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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사람들, 돌과 바위

by 도시관측소

Written by 문주원

전문 전체보기는 https://brunch.co.kr/@manilmoon/ 이곳에 있습니다.



남해 사람들


남해 사람들은 명함을 두 개 이상씩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남해에서는 N잡이 일상화되어 있다. 다들 꿈을 찾아 남해로 왔지만 정작 생계 해결이 되지 않아 생계를 위한 일 하나 이상에 자아실현을 위한 일을 따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도시 대비 수입이 크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농사를 짓는 친구 다형이는 촬영보조나 온갖 힘쓰는 일을 돕는다. 마찬가지로 농부가 직업인 필주는 부업으로 펜션 청소를 한다. 책방을 운영하는 수진도 숙소 청소를 부업으로 했고, 팜프라와 협업으로 문화행사를 기획한다. 연극도 하고 연기도 하고 인형도 만드는 공희는 읍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날로와 민채는 카레집을 운영하며 각자 연구소 일과 디자인을 한다.


나 또한 N잡의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건축사사무소 소장이지만 글도 쓰고, 인테리어 디자인도 한다. 그리고 가끔 시간이 맞을 때에는 아난티에 가서 청소를 한다. 육체노동을 처음 해본 것은 작년 여름 팜프라에서였는데, 하루에 서너시간씩 집중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노동이 생각보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생각은 자연스레 정리된다.


귀촌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이렇게 수입이 없어도 되나 걱정하다가 남해군에서 운영하는 구인구직 게시판을 둘러봤는데, 아난티의 일당 9.5만원에 홀린 것이다. 내 돈으로 갈 일 없는 고급 호텔을 무려 돈을 받으며 구경할 수 있고, 언젠가 스테이 사업을 해보고 싶으니 관리하는 것도 한번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사나흘만 일하면 일단 월세는 해결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루에 7~8시간을 육체노동을 하며 보낸다는 것은 서너 시간 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도의 노동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팠다. 지난 달에 3일 정도 일하고 또 연락이 없어 언제 또 갈 수 있으려나 생각하는 중인데, 왠지 다음에는 더 빠르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지식노동과는 다른 종류의 일을 적당량 병행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것이 좋다. 함께 청소를 하는 분들은 중노년의 베테랑 이모님들인데, 청소를 하며 경남 사투리 리스닝 실력이 늘었다. 아, 그리고 아난티는 내가 남해에서 유일하게 익명성을 보장받는 곳이기도 하다. 다들 이름은 알지만 굳이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아난티에서 이틀 정도 일한 후에 팜프라 유정 님이 여는 ‘두모작은영화관’에서 영화를 함께 봤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행사다. 이날 본 <퍼펙트 데이즈>는 일본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의 일상을 브이로그처럼 보여주는 영화였다. 여러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꼼꼼하게 청소를 하며 묵묵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그 사건사고들을 복기하며 웃는다. 남해에는 스스로가 육체노동자이거나 그 친구가 육체노동자인 경우가 많아, 모두가 영화에 몰입해 보며 동시에 평화로운 마음을 느꼈다.


도시에서 육체노동자가 지식노동자보다 낮은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육체노동의 존재가 보이지 않고 가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노동자들은 건물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새벽에 모든 청소를 끝내고 사라진다. 심지어 백화점에서는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택배노동자들은 면대면으로 물건을 전달하는 일이 드물다. 식재료는 누가 키웠는지도 모르고 식탁에 올라온다. 모두가 육체노동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며, 몸을 움직이는 온갖 일은 외주화되기 쉽다. 하다못해 집안 청소까지 외주를 준다.


그러나 남해에서는 모든 것이 가까이 보인다. 사람이 귀한 만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의 삶에 조금 더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나의 삶도 더 쉽게 알려진다. 모두가 평화로운 풍경 속에 있지만 생존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누구보다 서로를 응원한다. 직업의 귀천에 대한 편견이 자리하기에는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미국의 사회학과 교수 리처드 세넷은 저서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계획가와 건축가의 역할이 복잡성을 장려하여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게 하여 경험을 확장하고 실험할 수 있게 하면 보다 안전하고 창조적인 도시가 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나와 비슷한 학력, 경력의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이곳 남해에서는배경도, 지식도, 경험도 모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건축이, 도시가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는 경험을 불러일으키려면 어떤 형태로 자리해야할까? 열린 공간, 작은 지역, 익명성 없는 도시가 해답일까?



돌과 바위


두모마을 중앙에는 보호수가 있는데, 그 위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두꺼비 바위가 있다. 두꺼비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정말 그 크기의 위용이 굉장하다. 대체 이 커다란 바위는 어디서 온 걸까. 고개를 들어보면 꼭대기에 바위가 희게 빛나고 있는 금산이 보인다. 마치 금산에서 이 바위가 데굴데굴 굴러와 마을에 안착한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아무튼 꽃별테마공원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마찬가지로 바위다. 길에 간섭되는 건 제법 많이 폭파시켜 없앴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바위들도 많고 규모도 크다. 두꺼비 바위는 길의 끄트머리에 있어서 단독으로 이정표 역할을 한다면, 공원에 있는 바위들은 무리지어 있는 모습이다.


두꺼비 바위를 지나쳐 조금 더 올라가면 꽃별테마공원이 나온다. 몇 년 간 공사를 거쳐 최근에 완성과 개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두모마을에는 그 흔한 편의점도 슈퍼도 음식점도 없지만 굉장한 크기의 공원이 있는 마을이다. 시골길은 아름다워도 걷기에 친숙한 환경은 아닌데, 이렇게 마을 내에 공원이 있다니! 편의점보단 역시 공원이 더 좋다. 아침저녁으로 마을을 산책하는 어르신들에게도 이 공원의 존재는 소중할 것이다. 봄에 유채꽃 축제를 대대적으로 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섬 지역인 남해는 예로부터 돌이 가장 흔한 재료 중 하나라, 양곡비료창고도 돌로 짓고(현재는 문화예술 전시공간이 된 돌창고의 원래 용도다), 어느 마을에 가도 돌담이 흔하게 보인다. 대부분은 돌과 돌 사이를 메워서 꽉 채운 모습의 돌담이지만, 제주처럼 중간에 몰탈 따위를 넣지 않고 얼기설기 쌓은 담장도 있다. 남해의 돌담 경관과 의미, 역사, 쓰임에 대해서도 한번 탐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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