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7 (상)

7화. 이승만과 서재필 방문 (상)

by 은명

7화. 이승만과 서재필 방문 (상)


1925년 봄. 체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해 이유필이 3월 18일자로 이승만 탄핵안이 가결되어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3년 국무령제로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안창호는 '결국, 그렇게 되었군' 했다. 머릿속으로첫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떠올렸다. 그러한 가운데 흥사단 본부로 7월 1일부터 보름간 호놀룰루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흥사단 대표파견에 관한 공문이 접수되었다. 이 회의는 미국에 있는 세계 YMCA가 설립한 태평양문제연구회에서 추진하는 비정치적인 민간대회였다. 이사부장 한승곤과 홍언 그리고 송종익은 흥사단 대표로 영어에 능한 김창세를 추천했다. 김창세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부임해 민간 대표에 적합한 인물로 추천되었다. 공문 말미에는 한국 대표들이 추천되었는데 한국YMCA 총무 신흥우,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 조선일보 주필 김양수, 연희전문대학 학장 유억겸, 보성전문학교 교수 김종철 등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140여 명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흥사단 동지들이 추천한 김창세는 마침 올해 1월, 미국 동부 메릴랜드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중위생학 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창세의 학위 논문은 「녹두콩에 대한 화학적 생물학적 연구」로, 수억 중국인의 공중보건위생과 단백질 섭취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창세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건학박사였다. 모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부름을 받아 세균학 및 위생학 조교수로 4월 말이면 귀국 예정이었다.

김창세의 근황을 알고 있던 안창호는 호놀룰루 본대회에는 서재필 박사를 국민회 및 흥사단 대표로 추천했다. 안창호는 대회의 의제가 태평양 지역 각 나라의 제반 문제를 다룬다고 하니, 서재필을 찾아가 부탁하겠다고 했다. 서재필 박사가 자신의 미국 비자를 위해 국무성에 직접 요청해 준 일이 있었기에,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분을 만나서 민족유일당 운동에 관한 의견도 들어야 한다.’ 안창호의 머릿속은 다시 바빠졌다.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다시 세우려면 민족유일당 구축이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일을 서재필 박사와 의논하고 싶었다.


안창호는 동부지방 순방길을 계획하며 한승곤과 의논 끝에 장리욱(1895~1983)을 동행인으로 선발했다. 장리욱은 1917년 8월에 흥사단에 입단하고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에서 기거하면서 흥사단 업무를 도운 경력이 있었다. 장리욱은 1918년 9월에 듀북대학에 입학하였고, 지금은 석사를 마치고 신현모와 같이 시카고 흥사단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신현모(1894~1975)도 듀북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9월 테네시주 링컨메모리얼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장리욱은 곧 뉴욕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을 밟을 예정이었다. 안창호는 시카고 흥사단으로 장리욱에게 전보를 쳤다.

안창호는 1925년 4월 15일, 시카고로 향했다. 시카고에는 강영소가 있었다. 홍언의 말에 의하면, 강영소는 사무처리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조율 능력이 탁월하여 신성단결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했다. 안창호가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로 활동할 때 북미지방총회장으로서 애국금을 모아 상해로 보내느라 고생을 많이 했고, 1922년에는 『신한민보』 편집장과 『독립신문』 하와이 지국장을 동시에 맡아 애를 많이 썼다고 했다. 또한 강영소는 1923년 동생 강영문, 강영상과 함께 시카고로 이주해 식당을 경영하면서 사업가로 성공했고, 흥사단 시카고 지부를 미 중서부에 뿌리내리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했다.


시카고에 도착한 안창호는 기쁜 마음으로 강영소 형제가 경영하는 식당, 디버시카페테리아(Diversey cafeteria)를 찾아갔다.

홍언의 연락을 미리 받은 강영소가 뛰어나와 안창호를 반겼다. “선생님, 제 식당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창호는 강영소의 손을 잡고 애칭으로 반겼다. “오, 창해 소년! 세월이 가도 여전히 미남이시오. 하하.”

“저의 필명을 기억하시는군요! 여기는 제 동생 영상이와 영문입니다.” 강영소는 활짝 웃으면서 두 동생을 소개했다. 강영상과 강영문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창호가 이들을 반기면서 말했다. “형제들이 모두 미남이시오. 하하. 맏형 영대 군은 잘 있소?”

강영소가 대답했다. “영대 형님도 머지않아 시카고 식당 사업에 합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안창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강영소와 형제들에게 말했다. “만주 독립군 강영열 군 소식은 참으로 안타까웠소. 1922년이지, 아마? 자유시 참변 이후 적군파 소속으로 잔류했지만, 이념 문제로 죽고 죽이는 꼴에 분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 말이오. 『신한민보』에서 접했소.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오. 이념대립은 앞으로도 큰 문제요.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민족해방도 어려울 터....”

강영렬은 이들의 7째 막내동생이었다. 강영소와 형제들은 고개를 숙여 잠시 침묵했다.

안창호가 침묵을 깨고 화제를 바꿨다. “여러분이 시카고 한인사회를 일으키고 지키며 시카고를 경영하고 있으니 참으로 든든하오. 흥사단에 청년 유학파들이 대거 입단하게 된 것도 모두 그대의 공이라고 들었소. 참으로 자랑스럽고 든든하오.”

강영소가 화답했다. “칭찬해 주시니 어깨가 더 무거워집니다. 선생님은 임시정부 살릴 궁리로 고생하시는데... 이렇게 잠시라도 지도자를 뵙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안창호가 웃었다. “참, 그대와 부인께서는 시카고 한인교회를 일으키고 있다고 들었소. 자랑스럽소.”

강영소가 말했다. “딸 단희가 병사한 후로 아내 혜순이는 교회 주일학교 활동에 온 마음을 다 쏟고 있답니다. 지금도 교회에 나가 있지요.”

안창호는 영소의 딸 단희 이야기가 나오자, 그 아이가 병사할 때 강영소의 처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데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부인도 큰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강영소에게 국민회북미총회장을 맡으라고 압박했다. 나는 강영소 부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안창호는 낮은 목소리로 강영소에게 말했다. “그때 내가 잘못했소. 용서하시오.”


강영소(1886~1934)는 식당 사업에 성공하여 1930년 말에는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를 창립했다. 그는 사업과 독립운동, 이 두 가지를 모두 훌륭하게 수행해나갔다.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을 설치하고 지국장을 맡았다. 대한의 일꾼. 창해소년, 미산소년. 강영소는 1931년 여름에 뇌혈관이 터져 우측 반신불수가 되어 3년을 앓다가 1934년 8월 26일 4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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