다. ‘조선공화국은 그들 내부의 이념적 갈등으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한다.’

김동삼이 서둘렀다. “자, 그럼 모두 숙소로 갑시다. 이상룡 어른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창호 일행은 이상룡(1858~1932) 어른을 만나 정중히 인사했다. 66세. 퇴계 학맥을 계승한 경북 안동지역의 거장. 정통 유생 출신의 이상룡은 베이컨, 데카르트, 루소, 칸트, 다윈 등 서양 근대철학자들의 저작을 접했다. 이상룡은 안동에 신교육 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을 길렀다. 협동학교는 신민회의 대성학교의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고, 신민회에서 협동학교에 교사를 파견하였다.

김동삼(1878~1937)은 무인년생으로 안창호와 동갑이었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은 이상룡의 문중이며 제자이자 동지였다. 김동삼은 안희제의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경상도 지역에 신민회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이상룡과 김동삼은 신민회 소속 이회영, 양기탁 등의 해외 독립군 기지개척 소식을 접하고, 1911년 집안 노비해방과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삼원보로 망명하여 이동녕 등과 결합하였다. 고성 이씨와 의성 김씨 양가 문중 300여 명이 이상룡과 김동삼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했다. 김동삼은 1914년 백서농장을 건립하고 장주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김동삼은 만주벌의 호랑이로 이름을 떨쳤다. 김동삼의 원래 이름은 김긍식, 호는 일송이다. 만주 이주 이후로 동북삼성을 따서 ‘김동삼’이 되었다.

1919년 당시 서간도는 부민단, 백서농장, 신흥중학교의 세 조직이 있었다. 1919년 4월에 부민단은 한족회로, 백서농장 군영은 서로군정서로, 신흥중학교는 신흥무관학교로 각각 개편되었다. 그러나 1920년 경신참변을 겪으면서 군영이 흩어지는 바람에 분산된 조직을 추슬러 힘을 집중할 필요가 생겼다.

이상룡과 양기탁이 통일운동에 나섰다. 김동삼 뒤에는 이상룡이 있었고 안창호 뒤에는 양기탁이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지도자 안창호와 서간도 지도자 김동삼은 국민대표회의에 기대를 걸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된 후 이들은 다시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통일운동에 나섰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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