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미주 순방
이광수와 작별한 후 안창호는 남경 동명학원으로 돌아왔다. 원장 직분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학원 사업에 집중했다. 상해에서 살고 있던 동지들도 하나둘씩 남경으로 이주했다. 남경 동명학원은 안창호와 흥사단의 새로운 아지트였다.
안창호는 짬짬이 흥사단 입단 문답도 했다. 미주방문 계획도 품었으나 비자 신청이 거부되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서재필 박사가 1922년 11월 13일 미 국무부에 안창호의 미국 입국을 대신 요청했으나 상해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하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궁리 끝에 안창호는 이번에는 중국인 이름 엔, 창, 하오(晏彰昊)로 여권을 마련했다.
안창호는 1924년 11월 15일 친히 조상섭, 이유필, 송병조, 나세웅의 서약문답을 했다. 그리고 11월 22일 상해를 떠나 미주순방길에 올랐다.
안창호는 12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3일간 머물렀다. 교민단 주최로 한인(풀스프링) 감리교회와 와일루아 한인 농장에서 환영회와 만찬을 열어주었다. 400여 명이 모였다. 민찬호 목사가 나와 기도를 주재했다. 민찬호(1877~1954)는 흥사단 8도 대표이자 이승만과 배재학당 동창이었다. 1921년 7월 7일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하와이에 도착하여 친위대로 조직한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에 동참했다.
안창호는 민찬호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형님, 우리가 몇 년 만에 보는 거지요? 흥사단창립 무렵이니까 그 세월도 10년이 넘었군요.”
민찬호도 안창호를 반기며 말했다. “우리 도산께서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상해에서 고생 많이 하셨지요? 낱낱이는 몰라도 대강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장붕이란 자가 1923년에 하와이로 왔는데 그자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면서 도산을 잘 안다고 합디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장붕이 하와이에 와 있다고?’ “고생은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흥사단 동지들이 받쳐주고 있어 임시정부에서 못다 한 일을 메워가고 있습니다.”
민찬호가 감탄했다. “참, 원동에 흥사단을 세우고 동명학원까지 설립했다고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나는 재작년, 그러니까 1923년 7월에 한인기독학원 학생 22명을 데리고 고국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배구단과 합창단을 앞세워 기금모금을 했지요. 그때 고국의 여론이 일본의 내치 유혹에 이승만이 현혹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실망했던지. 그래서 아예 결별했습니다.”
안창호가 형을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위임통치론 때문에 지도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일본의 내치론을 지지하다니요. 비난을 위한 헛소리들이죠, 분열을 조장하는 소리.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찬호가 감탄조로 말했다. “오, 역시 도산이시오. 그런데도 하와이 교민들이 도산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안창호가 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교민들을 사랑하니까요. 이말 저말에 휩쓸리는 교민들에게 가장 확실한 선물은 조국의 독립! 나처럼 지도자로 나선 사람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것이 대공 진리니까요.”
민찬호가 두 손을 모으며 독백하듯 말했다. “오, 하나님. 저희에게 참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산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독립의 그 날까지 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결국, 민찬호는 이승만과 결별했다. 부인 몰리 여사와 함께 키워왔던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와 학원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진보적인 정치 노선으로 선회하여 적극적인 반일 노선에 합류하였다. 1933년 김규식과 중국 인사들이 결성한 한중민중대동맹 활동에 동조하여 북미에서 독립운동자금 약 8천 달러를 모아 보내기도 하였다. 한중민중대동맹은 안창호가 추진하던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미주 지부로, 김규식이 이어받았다. 민찬호는 태평양전쟁 전후로 흥사단 단우들이 중심이 된 조선의용대의 무장투쟁을 지지하며 1932년 이후 도산의 빈자리를 채운다.
3일 동안 하와이에 머문 후, 안창호는 다시 메소니아 배편으로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 여객실에서 홍언과 필립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안창호는 필립이 큰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뻤다. ‘혜련을 빼닮았다!’
홍언이 웃고 있었다. “형님, 고생하시었소. 6년이 다 되어갑니다. 하하.”
“아버지,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지요?” 필립이 다소 어색한 투로 말했다.
“오, 필립! 많이 컸구나. 어머니가 고생하신 게야. 아우도 반갑구려. 내가 늙어 버렸어. 하하.” 안창호는 필립을 안았다. 덩치가 아빠보다 컸다. 든든했다.
“아버지 건강은 괜찮으신 거지요? 창세 이모부가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에게만 털어놓으셨지요. 어머니에겐 비밀이라면서.” 필립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 그래. 이모부가 같이 있겠구나. 나는 괜찮다. 어머니는 내가 간다, 간다 편지만 하고, 안 온다고 삐치신 것은 아니겠지? 하하. 아우께서는 다 무고하시오?” 안창호는 고단한 몸과 마음이 모두 풀리는 듯했다. ‘가족이란 참으로 소중한 보물이다.’
“아버지! 리버사이드는 지금 제 동생들 천국입니다. 모두 7명인가? 필선, 피터, 수산, 데이비드, 수라, 제임스, 베티...! 필선과 피터가 동갑인데 장난이 말도 못합니다. 총놀이에 빠져 정신이 없을 지경이죠.” 필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생들 관리에 힘든 모양이었다.
“오, 그랬구나. 네가 힘들었겠구나. 그러니 어머니와 이모는 더 힘들었겠네.” 안창호는 필립에게 격하게 공감해 주었다. 홍언은 옆에서 웃고 있었다.
“형님, 하와이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더 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말도 마오. 하와이 이민국이 나를 무슨 부랑자처럼 냉랭하게 대합디다. 출국 때 비자도 안 내주길래 중국인 이름으로 왔다오.”
안창호는 돌아갈 때는 어떻게든 하와이에 머물러 동포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요? 왜 그런 고생을 하신 건데요?” 필립이 약간 흥분해서 물었다.
“나라가 없으니 국적도 없는 것이지. 내가 일본인으로 행세할 수야 없지 않은가?” 안창호는 필립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형님, 하와이 민심도 많이 달라졌지요? 형님 안 계신 동안 하와이에서 들려오는 풍문이 참으로 해괴하였소. 박용만도 없고, 하와이국민회도 활동을 접고 하다 보니.... 게다가 이승만 추종자들은 노골적으로 형님이 임시정부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선전해대고. 쯧쯧. 이곳 동지들이 가슴앓이를 많이 했소.” 홍언이 마음 놓고 하와이에서 들려오는 나쁜 소식들을 전했다.
“그래도 호놀룰루에 들렀는데 교민단에서 환영 만찬회를 해줍디다. 민찬호 목사를 만나 회포를 풀었다오. 그런데 황사용이 안 보이던데....” 안창호가 말했다.
“황사용은 호놀룰루 감리교회에서 시무를 완료하고 로스앤젤레스 한인감리교회 담임으로 왔습니다. 1년 당겨 왔답니다.” 홍언이 보고하듯 소식을 전했다.
“내가 임시정부에서 갖가지 악평에 시달리다가도 여기 동지들을 생각하고 즐겁게 버텨왔소. 친구, 아니 동지란 이렇게 좋은 것을...! 허허.”
안창호는 진심이었다. 안창호는 홍언을 보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는 듯 했다. 마치 만년설이 녹아내리듯.
안창호는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상봉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대가족이 모였다. 안창호네 식구들은 혜련, 필립(20살), 필선(13살), 수산(10살), 수라(8살)가 있었고, 김창세 가족은 정실(신실), 장남 피터(13살), 차남 데비드(8살), 3남 제임스(4살), 딸 베티(2살)가 있었다. 자택 건물 2층에는 흥사단 본부 사무소가 있었고, 송종익과 홍언은 단소 건물 2층에 살고 있었다. 당시 송종익과 홍언은 미혼이었다.
안창호는 당분간 임시정부 일은 내려놓자고 결심했다. 안창호는 모처럼 혜련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소소한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혜련에게 심신을 맡겼다. 아늑하고 편안했다. 안창호가 쩔쩔맬 수밖에 없는 또 한 사람은 송종익이었다. 늘 일에 쫓기고 바쁜 그가 자신을 대신해서 가족 가까이에 있었다. 송종익은 충실한 사람이었고, 도무지 말수가 없어 대하기 어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안창호는 송종익 앞에서는 늘 수다쟁이였다. 안창호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그에게 보고했다. 홍언은 그러한 안창호를 바라보며 늘 웃었다. ‘저분의 혼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홍언(1880~1951)은 시와 소설을 쓰는 문학가였다. 항간에는 ‘문장보국 실천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신한민보』를 지키면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안창호, 이갑, 이대위, 강영소, 문양목, 천세헌, 이원규, 김구, 안중근 등의 약전뿐만 아니라, 『미인심』, 『철혈원앙』, 『옥란향』 등의 소설을 썼다. 『애국지사의 노래』, 희곡 『동포』, 『동국염향록』과 같은 시화와 기행문 등 수많은 글을 썼고, 『국민회약사』도 집필했다. 홍언은 예리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냉철하지만 동시에 정이 많은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안창호는 ‘홍언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면 또 어떤 글들을 써냈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안창호는 홍언이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지켜주고 교육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안창호는 행복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 가족과 동지들이 곁에 있다.’
안창호는 흥사단 단소가 있는 로스앤젤레스 집에 머물면서 그리웠던 동지들과 만났다. 지인과 동지들이 안창호를 방문했다. 임시정부에서 사료편찬위원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던 김여제가 찾아왔다. 김여제는 이광수가 『독립신문』을 떠나 귀국해 버리자 방황했다. 안창호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알선했고, 김여제는 1921년 8월에 상해를 떠나 다음 해 캘리포니아대학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안창호는 김여제가 교육학을 전공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송종익에게 장학금 알선을 부탁했다. 김여제는 송종익의 도움으로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에 입학 예정이었다. 김여제도 작가였다. 특히 시를 잘 지었다. 동서인 김창세도 뉴욕 존스홉킨스대학 보건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이제 곧 공중위생학 철학박사 학위 수여식만 남겨 놓고 있었다. 동시에 세브란스의전 조교수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김창세는 4월 안으로 가족을 데리고 귀국하겠다고 했다. ‘혜련이 동생 가족이 모두 떠나면 허전하겠구먼.’
흥사단은 한승곤이 이사부장, 황사선이 의사부장, 김여제와 홍언이 서무원으로 실무를 도맡았다. 김태진이 1918~1920년까지 서무원으로 일하다가 귀국하여 수양동맹회 창립회원이 되었고, 김여제가 1922~1923년에 실무를 이어 받았다. 이 밖에도 최진하, 이일, 송종익, 곽림대, 장리욱, 김병연, 이병두, 문명훤, 김성권 등이 흥사단 의사부와 이사부의 임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24년 12월 25일 서북미국민회와 흥사단은 안창호 환영회를 열었다. 안창호는 환영 연설에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대하매 아무 생각 없고 다만 울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임시정부의 사명을 다 못하여 고통도 많았습니다.”하고 일성을 토했다. 안창호는 상해로 떠날 때의 초심과는 달랐던 그동안의 일들을 요약하여 보고했다.
동지들은 안창호에게 위로의 말로 화답했다. 동지들은 국민회중앙총회를 해산하고 국민회지방총회들을 구미위원부로 바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특히 애국금을 공채금으로 전환하여 임시정부 재정후원의 길을 막은 처사에 대해서는 분노에 가까운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북미실업주식회사가 불법한 소송에 휘말려 꿈이 좌절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안창호는 이 모든 일을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며 자탄했다. 앞으로의 일은 동지들과 의논하면서, 동부지역 유학생 청년들과 만나 동향을 살피고, 이승만도 만나고 서재필 박사도 만나서 국정을 의논하고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안창호는 또 “임시정부가 구미 외교전의 실패로 내홍을 겪는 동안 만주 무장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주장과 노선은 매우 다양해졌으며, 이에 항일 역량을 총집결하여 민족혁명을 위한 유일당을 결성하고, 유일당을 최고혁명기관으로 삼아 독립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동지들은 안창호의 보고 내용을 인정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흥사단 실천 운동은 역시 “도산과 원동 흥사단 동지들의 결의에 보조를 맞춰 군자금을 보내는 것, 그것이 임시정부를 돕는 것이고 민족혁명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화답했다. 안창호는 중국으로 돌아가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결성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동지들은 ‘임시정부는 우리 동지들이 지켜나갈 것’으로 각오하자고 호응했다. 안창호는 동지들의 반응을 가슴 깊이 새기며 눈물을 참았다. ‘신성단결!’
한승곤 이사부장은 1925년 1월 1일 신년축하회로 제11차 흥사단대회를 개최한다고 공지했다. 대회장으로 안창호를 선임했다. 흥사단 신년대회는 로스엔젤레스 청년회관 대강당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열렸다. 39명의 핵심인사들이 모였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