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동포에게 고하는 글 (상)
안창호가 1924년 1~2월 만주 순회를 하는 동안,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는 미주 본부에서 보내온 820달러를 투자하여 남경 일대에 토지 1500평을 구매했다. 구매한 땅에 3년 예정으로 동명학원 신축교사를 짓기 위해 첫 삽을 떴다. 당시 남경은 정치적, 지리적 요충지였다. 안창호는 이러한 사정을 통찰하고 이곳에 거점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들을 안정적으로 배출하고자 하였다. 동명학원은 그 첫 사업이었다. 1924년 3월 3일, 안창호는 동명학원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경으로 갔다. 개원 당시 동명학원은 중국인 건물을 임대해서 설립했다.
원장은 안창호, 부원장 선우혁, 총무 차리석, 간사 장덕로, 회계는 선우훈이 맡았다. 이후로 학생 수가 늘어나자 입학과 학년별 교과목에 체계가 서고 교사도 늘어났다. 여름학교 개원 때에는 김두봉, 주요섭, 영국인 밀러 등이 가르쳤다. 남경으로 집결한 흥사단 단우들은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아예 상해에 있던 원동위원부 단소를 남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1924년 10월 30일 제10회 흥사단대회를 남경에서 개최했다.
동명학원 개원식 후 안창호는 관련 업무 몇 가지를 마무리한 후, 차리석과 상해로 와서 독립신문사를 방문했다. 차리석은 폐간 위기의 『독립신문』 편집국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의 기관지 기능을 상실한 상태라고 차리석은 비관했다. 만성적 재정난은 임시정부의 영향 때문이라고도 했다.
안창호는 업무를 보고 있던 김승학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 김 동지. 여기 계셨구려. 신문사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지요?”
김승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며 안창호의 손을 잡았다. “어서 오세요. 동명학원을 개원했다 들었습니다. 흥사단 동지들이 참으로 대견합니다.”
안창호는 김승학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독립신문사 경영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도왔어야 했는데.... 미안하오.”
김승학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 이상 어떻게 돕는단 말입니까? 정부가 요동치고 일본영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간섭해서 벌어진 일을...!”
“그렇다면 혹시 내가 글을 자주 게재한다고 해도 일간지나 주간지 발행은 어렵겠지요?” 안창호가 비감에 젖어 물었다.
김승학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일간지 발행은 사실상 불가능하지요. 새로운 투자자가 있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박은식 선생도 나서서 직접 어떻게든 『독립신문』을 살려보자고 그토록 애를 쓰셨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부 기관지가 폐간된다는 것이....”
안창호가 물었다. “한동안 『신한민보』 와 『한미보』 도 대리 판매했지요? ”
김승학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잘 팔렸습니다. 신문이라는 것이 꾸준히 제날짜를 지키며 발행되어야 구독자들 관심이 지속될 터인데, 미주 『신한민보』도 경영난에 빠졌다고 들었고, 국내 신문 『동아일보』도 일본 간섭으로 무기 정간을 반복한다고 들었습니다.”
안창호가 탄식했다. ‘아, 그렇다면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어디다 해야 할까?’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상처를 달래기 위해 북경과 만주를 돌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었다. 안창호에게 이들은 나라를 잃은 동포들이요, 국민이다. 그뿐이랴, 국내 동포들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애민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동포에게 전하고 싶은 말...!’ 안창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말썽을 일으킨 부분을 바로 잡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을 보완할 필요도 있었다. ‘신문 지면을 이용해서라도 할 말을 하자.’ 안창호는 국내에서 발행되는 『동아일보』에 주목했다. ‘춘원에게 구술하자. 춘원이 받아 적은 내용으로 사설을 연재하게 하자.’
마침 차리석이 생각에 잠긴 안창호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안창호 앞으로 온 편지 뭉치를 전달하며 말을 꺼냈다. “도산 각하는 동포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군요. 산상수훈처럼...! 이 편지들은 국내 동포들이 도산께 빨리 고국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입니다.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도와 달라는....”
안창호가 편지 뭉치를 받으며 비감에 젖었다. “이 편지들을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읽어 봐야 하는데.... 국민의 소리를 들으면 갈등하던 마음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돈되지 않겠소?”
“3.1운동 이후 낙망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차리석은 이렇게 말하면서 밀봉된 편지 하나를 따로 슬며시 전했다.
“비밀편지?” 안창호는 곧바로 편지를 뜯었다.
이광수가 보낸 편지였다. 4월 8일 북경 중앙호텔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안창호는 예감이 통했다는 듯이 ‘옳거니!’ 했다.
서울에서 1922년 2월 11일 수양동맹회가 창립되자, 1923년 1월 16일 평양에서도 동우구락부가 결성되었다. 대성학교 출신 김병연이 수양동맹회 결성에 고무되어 1922년 7월에 대성학교 출신들을 모았다. 준비 끝에 20여 명이 모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선 평양의 상공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자금을 모아 안창호의 임시정부를 소리 없이 후원했다. 이광수는 작년 1923년 10월 10~11일 이틀에 걸쳐 평양 창전리 김동원 집에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합동문제를 논의했다. 김동원은 통합 제의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광수는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러 왔다.
이광수의 일거수일투족이 밀정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밀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와 이광수의 비밀회동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안창호가 물었다. “국내 사정은 어떻소?”
이광수가 대답했다. “국내는 극동인민대표대회 이후, 많은 청년이 공산주의에 쏠려있습니다. 그들은 민족주의 원로들을 공격하면서 독립전쟁은 계급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단계를 무시하다 보니 모험적일 수밖에 없고요. 결국, 우리끼리 싸우는 꼴이죠.”
안창호가 다시 물었다. “그들이 국내 생산자 계급에 대한 영향력은 있소? 농촌이나 신생 산업 노동현장이나.”
이광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우리 국민은 농업의 주인도 아니요, 노동의 주인도 아니지요. 그냥 생계에 급급한 식민지 백성이죠. 그러니 좌파 청년들이 파고들 여지가 만만치 않습니다.”
안창호가 말했다. “농장과 공장에서 생계투쟁을 하는 그들이 대한의 주인이요, 황제인데...! 공산계 청년들은 엉뚱하게 민족주의에다 총을 겨누고 있구려. 지금은 민족혁명의 단계요. 계급혁명을 꿈꾼다면 그들은 현장으로 가서 교양사업을 하면서 일제 주구들과 싸우는 것이 마땅할 터.”
이광수가 수긍하면서 말했다. “국민대표회의가 깨졌다는 소식을 모두 들었습니다. 국내 사정도 주도권 다툼에만 관심이 있고 상생할 생각은 아예 없는 듯합니다. 제 생각에 다수 국민은 역사적 자각이 필요합니다.”
“역사적 자각이라.... 식민지 백성에서 독립국 국민으로 거듭나야 하지요. 3.1운동은 그런 것이지. 3.1 만세운동의 주인공들은 역사적 자각으로 역사적인 삶을 살았던 거요. 참으로 위대한 자각이지. 자각을 일깨운 지도자들이 있었던 거요. 그대도 그중 한 사람이지.” 안창호는 이광수에게 격려를 잊지 않았다.
이광수는 다소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민중의 자각 행위가 지속성을 가지려면 역시 인격 운동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의 경세론이 옳습니다. 그래서 수양동맹회 산하에 통속교육보급회를 부설 단체로 두려고 합니다.”
안창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소.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이 기름을 넣은 등잔을 들고 깨어서 기다려야 구원을 받는다.’ 이를테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진리요.”
이광수도 웃었다.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군요. 마치 진리를 따르는 자의 태도 같습니다.”
안창호가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평양 동우구락부와 소통했소? 그들은 서울 동지들과는 다를 것이오. 그들은 평양 소상공인들이 대부분일 테니. 유길준 선생 말을 빌리면 ‘흥상단’이 어울릴.... 하하.”
이광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평양 창전리에 있는 김동원 형님은 시원한 답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안창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간 뜸 들이다가 말했다. “실은 나도 처음에는 20여 명이 각자 사업으로 금전의 자본을 기르면서 수양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소. 수양동맹회도 마찬가지. 만일 말이오. 평양과 서울이 통합한다면 그 조직은 공개적일 수밖에 없을 터. 적들이 주목할 게 뻔하오. 대안은 있소?”
이광수는 신중했다. 올 초에 합법적 정치 운동을 제안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사실은... 고백하건대 최린과 송진우, 김성수 등과 타협적 정치결사를 은밀히 논의해 왔습니다. 그런 중에 제가 「민족적 경륜」 의 사설을 발표한 후 악평에 시달렸습니다. 악평과 곡해 속에는 선생님의 명예 훼손도 있습니다. 결국, 해명 사설을 쓰고 『동아일보』를 사퇴했지요.”
이광수는 1924년 초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란 제목으로 장문의 사설을 발표했다. 내용은 합법적인 정치결사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의 양해 아래 타협적 정치 운동을 전개하자고 했다가 또다시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여론이 악화하자 이광수는 1월 29일 자로 이에 대한 해명 사설을 쓰고 동아일보를 퇴사했다.
안창호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국내 상황에 약간 긴장하며 말했다.
“오, 그런 일이 있었군. 춘원 그대의 생각이 내 생각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다는 말이요? 하하. 국내 사정에 내가 어두우니 아무렴 어떻소. 그러니까 국내는 지금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라고 보아야 하겠군.”
이광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국내 민족주의 진영은 사회주의 세력이 급속히 진화하는 바람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민족주의 내부도 좌파와 우파가 대립하는 상황이고요. 민족주의 좌파들은 사회주의와 결합하고 있고 우파들은 자치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지요.”
안창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래저래 나는 자치운동을 지지하는 배후가 되었군. 임시정부에선 위임통치론자의 방조자로 몰리더니.... 미리 단언하건대, 나는 일본과 타협한 자치운동은 결사반대요. 상황대응을 잘해야겠지. 정치력을 키우는 것은 좋소. 그래서 내가 구상하고 있는 운동은 유일혁명당이오. 유일당을 최고기관으로 해서 명령 질서를 잡고, 우선 목표인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즉 민족혁명 달성이 우선 목표라는 것이지.”
이광수가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제 소견으로는, 흥사단의 수양운동은 사회 현상에 대한 개조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를 위한 정치결사 운동이 요구됩니다. 정치적 훈련과 단결로 장차 독립국가의 정치적 중심 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대업의 기초를 놓기 위함이지요.”
“그렇소.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간교한 동화정책을 경계해야 하오. 서울과 평양 조직이 통합된다면 국내 조직을 원동위원부 소속 지부로 두겠소. 명심할 것은, 흥사단 운동의 현주소는 실력양성에만 있지 않소. 민족혁명에 집중할 때요.” 안창호는 다짐을 두듯 말했다.
이광수는 조심스러웠다. ‘평양의 형님들과 다시 대화하자.’
안창호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놈들은 교활하오.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흥사단의 취지를 악용할 것이오. 각오해야 할 거요. 그러나 좌파건 우파건 민족운동 지도자들과의 소통과 협동은 필요하오.”
이광수는 자신의 「민족개조론」으로 선생님이 불필요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잊지 않았다. ‘놈들은 교활하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흥사단의 정치적 결사의 취지를 참정권 운동이니 자치운동이니 하면서 공격할 것은 뻔하지만, 그래도 수양과 동맹 다음에 필요한 단계는 정치결사, 해방운동이다.’
- (하)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