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8/10

8화. 시카고 순방

by 은명

8화. 시카고 순방

1925년 6월 17일, 안창호는 한인학생대회에 초대를 받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을 방문했다. 마침 의학부 4학년에 편입학하여 정형외과 인턴과정을 하고 있던 이용설을 만났다. 이용설(194/1895~1993)은 도산 방문 소식을 듣고 대학 입구까지 뛰어나와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용설을 한눈에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을 여기서 뵙다니요.” 이용설이 뛰어오면서 말했다.

“내 그대가 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그래 잘 지내시오? 북경보다 환경은 훨씬 더 좋을 테지.” 안창호는 순간 임시정부 북경특파원 시절에 만났던 이용설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 선생님이 ‘일본인을 능가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시지요?” 이용설은 마음이 들떴다.

“그럼 그때 내 말을 곧이듣고 이 길로 들어섰던 게로군. 정형외과 인턴과정을 마치면 의학박사가 된다고 들었소. 졸업하면 세브란스로 간다고 했소? 참으로 장하오.” 안창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요즘 들어 인생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부쩍 들었습니다. 그때 북경에서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저는 내심 의학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사회주의 연구모임에 가입하거나 의열 투쟁단 선택을 놓고 고민하던 때였지요. 선생님께서는 진지하게 저의 고민을 다 들으시더니 결론을 내주셨지요. ‘독립투쟁의 길은 여럿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던 최적화된 길이란 없다. 인연에 따르거나 본인 의지에 따를 뿐이다.’ 그리곤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그 길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이용설은 그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오, 북경 생각이 나오. 협화의과대학의 사회과학연구회. 그때 미의원단이 동양을 방문한다고 해서 이슈를 만들어 내려고 국내 작탄 거사를 도모했었지. 돌이켜보니 구국모험단 청년들의 희생이 너무 컸소. 안경신 생각이 많이 나오. 그녀도 그때 유학을 보냈어야 했어.”

안창호는 홍십자 병원 시절 자신을 호위했던 안경신의 앳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장덕진, 박태열과 국내 거사의 한 조였지.’

“그때 선생님은 유격 전술도 외교전의 한 수단임을 강조하셨지요. 당시 구국모험단 청년들의 각오와 준비 또한 철저했고, 그 모든 상황을 선생님이 꼼꼼하게 챙겨 지시하셨지요. 거사에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잣대는 불필요하다고. 다만 용기 있는 행동 그 자체가 독립운동의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용설은 당시 선생님의 진지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네. 흥사단의 무실역행 충의용감은 바로 그런 뜻이지. 허허. 사태를 주시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용기를 갖고 행동하자는 것이지. 일본은 너무 강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안창호는 청년들의 마음이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시카고에 계시는 동안 저에게 서약문답을 해주십시오. 다른 몇몇 친구들 입단도 주선해 보겠습니다.” 이용설은 오천석을 떠올렸다.

“좋소. 유학생들을 만나 봅시다.”

이용설은 수행원 장리욱에게 “허둥지둥하던 유학생들의 심장에 한 줄기 밝은 빛을 주셨고, 기쁨을 금할 길이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안창호는 노스웨스턴대학 유학생대회에 참석했다. 유학생회와 한인사회의 초청이었다. <우리 주의 정신과 사업 진행>을 주제로 연설하였고 이어 토론을 벌였다. 안창호는 환영 연설에서 임시정부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이를 반성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교와 단결에 실패한 경험들은 값진 교훈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안창호는 이후의 비전과 대안을 밝히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족혁명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민족혁명은 철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가 요구되며 우리 민족의 공기가 따뜻하면 성공이 빨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창호는 지난 6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상에 알려졌고, 국내외 동포들이 임시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으니 어떻게든 임시정부를 살려내야 한다면서 남아 있는 생명을 민족혁명을 위한 임시정부 사업에 바치겠노라고 했다.

당시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생이었던 오천석은 “도산의 겸허한 태도와 중후한 음성과 신사다운 용모에 호감이 생겼고, 그의 인격과 경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회고했다. 오천석은 이용설과 함께 안창호와 3일 밤을 지내면서 흥사단 정신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안창호의 문답과 그 이론의 정연함에 감동하여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오천석(1901~1987)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1월에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후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때 상해로 피신했다가 해방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백낙준, 이묘묵, 류형기 등과 활동했다.


시카고 방문으로 안창호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내친걸음에 위임통치청원서 건과 관련해서 정한경도 만나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한경(1890~1985)은 현재 필라델피아 회사에 있지 않고 업무차 시카고에 와 있었다.

안창호는 정한경을 만났다. 정한경은 자신이 작성한 ‘위임통치청원서’ 문건이 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다만 자신에게 조언해준 미국인 교수를 신뢰하여 위임통치에 신념을 갖게 되었고, 이승만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동의했다고 회상했다. 정한경이 상해 소식을 전해 듣고 판단하기로는 상해 임시정부 분열의 원인은 결국, 위임통치 문제가 아니라 계파 간 권력다툼이라고 했다. 정한경은 데라우치 말대로 우리 민족혼이 말살되느니, 일본에 저항하려면 차라리 자치권이나 위임통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라며 신념 있게 말했다. 안창호는 자치론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인지 반론을 펼쳤으나 정한경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한경은 미국 내에도 위임통치에 동조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며 이들은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도산이 상해에서 건건이 이승만의 통치를 방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도산이 상해로 가더니 공산주의자로 물들었다.’라며 악의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했다.

안창호는 씁쓸했다.

정한경은 임시정부가 위임통치 문제로 분열되자 1921년 6월 13일 독립신문사로 해명서를 보내왔던 일이 있다. 정한경의 해명에 따르면 위임통치청원서는 정한경 본인이 작성한 것이다. 이 문서의 요지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고문정치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문서는 <동아시아의 일본팽창을 견제하고 장차 미국의 경제이익을 위한 한국과의 문호개방정책을 위해서, 미국은 한국의 일본 통치로부터 완전독립을 보장하여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임시 조처를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정한경의 문건을 검토한 이승만은 한국의 3.1 독립시위 탄압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행위를 규탄하고 이에 대해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해 달라고 덧붙였다. 정한경은 이 청원문을 1919년 3월 3일 미국 정부에 공식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안창호는 동행하고 있던 장리욱에게 정한경의 위임통치 문건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장리욱이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사안을 미국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약소국의 개인이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지요. 인맥이 때론 통할 수도 있다지만 그건 영웅 심리일 뿐, 무책임합니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남 탓이 되는 거지요. 정한경은 이 문제를 국민회 중앙총회에 공식안건으로 제출했어야 합니다.”

안창호는 감탄했다. “오호, 그대 말이 옳소. 그런데 말이오, 상해에서는 이승만도 정한경도 모두 대한인국민회 사람들이니까 총회장인 도산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오. 이런 사정에 김규식, 노백린도 자유롭지 못하다오.”

장리욱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일을 만든 사람은 정한경 개인인데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이 짊어진 셈이군요. 그러고 보면 건전한 인격이 신성한 단체를 만든다는 흥사단주의는 진리입니다.”

안창호는 장리욱이 든든했다. “흥사단주의! 신성한 단체가 힘을 갖는 것은 진리요. 만일 정한경이 이 문제를 중앙총회의 공식안건으로 제출했다면 어떤 결론이 났을까?”

장리욱이 말했다. “국민회중앙총회의 결론은 명백했겠지요.”

“어떻게?”

“위임통치안은 그 자체가 불합리합니다. 미국은 사실상 관심 밖이었을 테고, 국민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전통과 민족혼은 결국 상처를 입게 되고요. 이중적인 혼란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장리욱은 위임통치안을 불법으로 간주하며 말했다.

“오, 그렇소? 동감이오. 새로운 식민지가 되는 것이지. 혹 새로운 지배가 달콤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통 회복에 독소가 될 터이니 진정한 해방은 또 다른 시련에 봉착하고 말 것이오.”

장리욱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위임통치는 자치론과 같고, 이는 결국 지배국에 참정권을 구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힘을 길러 되찾지 못하면 독립은 절대 불가합니다.”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며칠 후, 안창호와 장리욱은 강영소와 작별하고 시카고를 벗어나 콜로라도 덴버로 향했다. 강영소는 덴버에서 사업에 성공한 이재수와 신광희의 근황을 알려준 바 있었다. 안창호는 이들에게 큰 빚이 있었다. 상해 폭발 사고 비용처리를 흔쾌하게 도와준 은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윌로스 비행학교 재무를 담당했던 의인들이다. 신광희는 멕시코 이민 출신으로 벼농사에 성공했고, 사업 수완이 남다른 귀재였다. 그는 늘 안창호를 후원했다. 이재수는 안창호가 미주에 처음 정착할 때부터 공립협회, 대한신민회 발기,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 등 거의 모든 일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창호는 이재수 형님 이야기를 장리욱에게 쏟아내며 ‘언제 다시 신광희와 이재수 형님을 만나겠는가? 그러니 이번 기회에 꼭 만나서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라고 다짐했다.


장리욱은 이들의 만남을 감동적으로 지켜보았다. ‘이들은 의형제나 다름없다. 도산은 사람 부자다. 결코, 외롭지 않은 분이다.’ 동북부지역 교포순방을 마치고 7월로 접어들자 안창호와 장리욱은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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