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북미국민회 지도자 이대위
안창호는 이대위가 궁금했다. 이대위가 누구인가, 공립협회 시절부터 뜻을 같이해 오던 친구가 아닌가. 홍언이 이대위의 근황을 알려준 바 있었다.
이대위는 안창호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북미총회장직을 사임하고 중앙총회 사무장을 맡아 백일규 중앙총회장을 도왔다. 이대위는 강영소와 함께 임시정부 내무총장 지시에 따른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이승만 대통령이 상해로 부임하지 않고 워싱턴에서 외교활동에 치중하자, 이대위는 1919년 7월 말경 워싱턴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서재필을 회견하고 재미동포의 단결과 임시정부의 통합을 촉구했다. 이때 이승만이 공채표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자 이대위는 이승만에 승복했다. 마침 파리 외교에서 복귀한 김규식과 하와이 송헌주와 함께 구미주차위원부의 3인 위원으로 선발되어 재무위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국민회중앙총회는 애국금과 공채 갈등으로 중앙총회의 위상이 유명무실해질 것을 염려하여 구미위원부에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에 대한 온갖 허위와 과장된 정보들이 떠돌았다. 국민회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대위는 애국금과 공채를 같이 시행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가 이승만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이대위는 9월 23일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사퇴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복귀했다. 그 후 이대위는 서북미국민회에서 지지도가 떨어졌다. 이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게 되었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다만 샌프란시스코 감리교회의 목사직은 유지하였다. 이대위는 1922년 12월 북미지방총회 제14차 대의원회에서 중앙총회 폐지를 선언하고, 대신 북미지방총회를 대한인국민회총회로 개칭하여 관할 영역을 축소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3년 6월에 이대위의 큰딸이 갑자기 죽게 되자 개인적인 충격이 심했다. 그래도 이대위는 국민회 일이라면 충실하게 앞장섰다.
홍언의 보고를 들은 안창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탓이다. 애국금과 공채 갈등 때문에 김규식은 뇌 수술까지 받았었다.’
안창호는 1월 초 주일 날, 샌프란시스코 감리교회로 이대위를 찾아갔다. 소리 없이 방문해 교회당 예배소에서 그가 집전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대위는 안창호의 등장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예배가 끝나고 이대위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왔구려! 어디 보자. 도산도 몸이 많이 야위었소. 고생이 많았던 게야. 허허.”
안창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미국에 도착하면 자네부터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었네. 자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는가?”
이대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우리 사이는 여전한 게야. 도산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우리 만남을 허락하시는구려.”
“나에게는 예전에 살았던 미국이 아니더이다. 비자가 퇴짜를 맞다니. 감히 대한인국민회 대표였던 나에게 말이지. 하하. 브라이언 국무장관 시대가 지나서 그런가? 일본영사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말이네.” 안창호는 순간 비감에 젖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럼 어떻게?” 안창호의 예상치 못한 말에 이대위는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입국했냐고? 중국인 이름으로 했지. ‘엔, 창, 하오’ 하하하.” 안창호는 이대위의 심기를 달래기 위해서 과장되게 웃었다.
“자, 안으로 갑시다! 회포를 풀어야 하나, 아님 한풀이를 해야 하나?” 이대위가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앞장섰다.
“다들 자네 건강을 걱정합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게야?” 안창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네. 원래 당뇨에 심장이 조금 약했었거든. 자네가 부럽다네. 멀리멀리 어디로든 성큼성큼 행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네가 늘 부러웠지. 한인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는 자네를 보면서 ‘나는 책상물림이야.’ 하고 늘 자책했었고. ‘그래 그럼 공부라도 하자!’ 했던 게지.” 이대위도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 몸도 지금은 엉망이네. 대신 혼자 할 수 있는 명상 호흡법이나 기치료로 수련하고 있다네. 자네, 책상물림이라고 했나? 내가 청년들한테 ‘책상물림의 독립정신’을 얼마나 강조한다고! 상해에서도 청년들을 만나면 도미 유학을 권하곤 했지. 투쟁은 우리 세대가 할 터이니 너희는 근대 지식을 연마하라고. 그것이 광복 이후의 조국 번영을 대비함이라...!” 안창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소신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자리를 이동하여 이대위 숙소가 있는 서재로 들어섰다. 서쪽 벽면에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고 남쪽으로는 창이 나 있었다. 서재는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안창호는 잠시 기도에 몰두했다. ‘주여, 저희 조국과 어린양을 돌보고 있는 이대위 목사에게 건강을 허락하소서.’
이대위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을 꺼냈다. “내가 그때 왜 워싱턴까지 가서 이승만의 종이 되었겠는가. 그 일로 국민회에서 아직도 나를 규탄하고 있다네.”
안창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를 탓하는 소리는 못 들었네. 듣기로는 나와 이승만이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소리는 들었네. 사람들은 참으로 단순허이. 앞뒤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지.”
“자네에게 변명할 기회가 와서 하는 말이네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대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승만을 세워 임시정부를 통합하느라고 애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도산이다!’라고 생각했었네. 내가 자네를 모르는가? 황진남을 데리고 상해로 갈 때 자네가 권력을 탐했던가? 아니지. 여기서 성공했던 일들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나?”
“음, 그랬지.” 안창호는 이대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자네가 없는 미주에서는 이승만이 왕이었네. 자네가 국무총리 대리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아무 권한도 없는 노동국총판 자리를 고집한다는 소식도 한편으로는 섭섭했지만, 쾌재를 불렀지. 또 한 번 ‘과연, 도산이다!’ 했지. 하하. 자네의 깊은 속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겠더라고.” 이대위가 웃었다.
“하하, 그랬는가? 말도 말게. 그때는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대신 변명하느라 급급했었지. 결국, 단재를 잃었어. 아니지, 박용만도 잃었지.... 그랬는데 미주에서는 오히려 이승만과 내가 원수지간이라고들 하더군. 이승만과 나는 원수질 일이 없다네.” 안창호도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애국금과 공채금의 갈등이 별별 억측을 불러일으킨 게야. 나는 그때 임시정부를 통치하던 도산이 애국금을 공채금으로 전환해서라도 이승만을 임시정부에 수반으로 세우려고 하는 줄 알았지. 도산은 금전에 청렴하니까 이승만을 밀어준 것일 테고.” 이대위는 ‘도산이니까 이승만을 추켜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말도 말게.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어. 그런데도 통합내각 이후 이승만이 감당할 모든 화를 내가 당한 셈이라네.” 안창호는 하와이에서 자신이 이승만의 걸림돌로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이대위가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공채를 팔라는 명령을 받고 나와 김규식이 고생 많이 했지. 김규식은 파리 외교를 실패한 몫이라고 자책하더군. 그 일로 뇌수술을 받을 만큼 스트레스가 심했다네. 하지만 북미 한인사회는 도산을 대하듯 김규식을 도왔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만.”
안창호는 김규식 소식을 전했다. “김규식도 임시정부를 물러나 지금은 만주 무장세력과 조화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지.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고수하면서 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네. 그것이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어.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고, 나는 미국으로 오면서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재정난 때문에 임시정부가 내각책임제로 개헌할 듯하네.”
“그런가? 아무튼, 도산! 자네는 돌아갈 테지? 원동흥사단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입단했다고 들었네.” 이대위가 쓸쓸하게 말했다.
“미주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으니 고향이나 다름없지. 그러나 평양에 두고 온 모친과 큰형님 그리고 여동생 신호가 있는 그리운 고향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쉬는 시간도 호사겠지.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겠네. 이번에 가면 조국이 해방돼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안창호도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언제쯤이면 해방이 될까? 해방이 되긴 할까?” 이대위는 마치 안창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똑같은 소리를 했다.
“약한 소리 말게. 진짜로 아픈 사람 같으이! 복음 말씀처럼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쟁취해야지. 그것이 하늘의 뜻일 테니까.” 안창호가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1928년 6월 17일, 이대위는 결국 4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느님 품으로 갔을 거야.’ 중국에서 안창호가 추진하던 유일독립당이 좌우로 분열되고 있을 무렵이다. 이대위는 친목회와 공립협회로 인연을 맺은 동지들과 꾸준히 애국 활동을 했다. 안창호의 신민회 미주 조직책 역할을 했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박용만 총회장을 도왔으며, 최정익을 도와 『신한민보』 주필을 지내면서 「애국자성」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박용만이 하와이로 건너가 박상하의 후원으로 『신한국보』를 재창간하고 1912년에 이대위를 주필로 초청했으나 가지 않았다. 마침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담임이 공석이 되어, 양주삼, 윤병구에 이어 3대 담임 목사직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대위는 서거하기 전까지 이 교회에서 담임목사직 소명을 다했다. 이대위는 역사학 전공으로 1913년 5월 14일 자 캘리포니아대학 문학학사가 되었다. 한인 첫 졸업생이었다. 이대위는 박은식의 한문으로 저술된 『한국통사』를 국문으로 번역했고, 1915년에는 ‘한글타자식자기’를 개발했다. 흥사단 발기식 때는 목사로 안수식을 거행했다. 이 은총으로 흥사단은 1913년 5월 창단 이래 2021년 현재까지 100년 넘는 역사를 지키며 존재하고 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