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김좌진과 조성환 그리고 박은식
1924년 1월 하순. 안창호 일행은 화전을 떠나면서 이탁, 박일병과 헤어졌다. 이탁은 남만주 참의부가 있는 집안현으로 갔고, 박일병은 북경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안창호와 양기탁은 유일당 운동의 기반 조성을 위해 화전에서 북만주 목릉현 소추풍으로 향했다. ‘일단 조성환과 김좌진을 만나보자. 홍범도도 만날 수 있을까? 그가 궁금하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북만주 민족주의 진영 군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조성환이 참가했다면 북경파 소속이었을 것이고, 김좌진이 참석했다면 지청천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북만주 대한독립군단은 자유시 참변을 겪은 이후 반공산주의 입장이었기에 창조파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지휘할 수 있는 최고 통일기관을 원했다.
양기탁은 조성환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조성환은 태생이 양반 출신이지만 독립운동에서 나이나 출신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오. 제국 말기 무관 출신으로 신규식과 동기였고 동갑인 노백린과 김희선이 교관이었지. 편한 출세길을 마다하고 무관학교 개혁을 요구하다가 혼자 실형을 살기도 했소. 그 후 상동교회를 드나들면서 신민회에 가입했던 거요. 나는 그를 북경 특파원으로 보냈소. 신해혁명에 고무되었고, 신규식이 비록 후배이지만 그가 조직한 신한혁명당에 가입하고 그의 노선을 따랐소.”
안창호가 끼어들었다. “그때 조성환 선배가 제가 있는 미주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중화민국 건국과 손문이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일은 중국만 아니라 아시아와 우리나라에도 행복이라고요.”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오. 제1차 대전 때는 독일 승리를 기원하면서 독일, 한국, 중국이 연합하면 일본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니, 삼국동맹에 앞서 한국과 중국이 먼저 조약을 맺자고 시도한 일도 있었다오. 조성환은 박용만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오. 대동단결선언도 그 무렵에 나왔지. 그 후 독립군양성에 주력한다면서 연해주로 갔다가 이동휘와 사상이 맞지 않아서 길림으로 왔다고 했소. 그러다가 3.1운동 시국을 마주한 거요.” 양기탁이 상세하게 설명했다.
안창호는 생각난 듯 기억을 더듬었다. “저는 그때 정보를 미리 알고 싶어 홍콩에서 보자고 연통을 보냈었는데 엉뚱하게도 현순이 마중을 나왔지요. 조성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하고 당황했었습니다.”
양기탁이 조성환을 두둔했다. “임시정부 조직까지는 같이했다는데 군무 차장 취임을 거부한 것을 보면 그도 이승만이 싫었던 게요. 그는 연해주로 갔다가 북만주로 이동하여 서일과 의기투합하고 1919년에 대한군정서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했지요. 따지고 보면 그때 군무 차장 역할은 제대로 한 것이오.”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저와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지요. 저는 유동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양 선배님 휘하 신민회 주요 멤버들인데....”
“신민회 결사, 그땐 참으로 대단했소. 두고 보시오. 결국은 그들이 사방에서 꾸역꾸역 출현하여 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 갈 것이니...! 허허.” 양기탁은 그렇게 되리라 믿고 싶었다.
“네, 그럴 것입니다. 유일독립당에서 모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처럼 말이죠.”
안창호와 양기탁이 목릉현 소추풍에서 제일 먼저 김좌진을 찾았다. 김좌진은 마침 조성환과 같이 있었다. 이들은 서일이 이끌던 대한군정서의 재조직과 성동사관학교 설립 추진을 의논하고 있었다. 청년의 안내로 그들의 숙소로 들어서자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조성환이 소리쳤다. “아니, 이게 누구시오? 도산 아니시오? 양기탁 형님은 또 어떻게?”
양기탁은 수염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유쾌하게 웃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들이 놀랄 정도로 반가운 일이오?”
김좌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형님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정말 반갑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안창호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왜들 이러시오. 보고 싶은 사람이 먼저 보러 오는 것이 도리 아니요? 하하.”
조성환이 안창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임시정부 일로 마음고생이 심한 것을 알고 있소. 그래도 천하의 도산이니 임시정부 파산을 그만큼 막은 것이요. 그런데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래서 이렇게 야인이 되어 다시 예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진작에 야인이 되었더라면 저도 여기서 전쟁 준비에 힘을 보탰을 텐데.” 안창호가 유쾌하게 말했다.
조성환이 안창호를 위로했다. “우리는 이미 국치 때 한국을 떠나면서 연해주와 북만주에 기지개척과 무관학교 설립을 꿈꾸지 않았소? 그 세월이 어느덧 15년이오. 이렇게 지난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동안 연해주는 공산정권으로 탈바꿈했고, 우리는 쫓겨났소. 북만주에 서일과 김좌진 장군이 없었다면 벌써 적군파로 넘어갔을 테지.”
안창호가 조성환과 김좌진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세계 사정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식민 지배를 받고 있고, 일본은 변하지 않고 있지요.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군사 통일이 가장 중요한데, 외교도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눈치를 봐야 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워싱턴회담과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회 양쪽을 주시했던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우리 스스로 힘을 통일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지요.”
조성환이 말했다. “우리 힘이 너무 분산되어있는 것이 사실이오. 만주가 넓다고는 하나, 일본이 야심대로 만주를 삼키기 전에 우리는 만주를 지켜야 하는데.... 참으로 난제입니다.”
양기탁이 말을 받았다. “군사력을 증강해야 하오. 그리고 통일해야 하오. 상해 임시정부가 무기력하다고 놔두면 명령체계는 어떻게 한답니까? 그래서 만주 군사력을 통합해서 민족유일당을 만들자는 것이지. 민족유일당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좌우합작이 선행되어야 하오.”
이번엔 경청하고 있던 김좌진이 끼어들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명확한 사상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우리 민족 분열의 요소라는 것을 이번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알게 되었지요. 우리는 서일 장군을 잃었습니다.”
안창호가 서일 장군 이야기에 고개를 숙였다. “애도합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양기탁도 말했다.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서일 장군의 뜻대로 대종교의 민족정신을 살려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김좌진 장군을 이해합니다.”
조성환이 화제를 돌렸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응하는 전략을 민족유일당의 첫 번째 과제로 삼고 추진합시다. 김좌진 장군과 나는 서일 장군 이후의 대한군정서를 개편하는 일을 의논하고 있었던 터요. 후진 양성을 위해 성동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지요.”
안창호가 추켜세웠다. “오, 잘하셨습니다. 대한군정서는 임시정부에 편제되어 있으니 다시 일으킵시다. 양 선배님하고 저는 군정서 개편작업 기간 중 부대를 순회하렵니다. 대표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싶군요.”
조성환이 말했다. “좋습니다. 개편작업이 끝나면 저도 도산 대열에 합류하여 서간도와 남만주를 돌아보고 싶소.”
안창호가 향후 남만주 순회 계획을 말했다. “임시정부의 참의부 소속 지역은 환인, 집안, 장백 지역입니다.”
“조성환 장군님 그렇게 하시지요.” 김좌진이 말했다.
조성환과 김좌진은 1924년 2월 해림현에서 통합 작업에 들어갔다. 조성환은 군사부장 겸 참모를 맡았다. 그리고 안창호, 양기탁과 함께 남만주 의군부와 의용군 부대들을 순회하면서 이들의 사정을 경청했다. 이들은 통합에 성공하면 상해 임시정부 직할 군단으로 특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탁의 전언대로 의용군 1,2,3,5 중대는 통의부와 의군부 갈등과정에서 중립 입장이었다. 조성환과 김좌진은 마침내 통합에 합의하여 1925년 3월 10일, 흑룡강성 영안현에서 신민부를 결성했다. 신민부는 북로군정서 김좌진을 중심으로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조성환은 본격적으로 민족유일당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안창호는 2월 중순에 상해로 귀환했다. 그리고 교민단 연설에서 ‘대동통일취의서’를 발표하고, 김승학과 이유필을 만나 광복군총영에 압록강 주변 의군부와 의용군 1,2,3,5 중대를 흡수하여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도록 촉진했다. 임시정부는 안창호의 권고에 따라 1924년 6월 26일, 김승학과 이유필을 파견하여 집안, 무송, 장백, 안도, 통화, 유화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을 관할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를 수립했다.
조성환과 양기탁은 화전에 남았다. 김동삼은 조성환을 붙들어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결성하고 군사분과위원장을 맡겼다. 1924년 11월 24일, 마침내 길림에서 참의부 소속 부대를 제외하고 남만주 통의부 소속 부대들은 대부분 정의부로 재편되었다. 김동삼은 이상룡을 군정서 영수(독판)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상룡은 67세의 고령이었다. 이상룡은 고령을 이유로 직책을 사양하는 대신 뒷받침 역할을 하겠노라 약속했다.
안창호는 이 소식을 미주로 떠나기 전에 들었다. 안창호는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이유필에게 편지로 ‘재만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기회가 오면 이상룡을 최고 수반으로 모시도록 하자.’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안창호의 예견대로 진행되었다.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1909)을 맺었고, 1920년에 간도를 침공했다. 그리고 1925년 6월에 삼시협정을 맺어 간도의 독립군 토벌을 합법화했다. 이에 맞서 우리 독립군은 흩어져 있던 각 지역의 독립군부대를 통합하여 정부 산하 육군 주만 참의부(1924.6), 남만주 전 지역의 정의부(1924.11), 북만주의 신민부(1925.3)로 재편이 완료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의 기반 조성 과정에서 안창호, 양기탁, 이탁, 김동삼, 조성환이 함께 발 벗고 나섰다. 이는 일본과 만주 군벌의 삼시(미쓰야) 협정에 대응하여 민족통일 전선으로 항일전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상해 의정원은 1925년 3월 18일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키고 3일 후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또한, 대통령제에서 임기 3년의 국무령 제도로 헌법을 개정했다. 박은식 대통령은 이유필을 내무총장으로, 조상섭을 학무총장으로 등용했다. 박은식 대통령은 1925년 5월 이유필과 오영선을 만주로 파견하여 정의부와 신민부에 임시정부 상황을 알리고,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선임하자는 안에 동의를 구했다.
이상룡은 1925년 9월 24일 삼일당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상룡 국무령은 임시정부와 각계 인사들과 협의하여 9명의 국무위원을 임명했다. 이탁, 김동삼, 오동진, 윤병용은 정의부 소속이었고, 김좌진, 현천묵, 조성환은 신민부, 윤세용은 참의부, 이유필은 임시정부 소속이었다. 신민부 김좌진은 독립군양성에 주력하겠다며 취임을 사양했다.
이상룡 국무령 취임 후,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기관지염이었다. 임시정부는 최초로 국장을 치렀고 박은식의 시신을 상해 만국공묘에 안치했다. 이때 안창호는 미국방문 중이었다. 미주에서도 박은식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모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미주 한인사회도 국내처럼 추도회를 열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부터 박은식 선생을 자주 찾아가 자신의 생활비를 쪼개 챙겨드리곤 했다. 심지어는 슬그머니 부엌으로 가서 밥상도 차려드렸다. 안창호는 저술에 몰두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는 선생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백암 박은식(1859~1925)은 황해도 황주 태생으로, 부친은 서당 훈장을 지냈다. 박은식은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교류하였고, 다산 정약용의 『정법집'(政法集) 39권 19책』을 섭렵하며 실사구시의 학풍을 계승했다. 또 『황성신문』 주필로 활동하면서 『대한매일신보』와 연대하고, 자강론을 강조하며 신교육, 실업 구국, 관습 개조 등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박은식은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등에서 활동하던 중 1907년 안창호와 양기탁의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박은식은 1911년 4월 신민회 인사 체포를 피해 만주 환인현으로 무사히 망명해 윤세복(1881~1960)의 집에서 거주하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윤세복은 경술국치 후 대종교에 입교하고 환인현으로 망명하여 교당을 설립, 포교와 민족교육에 진력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박은식의 국혼론에 기반한 역사서들은 후학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신채호와 장도빈은 박은식의 제자나 다름없었다. 박은식은 1912년 상해에서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와 박달학원을 설립했고, 1914년 『안중근전』을 저술했다. 또한 1915년에는 『한국통사』를 간행하였는데, 이 저술은 오늘날 한국 근대 역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은식은 병중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안공근에게 통일, 단결을 강조하는 유언을 받아쓰게 하였다.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해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민족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고, 셋째,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 친소의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