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4 (하)

4화. 동포에게 고하는 글 (하)

by 은명

4화. 동포에게 고하는 글 (하)


안창호는 여러 날에 걸쳐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성심을 다해서 이를 속기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우리 민족의 앞날에 대하여 비관적입니까? 낙관적입니까?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줄로 확실히 믿으면 조금도 비관은 없을 것이요 낙관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 민족 사회에 대하여 불평시합니까, 측은시합니까?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기질로 아름다운 산천에 생장하여 아름다운 역사의 교화로 살아온 민족이므로 근본이 우수한 민족입니다. 오늘 일시 불행한 처지가 된 것은 다만 구미의 문화를 남보다 늦게 수입한 까닭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고 측은하게 여겨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나라를 구합시다.

셋째, 당신은 주인입니까? 손님입니까?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 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 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돌이켜 민족을 구해 낼 구체적인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 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넷째, 협동하면 살고 분리하면 죽습니다, 협동의 조건 첫 번째는 감정이 아닌 사업의 협동을 말하며, 사업목적과 그에 대한 방침과 계획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결의에 의한 여론 형성이 중요합니다. 여론은 한민족의 뜻이요, 소리요, 명령입니다. 이때 우리를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각자의 양심과 이성뿐이라야 할 것이니 결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 맹종해서는 안 됩니다. 조건 두 번째는 신용입니다. 우리 민족을 건질 뜻이 있다면 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

다섯째, 무정한 사회를 유정한 사회로 만듭시다. 우리 대한 사회는 무정한 사회로 가장 불쌍한 사회입니다. 사회에 정의(情誼)가 있으면 화기가 있고 화기가 있으면 흥미가 있고 흥미가 있으면 활동과 용기가 있습니다. 정의를 어떻게 기를까? 남의 일에 개의치 말 것, 개성을 존중할 것, 자유를 침범치 말 것, 물질적 의뢰를 하지 말 것, 정의를 혼동치 말 것, 신의를 확수할 것, 예절을 존중히 할 것입니다.

여섯째, 지도자를 세웁시다. 협동에는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를 세울 때는 사회에 떠도는 요언(妖言) 비어(卑語)에 의하지 말고 그 사람의 실질적 역사와 행위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 친소와 파당 관념을 떠나서 민족사업에 능력이 앞선 사람으로 선택하면 됩니다.

일곱째, 부허는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은 성공의 기초입니다. 부허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요, 착실은 과학적 인과율에 근거하여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민족 전도의 신성한 사업을 거짓과 위선이 아닌, 진리와 정의에다 기초를 둡시다. 허위는 구름이요, 진정은 반석입니다.


안창호는 동포에게 하고 싶은 말에 이어 동지들께 주는 글청년에게 부치는 글도 구술했다. 이는 ‘공동의 사업을 진행할 때는 책임감을 기르자.’라는 당부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는 실천론에 대한 당부다.

구술하는 동안 안창호는 연설장에 나선 사람처럼 비장했다. 이광수는 마치 아무도 없는 객석에 자리하여 귀한 연설을 듣고 있는 듯 열심히 받아 적었다. ‘저 말씀을 실수 없이 전달해야 한다.’

필화사건에 말려 곤란에 빠진 이광수는 이번에는 1925년 1월 23, 24, 25일 3회에 걸쳐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금지당했다. 이때 검열과 삭제 과정에서 유실된 원고와 내용이 많이 있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안창호의 「동포에게 고하는 글」 은 1926년 5월 20일에 창간되는 잡지 『동광』을 통해 일부 부활된다. 『동광』은 미주 흥사단 동지들의 2500달러 헌금으로 창간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였다. 『동광』은 국내는 물론, 미주, 중국, 러시아 심지어 몽골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1924년 4월 14일, 안창호는 이광수와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만감이 교차했다.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심정이랄까? 안창호는 이광수를 분신처럼 여겼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시작된 인연이 각별했다. 안창호는 춘원의 문학작품을 챙겨 읽어보진 못했다. 바빴던 탓이다. 그러나 그가 문학에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광수는 내무총장 안창호가 지시한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또 『독립신문』 발행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일본이 이광수를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안창호는 천진까지 이광수를 배웅할 생각으로 함께 북경역에 도착했다. 안창호는 밀정을 따돌리기 위해 경진선 열차 1등 칸과 3등 칸으로 분리해서 표를 샀다. 이광수에게 1등 칸 표를 주었다. 그리고 모자를 바꿔 쓰자고 했다. “1등 칸에 어울릴 만한 모자요. 하하.” “천진에 도착하면 나는 돌아가리다. 그때 역에서 잠깐 봅시다. 동지들께 주고 싶은 편지가 있소.”

기차가 천진을 향해 철길을 달리는 동안, 안창호는 3등 칸 구석에 이광수의 헌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앉아서 국내 동지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국내 활동에 있어서 동지들의 입장과 위상을 조만간 결정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국내 동지들의 책임이 한층 더 무겁게 되었다는 격려가 섞인 인사말과 함께 그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두 가지를 당부했다. 단체에 돈과 시간과 재능을 바치는 희생정신과 사랑과 참됨의 태도로 동지나 이웃을 대하라는 내용이다.


이광수는 평양에 들러 김동원을 만나 안창호의 편지를 보여주었고, 정식으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통합을 제안했다. 김동원 그래도 망설였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이광수는 1925년 9월에 다시 평양으로 찾아가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서울과 평양의 두 조직은 1925년 10월 10~11일 평양 창전리 48호 김동원 자택에서 ‘수양동우회’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의 이름으로 미주 본부의 승인을 받았다. 수양동우회는 민족주의 단체임을 표방했다. 수양동우회는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과 국가 단위로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도 민족문제를 우선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고 『동광』 창간호에서 밝히면서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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