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김정혜 / 서울대학교 협동과정도시설계학전공 박사과정
노후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에는 펄럭거리는 추리닝에 안경을 끼고 동네를 돌아다닐 때가 많다. 예전엔 불편했을 이 모습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노후 아파트 단지로 이사 온 후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초·중·고등학생이거나 중·장년층이다. 내 또래는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대부분 아이를 둔 신혼부부다. 서울 중심지에서 흔히 보이던 ‘예쁘게 꾸민 힙한 젊은 층’을 여기서는 만나기 어렵다. 이것이 서울과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다.
사실 서울에서는 2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의 사람들을 가장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과 고령자의 경우, 대치동 학원가나 암사역 인근, 을지로 골목처럼 주로 마주치는 공간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광명의 아파트 숲, 특히 이 노후 단지에서는 내 또래가 더욱 드물다.
그러다 보니 꾸미거나 멋을 낸 사람도 확연히 적다.
최근 들어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 또래가 모이는 공간에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무의식 중에 자신을 꾸미고 드러내려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관리하고 꾸미며 스트레스를 푸는 성격이라 믿었다. 예전에는 집 앞에 잠깐 나가거나 헬스장·공원에 운동을 갈 때도 대충 나간 적이 없었다. 운동복을 입어도 알록달록한 색으로 위아래를 맞춰 입는 것이 즐거웠고, 바쁜 시기에도 어느 정도 차려입는 것이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주고 삶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즐겼기에 그 습관이 어떤 의도가 아니라 내 성향 자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사를 온 후에는 펄럭거리는 추리닝을 입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심하면 머리도 대충 빗고 안경만 낀 상태로 동네를 돌아다닐 때가 많다. 예전에는 꽤 불편했을 모습인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예전의 모습이 정말 내 성향이 아니었던 걸까?' (이사 온 지 기껏해야 3개월 차라 아직 이르지만 말이다.)
지금의 수수한 모습이 사실 더 자연스러운 ‘나’인데, 이전 환경이 꾸미고 정제된 모습의 ‘나’를 만들어 놓았고 나는 그걸 편하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나조차도 의아한 부분이다.
반대로 지금 동네에서는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데도 꾸미고 나가면 과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운동복을 고를 때도 시선이 신경 쓰여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덕분에 옷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문득 예전에 크로스핏에 갔을 때 느꼈던 비슷한 감정이 떠오른다. 다들 검은색의 펄럭이는 운동복을 입는데, 나만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의 휘황찬란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그전까지는 휘황찬란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는데, 크로스핏에 처음 다녀온 후 그렇게 느껴졌다). 한 번 출석한 후 스스로가 너무 튀고 이상한 사람 같아서, 그 이후로는 집에 있는 가장 어두운 운동복들을 골라 입고 나가곤 했다. 결국 운동할 때마다 파이팅과 기합을 외치는 문화를 적응하지 못해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말이다.
잊고 있던 그 기억이 이사로 인해 다시 떠올랐는데, 그때와 지금의 기분이 묘하게 비슷하다. (이제 알록달록한 운동복들은 학교에서도 못 입고 동네에서도 못 입고… 옷들을 버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이곳의 분위기 덕분인지 편하게 다니는 시간이 많아져 시간도 여유로워지고, 꾸미는 일이 줄어들어 절약도 하게 된다. 그 습관이 이어져 학교에서도 맨얼굴에 수건 재질의 추리닝을 입고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공간의 이동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이다.
내 변화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대학교 시절부터 거쳐온 공간들을 되짚어 본다.
대학 및 인턴 시절: 신촌역, 건대입구
대학원 석사 시절: 강남역, 논현역, 가로수길, 뱅뱅사거리 (이 시기에는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강남 일대를 유목민처럼 옮겨 다녔다.)
석사 졸업 후 직장인 시절: 삼전역(잠실), 암사역(천호), 삼성역
돌이켜보면 대부분 서울, 그중에서도 번화가 인근이었다. 심한 경우 문을 열면 바로 상권이 펼쳐질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내가 필요한 인프라는 여기 다 모여 있다”는 일명 ‘인프라 자부심’이 생겼고, 사람 구경을 좋아하고 활발한 도시의 리듬을 즐기는 나에게 그 환경은 더할 나위 없었다.
특히 강남에 살 때는 약속이 잡히면 집 앞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에 약속을 두세 번 잡아도 블록 하나만 이동하면 될 정도라 이동 시간이 거의 들지 않았고, 대부분의 모임이나 스터디도 걸어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예전에는 하루 이동 시간이 길어야 1시간이었지만, 지금은 2~3시간으로 늘었다. 운전을 하며 존다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칫하면 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조심하는 중이다. 또 걸어서 가던 거리를 차로 이동하니 주차비 걱정도 늘었다. 예전에는 굳이 이동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이 집 주변에 있어 좁은 집이라도 주로 동네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어차피 운전대를 잡아야 하니 부가적인 일정을 몰아서 처리하고 나머지 날엔 학교에 남아 새벽까지 작업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종의 강제적인 순기능이랄까.
물론 장점도 확실하다. 예전에는 서울 중심상업지에 살았지만, 블록 단위로 보면 실제 거주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반면 지금은 아파트 단지만 2만 세대에 달하고, 인근 단지들까지 이어진 거대한 ‘아파트 숲’ 한가운데에 있다. 게다가 30년 넘은 노후 도시라 생활 인프라가 꽉 차 있고 선택지도 훨씬 다양하다.
서울 중심지의 ‘감성 카페’나 ‘인스타 맛집’은 없지만, 대신 운동시설, 대형 마트, 피부관리 숍, 네일 숍, 오래된 맛집 등 생활 밀착형 시설들이 즐비하다. 단지 내 상가나 중심 상가마다 비슷한 시설이 여러 개 있어 선택권이 넓고, 가격도 서울의 60~70% 수준으로 저렴하다. 덕분에 생활비인 거주 비용이 낮아졌다.
생활 인프라를 넘어 ‘자연 인프라’를 이야기하자면, 아파트와 함께 나이 들어온 나무들이 이제는 제법 울창하다. 여름에는 그늘이 되어주고, 겨울에는 찬 바람을 막아주는 이 나무들이 참 고맙다. 훗날 재건축이 되더라도 이 나무들만은 그대로 남거나 옮겨 심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낭만만 있는 건 아니다. 예전에 ‘집을 사겠다’며 돈을 아끼던 시절, 중소기업 청년 대출을 받아 들어간 암사역 인근 8,500만 원짜리, 40년 넘은 다세대주택에 살 때도 춥고 덥고 어두웠다. 그 후 살았던 빌라는 실내에서 외부 온도를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단열이 완벽했는데, 지금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현재 사는 곳은 36년 된 복도식 아파트, 그것도 복도 가장 끝집이다. 중앙난방이라 아침저녁으로 꽤 춥다. 베란다와 현관문을 열어두면 빛이 잘 들고 맞바람이 불어 쾌적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스스로 온도를 조절할 수 없는 구조라 각 방에 작은 난방기구를 두고 버티고 있다.
그리고 전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사 온 시기가 지난 25년 중 가장 더웠던 여름이었다. 뉴스에서는 “전기 용량이 부족하니 에어컨을 틀면서 세탁기 등 다른 가전을 동시에 쓰지 말라”는 안내가 반복됐다. 경기도 노후 단지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여름철 ‘전기 용량 초과’로 아파트 한 동 전체가 정전되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물론 밤 10시부터 새벽 4시 사이에는 자리가 부족하다. 그래서 요즘은 굳이 주차 라인 안에 차를 넣으려 애쓰지 않는다. 이중 주차 후 기어를 중립에 두거나, 아예 학교에서 밤새 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이것 또한 노후 아파트 거주자가 터득한 생존 요령이다.
이렇게 보니 이사 후의 모든 환경이 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제 꾸밀 생각도 말고, 집 주변에서 대충 일할 생각도 말고, 학교 가서 연구에나 똑바로 집중하려무나.”
도시관측챌린지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 잊힐 수 있는 이 노후 아파트 정착기를 꼼꼼히 기록하게 된다. 지금은 별것 아닌 일상 같지만, 훗날 돌아보면 이곳이 인생의 소중한 전환점이자 청춘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 챌린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시간을 이렇게 세밀히 남겨두지 못했을 테니, 매번 힘들게 챌린지를 채우러 오면서도 글을 쓰고 나면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나를 행동하게 하는 트리거, 도관챌 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