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탄소, 경쟁력, 트럼프 2.0
Written by 김세훈
탈탄소 전환은 기업과 시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기존의 탄소 경제와 균형을 맞춰 진행해야 한다
RE100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캠페인인데, 2024년 봄을 기준으로 전 세계 428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움직임이 민간에서 시작됐다는 겁니다. 기업들이 먼저 나섰고, 이제는 정부 정책이나 기업 간 거래, 해외 투자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2023년 5월에 미국 뉴욕 주에서는 『공공재생에너지 건설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뉴욕 전력청(NYPA)이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직접 건설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한 것인데요. 이를 통해 주 정부와 산하기관 모든 건물에 2030년대까지 100% 재생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남는 전력은 일반 가정과 전력 구매자에게 판매하고, 특히 저소득 가정에는 일반 요금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공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시가 ESG, RE100, 탈탄소 경제 전환의 길로 조화롭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아직 최종 소비자까지 청정에너지가 도달하는 체계나 관련 기업들의 역량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가격도 너무 높죠.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전환을 요구하면 기업들은 큰 부담을 안게 됩니다. 경기 침체와 맞물려 연구개발과 혁신, 인적자원에 투자할 여력도 잃게 되겠죠. RE100이 일방적인 선언이나 강제로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최근 미국의 정치적 변화는 RE100 정책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친환경‧에너지 관련 규제가 완화되고, 화석연료와 원전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신재생에너지 기업들의 영향력도 다소 축소될 수 있죠.
유럽연합의 사례는 이런 우려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European Commission이 발간한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보면, 유럽은 친환경 기술에서 앞서 있지만 정작 시민과 기업에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등 해외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졌고, 최근 러-우 전쟁과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서의 한 단락을 읽어보시죠.
"Over the medium term, decarbonisation will help shift power generation towards secure, low-cost clean energy sources. But fossil fuels will continue to play a central role in energy pricing at least for the remainder of this decade. Without a plan to transfer the benefits of decarbonisation to end-users, energy prices will continue to weigh on growth."
(번역) 중(장)기적으로 볼 때, 탈탄소화는 청정에너지로 에너지 생산을 전환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적어도 향후 10년 간 화석연료는 에너지 비용을 줄이는데 막대한 영향을 준다. 유럽에서 탈탄소 기술의 혜택을 최종 소비자가 체감하지 못한다면, 높은 에너지 가격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 European Commission, 『유럽 경쟁력의 미래』
결국, 탈탄소 전환은 기업과 시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기존의 탄소 경제와 균형을 맞춰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시민들은 비싼 에너지 비용을 떠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미 있는 시도를 하는 기업이 있습니다. 미국의 부동산 디벨로퍼인 WS Development(이하 WS)가 그 예입니다. 이 회사는 보스턴 시포트(Seaport) 지구에 8곳, 뉴잉글랜드 지역 전역에 35곳의 상업용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최근 이들 자산에 100%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력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만 미국 전역 모든 자산에 일괄 적용하기보다, 보스턴과 뉴잉글랜드부터 우선 도입해 효과와 리스크를 검증한 뒤 확장하겠다는 전략입니다.
WS의 재생에너지 전력 조달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PPA(전력구매계약, Power Purchase Agreement): 태양광·풍력 등 친환경 발전사와 직·간접 구매계약을 맺어 대규모로 전력을 확보해 단가를 낮추는 방법
REC(재생에너지 인증서) 구매: 필요한 경우 재생에너지 인증서를 별도로 매입해 전력 사용량을 ‘100% 재생에너지’로 맞추는 보완책
WS가 이런 방안을 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RE100의 흐름에 맞춰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 싶어 하는 기업들일수록 “친환경 전력을 쓰는 건물”에 입주하길 선호하는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차인들은 RE100 달성 노력이나 ESG 강화를 위해, 재생에너지 사용이 가능한 자산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공실률이 낮아지고, 장기적 투자 수익성이 올라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생에너지 전력 단가를 장기 계약으로 고정해 두면, 유가 급등 같은 시장 변동성으로 인한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인 에너지 비용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아직 재생에너지 공급이 충분히 확충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인프라 구축 비용이나 전력망 개선이 필요할 수 있으므로, WS 역시 신중히 단계를 나눠가며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위한 “좋은 입지”의 기준이 바뀌고 있습니다. 양호한 교통 접근성만이 아니라, 에너지를 얼마나 안정적이면서도 친환경적으로, 동시에 적정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기업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을 동시에 높이는 게 중요합니다. 이를 위한 여건을 도시와 제도가 함께 마련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