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도시
Written by 김세훈
지구 면적의 불과 3%를 차지하는 도시는 전 세계 GDP의 80%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공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전 세계에 산재한 1만여 도시들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지구의 육지 면적의 3% 정도입니다.
나머지 97%는 웅장한 산맥과 푸른 호수, 끝없이 펼쳐진 초원, 황량한 사막, 기름진 농경지가 차지하고 있죠. 생각보다 도시의 면적이 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불과 3%를 차지하는 도시들은 마치 공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처럼 지구 전체의 자원을 흡수하며 인류 문명의 방향을 결정해 왔습니다.
고대 크레타섬의 크노소스는 이런 도시의 본질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기원전 2500년에서 1500년 사이, 미노아인들은 에게해를 무대로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치며 찬란한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크레타섬에 건설한 크노소스는 단순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천 개가 넘는 방에 관청, 주택, 시장, 창고가 광장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상하수도 시스템과 욕실까지 갖추고 있었죠. 그 자체가 도시였습니다. 미노아 문명은 이후 유럽 문명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산업혁명기의 버밍엄은 도시의 혁신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18세기 후반, 이 도시는 말 그대로 기술 혁신의 용광로였습니다. 천재적 기술자 제임스 와트와 후원자 메튜 볼턴이 1774년 설립한 '볼턴 앤 와트'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과감한 벤처 투자자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들은 '루나 소사이어티'라는 지적 교류의 장을 통해 진화론의 선구자 에라스무스 다윈, 도자기 산업의 혁신가 조지아 웨지우드, 무기 제조의 대가 사무엘 골턴 주니어와 같은 시대의 천재들과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도시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전 세계 GDP의 80%가 도시에서 생산되고, 글로벌 500대 기업의 70%가 도시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유니콘이란 단어를 들어보셨지요? 유니콘이란 전설 속 동물로, 이마에 뾰족한 뿔이 난 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쟁이 치열한 벤처 생태계에서 살아남아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기업을 전설 속 동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전 세계 1,220개의 유니콘 기업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무려 44%가 샌프란시스코, 뉴욕, 베이징, 상하이, 런던, 벵갈루루 등 단 10개 도시에 집중되어 있죠. 슈퍼스타 도시의 승자독식인 셈입니다. ChatGPT를 개발한 오픈AI가 샌프란시스코에, 알파고를 탄생시킨 구글 딥마인드가 런던에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도시의 번영이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도시의 몰락은 종종 문명의 종말로 이어졌습니다. 서로마의 수도 ‘로마’가 함락되며 고대 세계가 막을 내렸고, 찬란했던 도시 ‘바그다드’의 몰락은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종식시켰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중세 시대의 막을 내렸습니다. 도시가 멎는 순간, 그것이 지탱하던 문명과 제국의 역사도 함께 쇠락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56%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에는 이 숫자가 66억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닐 브레너가 말한 것처럼 “전 지구적 도시화”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도시에 살든 그렇지 않든, 3%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