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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도시는 제국이 아닌 '연합'이었다

두 강 사이에서 피어난 도시들의 공생

by 도시관측소

Written by 김세훈


인류 최초의 도시는 제국의 수도가 아니다. 연대하여 자연의 험난함을 극복하고 때로 경쟁을 벌인 12개 이상의 도시국가 연합이 그 첫 모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만 년 전, 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초원에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 살아가며 수십에서 수백 명 규모로 무리를 지어 사냥하고 열매도 따 먹었죠. 당시 주 식량원은 자연이 주는 먹거리, 즉 1차 바이오매스였습니다. 이들은 점차 아프리카를 벗어나 서아시아, 유럽, 아시아로 퍼져나갔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인류 종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습니다.


오랫동안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이어가다가 약 1만 년을 전후로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바로 농업혁명의 시작이죠. 사피엔스는 비로소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가축도 길렀습니다. 식량 생산은 크게 늘어났고, 인구도 빠르게 증가했죠. 그렇다고 수렵생활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피해, 혹은 풍부한 사냥감을 따라 인류는 계속 이동했습니다. 이후 수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 도시라 부를만한 정주지는 나타나지 않았죠.


인류 최초의 도시가 등장한 곳은 바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이곳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드는 평원으로, 지금의 이라크 남동부 끝에 해당하죠. 아라비아어로는 Bilad al-Rafidayn, 즉 "두 강 사이의 땅"이라고 불립니다. 최초의 도시는 이곳에서 기원전 약 3500년경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첫 번째 도시는 단일 도시가 아닌, 에리두, 우르, 우르크, 키시 등 12개 이상의 도시국가(city states)군집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각 도시에 최소 수천에서 수만 명의 인구가 살았고 그 면적도 상당했습니다. 기원전 3200년경 우르크의 면적은 약 100 헥타르였고 400년 뒤에는 약 494 헥타르까지 커졌습니다. 이는 나중에 등장한 고대 아테네나 기원 후 예루살렘에 비해서도 넓은 규모입니다. 당시 우르크의 인구는 5만명 전후로 추정되죠. 이들 도시들은 세계 최초의 문자인 쐐기 문자, 행정과 거래용 점토판 문서, 신전 근처에 지어진 거대한 지구라트, 장거리 무역과 신분의 분화 등 기술과 문화를 공유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은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영토 전체를 지배하는 중앙 집권적 국가나 강력한 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각 도시를 이끄는 리더나 종교 지도자가 있었으나, 인접한 이집트 문명이 파라오의 신권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영토 국가였고 중국 황하 문명은 왕조 중심의 국가였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집트나 황하 문명에서 큰 규모로 발달한 정주지는 모두 제국 운영을 위한 수도 역할을 했죠. 그에 반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중앙 권력 기반의 영토형 제국이 아닌, 수많은 도시국가 연합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도시는 이후 페르시아만 일대와 북쪽의 바그다드까지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도시 모델의 원거리 수출에 해당하죠.


이들 도시들은 같은 나라에 속하진 않았지만 변화무쌍한 환경을 제어하고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협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둑을 쌓거나 농경지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대규모 수로를 파는 일은 단일 도시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 도시국가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면 공멸의 길을 걸었겠죠. 이후 발견된 점토판기록에는 도시 사이에서 곡물, 가축, 금속 등 다양한 재화가 거래된 사실이 쐐기 문자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사원은 해당 도시의 종교적 장소이자 무역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업의 거점이었죠. 각 도시에는 고유한 수호신이 있었지만, 여러 지역이 함께 제의를 올리고 종교 네트워크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광석, 나무, 돌 등 자원이 부족했던 수메르 지역의 특성상 구리는 오만에서, 목재는 레바논에서 들여왔고, 청동기 주조 기술과 바퀴와 말이 이끄는 수레, 관개농업 기술 등의 혁신도 서로 공유했습니다.


반면 중앙 권력의 부재는 도시 간 영토, 노예, 곡물을 두고 전쟁을 촉발했을 것입니다. 도시 간 거래가 활발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도시마다 인력, 식량, 자원을 자급자족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시 단위의 경쟁과 혁신, 때로는 거래와 연대는 무려 2천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로니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마침내 통일되었습니다. 이로써 이 지역 최초로 제국 규모의 농업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고, 식량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더 이상 개별 도시가 아닌 국가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처럼 단일 거대 제국이 아닌 독립적 도시국가가 경쟁과 느슨한 연대를 이루며 ‘도시 연합’을 형성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도시는 환경적 도전에 직면했을 때 주변과 창의적으로 연결되고 경쟁과 협력의 균형 속에서 부강해집니다. 국가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거나 혁신의 엔진이 꺼진 도시는 곧 사그라들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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