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7 (하)

7화. 이승만과 서재필 방문 (하)

by 은명

7화. 이승만과 서재필 방문 (하)


안창호는 흥사단 시카고분회 단소를 방문하고 장리욱을 동행하여 동부지방 순회에 나섰다. 필라델피아, 뉴헤븐, 보스톤, 풀리버, 워싱턴 교포사회를 순회했다.

안창호는 서재필 박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뉴욕에 머무르고 있는 이승만을 찾아갔다. 그가 임정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탁핵되었고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안창호는 미주에서 떠돌고 있는 악성루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이승만과 나는 원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청년 시절, 배재학당 협성회 토론회에서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가 『협성회 회보』를 창간했고, 주필이라고 해서 평양 촌놈이 마치 무슨 주인공을 보듯 설레던 때가 있었다. 독립협회에서 서재필 박사와 함께 있는 두 사람의 친교를 먼발치에서 부러워했었다.

이승만(1875~1965)은 양녕대군 16대손이다. 그런 그가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항의 시위를 주도했고, 1899년에는 고종폐위 박영효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탈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 『청일전쟁기』 등을 저술했다. 러일전쟁 시기인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오자, 이에 반대하는 옥중투쟁을 벌였다. 이때 박용만과 정순만을 만나 ‘3만’ 의형제를 맺었다. 1904년 8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905년 도미 유학에 올라 5학기 동안 조지워싱턴대학에 다녔다. 1907년 2월 하버드 대학원을 다니다가 1910년 프린스턴대학원으로 진학하여 7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린스턴에서 윌슨을 만나 교유했다. 그의 박사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다. 안창호는 이승만을 두고 ‘남다른 지식인’으로 예우해왔다.


안창호는 한성임시정부와 상해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최고 수반으로 인정한 부분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를 지지했다. 뽑을 사람을 뽑았다고 인정했다. 안창호는 이승만을 위해 한성의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제로 개정하고, 이동휘 국무총리를 모셔와 노령을 설득하면 통합이 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일을 추진했고, 성공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북경과 노령국민의회 인사들 일부는 안창호를 이승만의 추종자로 대하고 있었다. 안창호가 미주국민회 대표로서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실력양성론을 따라 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주에서는 반대로 ‘안창호가 이승만의 건 건을 방해하고 야심을 채우려 한다.’라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안창호는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수행원 장리욱을 별채에 머물게 하고 이승만을 독대했다. 이승만은 안창호를 반겼으나 곧 임시정부에 대해서 비난의 소리를 퍼부었다."나를 탄핵했다지? 위임통치 청원건이 탄핵 사유인가? 몹쓸 것들. 이동휘가 위임통치 청원 때문에 나더러 썩은 대가리라고 했다지? 내가 일본의 가혹한 압제를 세계에 알려서 벗어날 수 있다면 위임통치가 일시적 외교 방법이라고 본 것은 사실이네. 그러나 도산도 그렇겠지만 우리가 나라를 미국에 바치자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인가? 아니지. 그런데 박용만이 신채호와 어울려 그랬다지? 이완용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미국에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다고. 이런 분위기에서 나를 대통령이라고 불렀으면, 최소한 대통령의 예우는 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자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산이 애를 많이 쓴 것은 누가 뭐래도 내가 아네. 하지만 이동휘? 이동휘는 레닌 지원자금을 선취해 놓고 시침을 떼며 임정의 대통령중심제를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자고 억지 핑계를 댔지. 나도 레닌이 약소국 해방을 지원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건부 차관을 제의할 계획으로 이희경과 안공근을 특사로 보낼 생각이었네.”

이승만은 쌓아두었던 분노를 여과 없이 안창호에게 드러냈다. 이동휘가 사퇴한 후 국무총리에 마땅한 사람을 천거하지 못하는 이동녕, 이시영에게도 실망했다고, 추진력도 없는 그들과 함께 어떻게 국제무대를 상대로 외교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해 왔다. 안창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극도로 치솟아 올랐을 때는 경청이 최선이다.’ 이승만의 감정이 다소 누그러지자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로 임시정부를 수습해 보려고 했으나 개조파와 창조파가 갈라져 결국 무산되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국민대표회의가 깨진 이유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반국가단체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안창호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 임시정부가 탄핵했는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대꾸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한참 만에 이승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구미위원부 중심으로 외교활동을 하겠네. 이시영이 구미위원부를 해산하라고 했다지? 공채금 때문에? 이런 줏대 없는 영감 같으니라고. 나는 내 방식대로 비폭력 외교 노선으로 독립운동을 할 것이야.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테지. 미국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나는 ‘마이 웨이(my way)’네. 광복군을 잘 키우시게. 언젠가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날이 오겠지. 도산도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게 아닌가?” 안창호는 이승만이 쏟아내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일독립당이라고 했는가? 이당치국이 되겠는가? 더구나 만주 무장세력의 군사력을 믿을 수 있는가? 바람일 뿐.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소련에 반대하네. 좌우합작은 불가하다는 뜻일세.” 이승만은 마지막 말을 결론으로 못을 박았다.


안창호는 이승만 숙소를 나오면서 ‘마이웨이’를 읊조렸다. ‘마이웨이.... 독선이나 영웅 심리가 아니길 빌어야지. 함께 가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이 진리를 꿰뚫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반대한다. 무장투쟁노선도 반대다. 그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이당치국으로 민족혁명을 하자는 설득은 어렵다. 어쩌면 각자 소신대로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운명의 순간을 맞게 되겠지.’

안창호는 면담 내용을 궁금해하는 장리욱에게 침묵했다. 장리욱은 이 만남을 공식적으로 ‘안창호와 이승만의 뉴욕회담’이라고 업무일지 기록으로 남겼다.


안창호와 장리욱은 예정대로 5월 22일, 필라델피아로 서재필 박사 방문길에 들어섰다. 안창호가 장리욱에게 말했다. “나는 서재필 박사 대면은 처음이라오.”

“네?” 장리욱은 의외라는 듯이 안창호를 쳐다보았다.

안창호는 회상에 젖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서재필 박사를 하루도 빠짐없이 따라 다녔소. 그분의 토론회, 그분의 강연회, 그분의 독립신문을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었지. 내가 존경하는 인물 3인 중에 한 분이오.”

장리욱이 물었다. “아, 독립협회 때 이야기군요? 다른 두 분은 누구십니까?”

“나를 깨우쳐준 분은 또 있지. 유길준, 유억겸의 부친. 그리고 필대은이오.” 안창호가 말했다.

“유길준 선생은 『서유견문』 때문이고, 필대은은 누구신지요.” 장리욱은 궁금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 서당을 같이 다녔소. 서당 형님. 참으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소. 그분과 나는 평생 선후배요. 내 그분 덕에 나랏일에 깬 사람이 되었으니까.” 안창호는 필대은을 늘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모셔둔 사람. 그분을 닮고 싶었다. 그분처럼 젊은이들을 대하고 싶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인생의 참행복은 역시 참된 관계에서 샘 솟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 마르지 않는 기억 속의 옹달샘처럼요.” 장리욱은 안창호가 부러웠다. ‘나는 지금 바로 옆에 도산이 우뚝 서 계시다!’

“시인 같이 말하는구려! 하하.” 안창호는 마음이 맑아졌다.

“서재필 박사는 독립협회 이후 지도자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계신듯한데....” 장리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세도 있고, 지도자 이승만도 있고 하니 뒤로 물러서신 것이 아닌가 하오. 나랏일에 관여하다가 험난한 꼴을 많이 당하셨고. 그러니 그분더러 독립운동 전면에 서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사실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우리가 해야지. 그런데 우리는 힘이 많이 달리오. 선각자로서 가끔 나서주셔도 큰 힘이 될 것인데... 이번 일도 그분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믿소.” 안창호도 서재필 박사가 어떤 답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시내 부동산신탁빌딩 1092호 사무실에 있었다. 강영소가 귀뜸해 준 정보에 의하면 서재필은 유일한이 설립한 회사의 필라델피아지사 지사장이었다. 유일한(1895~1971)은 미시간대학을 나와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과 석사를 하고 스탠포드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상과와 법학을 두루 공부한 재원이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 식품을 취급하는 무역회사를 설치하여 큰돈(50여만 달러)을 벌었다. 한국 물품(숙주나물)을 수입하고 미국의 약품과 화장품 등을 국내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유일한은 서재필이 경영하던 문구류와 인쇄업이 파산한 것을 알고, 그 사정을 고려해 필라델피아지사를 설치했다. 상해에 있던 이희경을 이곳에 전무로 불렀고, 정한경이 부사장이라고 했다. 정한경, 이희경, 유일한 모두 박용만의 제자들이었다. 박용만은 1904년 이들을 데리고 도미 유학하여, 네브라스카주 커니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했다. 박용만과 이승만이 결별했을 때, 이희경은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를 도왔고, 정한경은 미국에서 이승만 편에 섰다.


사무실을 노크하니 이희경이 나왔다. 이희경은 안창호를 보자 반색했다. “내무총장 각하, 이렇게 뵙다니요! 어서 들어오세요.”

안창호도 반가웠다.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재건하고, 간호사를 양성하고 얼마 후 이희경은 도미하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조그만 병원이라도 차려야겠다면서 돈을 벌어 임시정부를 후원하겠다고 했었다.

“오, 희경 동지를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군요.”

안쪽에서 서재필이 걸어 나왔다. “오, 도산, 도산께서 오셨구려! 반갑소!”

안창호는 먼저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한 뒤 손을 맞잡았다. “박사님, 드디어 제가 박사님을 마주하는군요. 감격스럽습니다.”

서재필이 말했다. “나는 도산 소식을 늘 듣고 있답니다. 뭐든 도산 일이라면 경청하고 있다오.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요. 예까지 날 찾아주다니 내가 사는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 미국 비자 대신 중국인 여권을 만들어 왔다지요?”

서재필은 1921년 9월에 도산이 미국방문을 희망하여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1922년 11월에 미 국무성으로 찾아갔던 일이 생각났다. ‘내 중재와 설득도 헛수고였지.’ 서재필은 안창호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 행세보다는 중국인 행세가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허허.” 안창호가 그때 일에 감사하며 말했다.

서재필이 말했다. “이쪽 동네는 기호 출신들이 많소. 서부와는 다르지. 나라가 없어졌는데도 계파 잔재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소. 상해로부터 전해 오는 모든 소식은 도산에게 집중되었더이다. 대부분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오. 도산이 마치 이승만과 겨루기라도 하는 모양으로 험담을 늘어놓곤 합디다. 내가 그렇게 뭐라고 나무라도 소용없더군. 타지인 미국에서조차 그런 모양새니 통일해서 독립하려면 갈 길이 멀게 느껴지오. 이러다가 독립이나 되려는지....”

안창호가 덤덤하게 말했다. “진실은 밝혀질 터이지만 독립의 때를 놓칠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서재필은 안창호를 격려했다. “임시정부를 통합한 것은 역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될 것이오. 이승만이 너무 늦게 부임했어. 이승만이 도산을 국무총리나 내무총장으로 임명했다면 상황은 좀 더 나아졌을 테지만 도산이 노동국총판을 고집했다지? 이승만이 외교에 집중하고 도산이 살림을 살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소. 지금 이승만계는 임시정부 파산의 핑계를 찾다 찾다 도산에게 한풀이하고 있는 형국이오. 쯧쯧.”

안창호는 감동했다. ‘이분은 상황을 정확하게 내다 보고 있다.’

“박사님 말씀에 많은 위로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독립이니까. 독립은 하늘의 명이니까. 독립이 오면 모든 잘잘못과 오해는 다 옛말이 될 터이니 저는 독립운동에 매진코자 합니다.”

“그렇소, 역시 도산이오. 도산의 내공은 나도 부럽소이다. 도산을 보면 링컨이 생각납니다.” 서재필은 안창호를 아끼고 있었다.

안창호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링컨을 넘볼 지도자 깜냥은 못 되지만 지도자를 찾아 섬기는 데는 이력이 나 있습니다.”

“방문 기간 연장은 하셨소? 서북미도 도산이 챙길 일이 아주 많을 터인데.... 흥사단은 단단한 조직이라고들 합디다. 도산의 노선을 지지할 테지요. 나도 그렇소. 나도 도산이 추진하는 이당치국 노선을 지지하오. 세계는 아마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점점 깊어질 테고, 중국에서 추진하는 독립운동은 미국 분위기와는 다를 테니.... 음, 나는 도산이 추진하는 방향이 옳다고 믿소. 민족혁명의 전략들을 잘 수립해 주기 바라오.”

서재필은 진지하게 말했다.

안창호는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얼어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박사님께선 역시 한국 유신의 아버지이십니다. 독립과 혁명의 두 개혁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지지해 주시니 제가 힘닿는 한껏, 분투 쇄신하겠습니다!”

안창호는 서재필 앞에서는 그저 청소년 시절 스승 앞에 앉은 제자와도 같았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장리욱은 이때 두 사람의 모습을 그의 회고록에 남겼다. <일찍부터 민족의 혁신운동을 위해 몸 바쳐온 두 지도자는 서로 의지가 상통하였고 인격을 존중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통하는 뜻과 정이야말로 민족 지도자들의 본보기가 되고도 남았다.>


안창호는 서재필 박사에게 7월 1일부터 호놀룰루에서 개최 예정인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 국민회와 흥사단 대표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재필은 흔쾌하게 수락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로스앤젤레스 흥사단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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