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유동화와 기업 입지 재구조화의 원인
Written by 김세훈
‘공간의 유동화’ 현상에 대해 앞서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유동화의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근본에는 자본과 산업의 가치사슬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입지 재구조화라는 동인이 존재합니다.
스마일링 커브(Smiling Curve)는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대만 기업 에이서(Acer)의 CEO였던 스탠 시(Stan Shih)가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 제조업에서 제조 단계별 부가가치 그래프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최근에는 제조업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 분야에 이 개념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산업화 시대의 부가가치 커브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산업화 시대의 기업이 가장 큰 가치를 만들어 내는 단계는 ‘제조’였습니다.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해 완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가공·포장하는 과정이죠. 효과적인 제조를 위해서는 공장을 건설할 토지와 자금을 확보하고, 생산설비 라인을 효율적으로 구축해야 합니다. 여기에 노동력을 대거 투입해 신속 정확하게 제품을 생산·납품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기업은 높은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었죠. 그래서 그림의 Y축, 즉 기업의 부가가치가 제조 부문에서 위로 봉긋하게 솟아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이 흐름이 뒤집혔습니다. 위 그래프를 보시죠.
먼저, 단순히 물건을 조립하고 가공하는 일의 부가가치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물론 생산을 통한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낮아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생산 기반은 더 저렴하고 넓은 곳으로 이전할 수 있게 되었고 물류 비용도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생산 단가 경쟁력에서 밀린 많은 제조업체가 경영난 끝에 문을 닫거나, 업종을 전환해 가까스로 살아남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조업과 관련된 모든 가치사슬이 무너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물건을 제조하기 이전 단계와 이후 단계의 부가가치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전 단계는 특허 출원을 통해 제품의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작동 효율을 높이며 새로운 브랜드를 구축하고, 디자인을 고도화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후 단계는 제품을 꼭 필요한 수요 기업에게 판매하고, 감성적인 마케팅으로 새로운 수요층을 발굴하며, 운영체제를 개발해 활용 범위를 확대하고 최상의 고객 경험을 제공해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활동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지식 기반 경제에서 높은 부가가치는 기존 그래프가 역전돼, 스마일링 커브라는 이름처럼 양 끝단이 올라간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제조 단계의 부가가치는 낮아진 반면, 전·후 단계의 부가가치는 크게 증폭된 것이죠.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기업 애플(Apple)은 이런 스마일링 커브의 가치사슬 변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 기업 중 하나입니다. 애플은 직접 상품·서비스를 기획하고, 아이폰을 디자인하며, 판매와 마케팅, 구매 고객에 대한 서비스까지 담당합니다. 이는 지식 기반 경제에서 높은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영역이죠. 반면 제품 생산 자체는 대만의 폭스콘(Foxconn) 같은 전문 업체에 맡깁니다. 폭스콘은 전 세계에서 아이폰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애플의 위탁업체입니다.
패션 기업 무신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신사의 매출 구조를 보면 플랫폼 수수료와 상품·제품 판매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직접 패션 플랫폼을 구축해 고객을 유입시키고, 입점 브랜드로부터 판매 수수료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판매 데이터를 바탕으로 상품성이 검증된 제품을 자체 PB 브랜드로 출시하거나, 직매입한 고급 제품도 선보이면서 플랫폼 유입과 잠금 효과를 더욱 강화합니다. 전통적인 의류 생산과 판매에만 집중하기보다 스마일링 커브 상의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큰 수익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무신사는 최근 오프라인 매장을 포함해 여러 부동산 개발에도 뛰어들었습니다. ‘패션 플랫폼 기업이 부동산 개발까지?’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역전된 스마일링 커브 시대에는 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단순히 열심히 제품을 만들어 정해진 소비층에게만 판매해서는 기업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제품 소비 수요는 꾸준히 늘어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단기 매출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장기 자산 투자와 포트폴리오 다변화도 필수적입니다.
이 같은 경향은 비단 무신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임차한 공간에서 F&B 영업만 하던 요식업 기업들도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 자사가 소유한 건물에 ‘앵커’로 입점시키곤 합니다. 식당·카페 운영에 성공하면 주변 지역의 유동인구가 많아져 자산의 임대 수요도 높아집니다. 결국 건물 전체의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죠. 과거 기업 대출에만 집중하던 금융기관도 이제 다른 투자자와 합작회사(joint venture)를 세워 직접 기업에 투자하고, 이익 창출에 따른 배당을 받습니다. 이처럼 가치사슬 역전의 시대에 다양한 힘이 모여 공간의 유동화를 더욱 가속화합니다. 하나의 기업이 하나의 업종, 하나의 공간 유형, 하나의 입지만 선호하던 법칙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최근 스마일링 커브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첨단 기술과 로봇으로 무장한 스마트 제조의 가치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것이죠. 공장에서는 로봇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생산 관리와 최적 물류 알고리즘 개발까지 인공지능(AI)을 활용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와 고부가가치 직군이 생겨나고 있죠. 지식 기반 제조업의 고도화가 가져올 기술적·사회적 파급력이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생산 기지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에 한창이죠. 지난 바이든 정부가 법인세·소득세 감면과 보조금 지급을 통해 첨단 제조업의 미국 유치를 간접적으로 독려했다면, 트럼프 정부 2기는 관세와 함께 특정 기업이나 국가에 대한 압박을 더욱 노골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가 간, 대륙 간 기업과 산업 관련 공간의 유동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 세계 여러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는 제조업으로 국가 경제를 성장시켜 온 한국·대만·중국 등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스마일링 커브에서 비교 우위를 차지하던 부문의 상당 부분이 잠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가 자국 우선주의로 급격히 태세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추구하던 자유무역주의나 글로벌 분업 체계도 크게 흔들리고 있죠. 결국 지역과 산업마다 서로 다른 곡률의 스마일링 커브가 ‘파편화’되어, 각자도생하는 가치사슬이 공간을 더욱 강렬하게 유동화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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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 김세훈, 2025. 『도시 관측소』, 책사람집, p. 152 (원본은 권혜인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