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을 통해 진화하는 도시
Written by 김세훈
CES가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6km 길이의 ‘라스베가스 스트립’을 따라 7만 평 규모의 12개 컨벤션 시설 및 호텔, 카지노, 리조트, 식당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죠. 스트립이라는 중심축이 도시의 거대한 척추 역할을 하며, 여기에서 뻗어나가는 특별한 경험들은 뼈와 장기처럼 라스베가스라는 거대한 육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이 도시는 테크놀로지 컨벤션의 요람입니다.
미국의 도시 라스베가스를 떠올리면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쇼, 카지노와 도박으로 화려한 밤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장면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곳은 전 세계의 혁신적인 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나 미래를 이야기하는 '테크놀로지 컨벤션'의 요람입니다.
매년 국제전자제품 박람회(CES), 국제방송장비 전시회(NAB Show), 자동차부품 박람회(SEMA Show), 글로벌 게이밍 엑스포(G2E), 클라우드 컴퓨팅 컨퍼런스(AWS re:Invent) 등 수만에서 수 십만 명이 참가하는 초대형 행사가 즐비하죠. 라스베가스는 연결을 통한 진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매년 1월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세계 최대 IT․전자제품 박람회)의 경우 전 세계 첨단기술 기업과 스타트업, 투자자, 연구자, 인플루언서를 한자리에 모으는 초연결 행사입니다. 저도 2024년에 CES에 다녀왔는데요. 이 자리에 세계 150개국에서 4,300여 개 기업과 13만 5천여 명의 관람객이 참가했죠. 처음엔 컨벤션의 규모에 놀라고, 행사장 안에서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가격이 9달러에서 시작해 또 한 번 놀랐습니다.
CES 기조연설에서는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소개됩니다. 2024년에는 화장품 기업 로레알이 뷰티 테크의 미래를 제시했고, 월마트는 AI 기반 적응형 리테일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어퍼런스라는 스타트업이 선보인 햅틱 웨어러블 기술도 주목받았는데, 이는 신경계 진동을 통해 가상현실 체험을 한층 더 실감나게 만들어서 의료, 재활, 게임산업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CES 같은 행사가 첨단의 기술을 세상에 보여주는데 최적인가라는 의문은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적인 빅테크 혹은 선도적인 AI 기업들은 얼마 전부터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거든요. 개별 기업과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투자 결정을 하기엔 너무 사람도 많고 어수선합니다. 그럼에도 가장 대중적인 분위기에서 전 세계 기업과 기관이 참여해 요즘 기술의 이모저모를 오프라인으로 나눈다는 측면에서 컨벤션의 가치는 아직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행사 자체만 볼게 아닙니다. 사실 저는 도시를 관측하는 게 더 흥미롭습니다. CES가 라스베가스에서 개최되는 이유는 바로 그 도시가 가진 특별한 공간 환경 때문입니다. 라스베가스 중심부에는 7만 평 규모의 열두 개 컨벤션 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컨벤션들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닙니다. 이들 시설은 호텔, 카지노, 리조트, 식당, 술집이 6km 길이에 걸쳐 밀집해 있는 ‘라스베가스 스트립’에 있습니다. 선형의 컨벤션과 지원시설 클러스터가 도시의 등뼈를 이루고 있죠.
대규모 행사로 인한 도로 교통체증은 물론 있지만, 차가 아닌 다른 이동수단의 선택도 가능합니다. 스트립을 따라 운행되는 지상 2층 높이의 모노레일은 주요 행사장을 효과적으로 연결합니다.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하는 경험 자체가 라스베가스 투어로, 도시 경관을 즐기는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테슬라의 '루프(Loop)'도 운영 중입니다. 지하 터널을 통해 전기차가 다니며 사람들의 신속한 이동을 돕는 교통 시스템입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의 높은 밀집도와 여러 이동수단들 덕분에 참가자들은 다양한 장소를 옮겨 다니며 네트워킹할 수 있습니다.
스트립의 한쪽 끝에는 메디슨스퀘어가든 그룹이 우리 돈 3조 원을 투입해 만든 초대형 복합상영관 '더 스피어'가 있습니다. 최대 17,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외부 높이 100m, 내부 스크린 높이 76m에 달하며, 18K 화질의 영상을 제공합니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최신 TV가 보통 4K 화질인 것을 감안하면, 더 스피어의 시각 경험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벽은 140만 개 이상의 LED로 이루어져 있어 그 자체로 세계에서 제일 큰 광고판이자 도시의 최신 아이콘입니다.
더 스피어의 또 다른 특징은 음향입니다. 상영관 내부에 무려 16만 개의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데 관람객 1인당 10개씩 스피커가 배정되는 셈입니다. 이를 통해 헤드셋 없이도 좌석마다 다른 효과음과 언어를 경험할 수 있죠. 더 스피어는 단순 엔터테인먼트 공간을 넘어서 라스베가스라는 도시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류는 스피어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죠.
이처럼 라스베가스 스트립, 열두 곳의 컨벤션, 모노레일과 루프, 더 스피어 같은 특별한 인프라는 CES를 세계 유일무이한 초연결 이벤트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인프라와 테크놀로지 컨벤션의 결합으로 라스베가스는 오랜 시간 일자리 특수를 누렸습니다. 미국 도시 중 매우 드물게 테크 부문이 아닌 레저, 영화, 엔터, 건설 중심의 일자리가 풍부합니다. 덕분에 지난 20여 년간 미국 안에서도 일자리 증가율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죠.
최근에는 소니 픽쳐스의 CEO가 라스베가스에 $5억 달러를 투자하여 영화 스튜디오를 짓겠다고 발표했고, 워너 브라더스는 $9억 달러 규모의 네바다 캠퍼스 개발을 제안했습니다. 만약 두 곳의 개발이 함께 진행되면 라스베가스에서만 영화 관련 새로운 일자리가 5만 개 이상 만들어질 전망입니다. 한 도시에 엄청난 유무형의 부가 창출되는 셈이죠. 도시에서의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이 불러온 나비효과입니다. 이런 투자를 우리나라 도시에서 유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