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상화된 근대가 도시에 스며든다
Written by 김세훈
끊임없는 방해, 조화를 깬 단절, 뜻밖의 놀라움이 이제 우리의 일상입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와 새로워지는 자극만을 원동력으로 삼는 사람들도 늘어났죠.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 오래 이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루함에서 새로운 가치를 길어내는 법마저 잊어버렸습니다. 액상화된 근대가 도시와 공간에도 스며들고 있습니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의지마저 크게 유동화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나 신분, 조직의 규율, 공동체의 속박에서 한층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직장이나 현장에 매여있긴 하죠. 하지만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일정 시간을 제외하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취향과 판단으로 개성 넘치는 삶을 삽니다. 요즘 사회와 직장은 마치 형형색색의 모자이크처럼 다채로워지고 있죠.
같은 세대, 지역,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전제하기보다, 오히려 모두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편이 더 현실적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차이'가 펼쳐지는 시대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학생들도 어쩜 이리 하나같이 다른지, 요즘 친구들의 탈규격성에 매번 놀라곤 합니다.
이런 차이의 스펙트럼이 개인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닙니다. 현대 사회를 채우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자극의 평균치도 과거와 다릅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 느리며 둔한 것을 참지 못합니다. 너무 금방 권태에 빠지죠. 집중의 길이도 짧아졌는데 그 시간을 더욱 촘촘한 자극이 채워줘야 합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폴 발레리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Interruption, incoherence, surprise are the ordinary conditions of our life. They have even become real needs for many people, whose minds are no longer fed by anything but sudden changes and constantly renewed stimuli. We can no longer bear anything that lasts. We no longer know how to make boredom bear fruit. So the whole question comes down to this: can the human mind master what the human mind has made?”
(의역) “끊임없는 방해, 조화를 깬 단절, 뜻밖의 놀라움이 이제 우리의 일상입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와 새로워지는 자극만을 원동력으로 삼는 사람들도 늘어났죠.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 오래 이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루함에서 새로운 가치를 길어내는 법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핵심 질문은 ‘과연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낸 것을 인간이 충분히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죠."
- 폴 발레리 (1871-1945)
이 문장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Liquid Modernity (액상화된 근대)> 1장에 소개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작년에 처음 읽었는데, 이제야 읽게 된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만큼 통찰로 가득한 책이었죠. 바우만은 사회 전반이 유동화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이를 "액상화(liquidity)" 혹은 "유동화(fluidity)"라 표현합니다.
유동화된 사물은 금세 움직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모양을 유지하지 않죠. 공간이라는 딱딱한 틀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속성에 집착하지 않고 가볍고 경쾌합니다. 정해진 패턴이나 형태, 시스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론 형태도 있고 조직화도 이루어지지만 이들은 서로 금방 충돌하고 위치를 바꾸며 낡아지면 금방 도태되고 다시 생성하죠. 변화에 무딘 공간이나 조직을 유동적이고 가벼운 시간과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요즘 우리는 뿌리가 없거나 전통이 없어 보이는 무언가에 더 이상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아찔한 속도로 변하고 있고, 유행은 돌고 돌기 때문에 굳이 존재의 근거나 계보를 따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중심성, 위계, 조직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경계하곤 합니다. 나의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 아니라면 신경을 쓰고 싶지 않죠. 공공공간이나 마을 정원을 가꾸려는 노력도 줄어들고, 공적 영역에 대한 전반적인 사람들의 관심도 약해지는 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나의 이해관계를 크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렇다고 조직과 소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 가장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각자도생의 삶,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야생을 우리는 두려워하죠.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상부 구조를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큰 관심을 두진 않지만, 공공공간의 혜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죠. 반대로 정말 좋은 공공공간이 집 주변에 생기면 그곳을 이용하려는 사회적 수요는 폭증합니다. 단, 소비자로서 말이죠. 그것을 만드는 과정이나 유지관리하는 데 참여를 할 여유는 좀처럼 내기 어렵습니다.
바우만이 말한 "액상화된 근대(Liquid Modernity)"가 우리 도시의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과거 개발주의 시대에는 '선택과 집중'이 지역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전체의 성장을 위해 중요한 부문만 선별해 자원을 최대치로 투입하고, 기능을 특화시키고 독점적 업종이나 주체가 배치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체나 지역성은 다소 희생되었죠. 그보다는 인프라, 조직, 시스템, 구조, 양적 성장이 더 중요했죠. 소프트한 것들은 하드한 외형이 만들어진 후 알아서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개인이나 지역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개발, 인프라나 클러스터 업종의 선택과 집중은 이제 좀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구조의 탈중심화, 개체의 개별화, 공간 이용의 유연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선택해 준 구조나 공간 체계에 내 삶을 맞추기보다, ‘나’라는 자아를 중심으로 부합하는 세계나 공간과 필요한 만큼의 관계를 맺고 이후 다시 흩어집니다. 이런 유동화된 관심에 선택을 받고 SNS를 달군 공간은 그야말로 힙플레이스가 됩니다. 전국구 상권이 되거나 모든 기업들의 입지 선망을 받죠. 노후 준공업지역에서 패션, 문화, 스타트업의 거점이자 대한민국 팝업의 성지로 거듭난 성수동, 맨하튼의 베드타운에서 예술가의 실험실이자 힙스터 타운으로, 또 문화 용광로로 거듭난 브루클린, 쇠락한 공장지대에서 언더그라운드 예술 현장으로, 나아가 테크 스타트업과 고급 상업지구로 거듭난 런던의 쇼디치, 스크램블 교차로와 일본의 하위 문화가 뒤섞인 도쿄 시부야도 그런 예입니다.
하지만 여건과 관심이 바뀌면 그 유효기간도 길지 않습니다. 소멸하는 지역은 더욱 심합니다. 한 지역을 활성화하려는 애정도 실은 많은 에너지가 듭니다. 시장과 자본의 선택을 받으면 조금 움직이지만, 그마저도 약해지거나 내가 힘들면 그냥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가벼운 시간의 흐름에 나의 옛 열정을 맡겨버리죠.
사실 도시나 공간 자체는 유동화가 쉽지 않습니다. 한번 만들어놓으면 비용도 많이 들고 쉽게 바꾸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런 공간의 감각마저 변하고 있습니다. 공간을 한정 짓는 물리적 구조물이나 재료가 금세 바뀐다는 게 아닙니다. 이를 활용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회적 의지, 자본의 흐름, 사람들의 관심도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유동화되었습니다.
저는 이 현상이 공간적으로 구체화한 것을 '도시의 유동화'라고 부릅니다. 한 지역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성격도 순식간에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어제까지 평범했던 동네가 오늘의 힙플레이스로 부상합니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상권, 학군, 업무 중심지나 관광지의 특성도 움직입니다. 하지만 단계적으로, 어떤 원리에 따라, 정해진 형상을 갖추면서 나타나는 변화가 아닙니다.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기 참 어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