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아고라가 필요로 하는 공간
Written by 김세훈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의 창작자, 게이머, 소비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디지털 아고라'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시민들의 소통 광장이었다면, 현대의 디지털 아고라는 스포티파이, 스팀, 디스코드, 레딧, 유튜브 등에서 음악, 게임, 영상 콘텐츠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가상의 광장입니다. 이러한 디지털 아고라의 영향력은 단순히 온라인에 머무르지 않고, 그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 경험을 위한 오프라인 공간의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디지털 아고라에서 소비되는 콘텐츠,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온라인의 한계를 넘어 실제 도시 공간에 새로운 형태의 제작 환경을 요구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진그룹 (주)동양이 기획부터 개발, 운영까지 맡아 17년간 방치되었던 야적장을 변모시킨 다목적 멀티 스튜디오 '유지니아'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와 2026년 개봉 예정인 나홍진 감독의 영화 〈호프〉는 유지니아에서 촬영된 대표적인 콘텐츠입니다. 〈흑백요리사〉는 100명의 셰프가 경연을 펼치는 서바이벌 예능으로, 매회 변화하는 규모와 재료, 요리 장르, 심사 방식에 맞춰 수십 명이 동시에 요리할 수 있는 초대형 세트장과 첨단 시설을 필요로 했습니다.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가 투입되는 〈호프〉 역시 국내 최고 VFX 기업 '웨스트월드'와 협력하여 현실과 증강·가상현실이 결합된 혁신적인 영상을 선보일 예정으로,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유지니아의 제작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초범주형 콘텐츠 제작에는 두 겹의 하드웨어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카메라에 담기는 배경이자 등장인물이 이용하는 도구로서의 초대형 세트장입니다. 〈흑백요리사〉를 예로 들면, 수십 명이 한꺼번에 요리할 수 있는 무대, 벽체와 냉장고, 주방기구, 오븐과 화구, 조명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세트장을 둘러싼 스튜디오 공간 전체와 그 시스템입니다. 백수저 20명과 흑수저 80명의 출연자와 관계자 포함 최소 500여 명이 나뉘어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나 300대 이상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련 영상을 지켜보는 조정실, 각종 설비와 기구를 설치하는 구조체가 여기에 포함되죠. 하나의 방에 또 하나의 방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입니다.
유지니아는 준공 후 첫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을 성공적으로 선보이면서 초범주 콘텐츠의 제작과 운영 능력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입증했습니다. 직접 해 보지 않았다면 얻지 못할 공간 개발과 시설 설치, 연출과 운영 경험을 오롯이 우리나라 기업의 역량으로 이루었다니, 뿌듯한 일입니다.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가 꼭 스튜디오 안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제 도시 공간으로 튀어나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죠. 뉴욕 타임스퀘어의 TSX 무대가 그런 예입니다.
BTS 정국은 솔로 앨범 발매 후 팬들에게 깜짝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분 뒤, 타임스퀘어에서 라이브 공연을 합니다.” 게릴라 공연 소식을 들은 팬들과 뉴욕 관광객들은 순식간에 광장을 가득 메웠고, 공연은 거대한 전광판과 SNS를 통해 전 세계로 실시간 중계되었습니다. 뉴욕 한복판이 잠시 동안 K-pop 열기로 가득 찬 떼창의 현장이 되었죠.
정국의 공연이 열린 TSX 무대는 1913년에 지어진 역사적인 팰리스 극장을 리모델링하여 탄생했습니다. 무려 7,000톤에 달하는 거대한 극장 건물을 지상에서 10미터 들어 올려 신축 건물과 결합하고, 전면에 타임스퀘어를 향해 열리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건물이 20세기 뉴욕 문화의 상징 타임스퀘어에서 21세기의 스타 정국과 만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유지니아와 TSX 무대의 사례는 디지털 아고라에서 탄생한 콘텐츠가 최적의 제작 환경과 임팩트 있는 경험을 위해 그에 맞는 오프라인 공간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게임, 음악, 공연, 스포츠, 커머스 등 다양한 영역의 활동과 콘텐츠가 디지털 아고라에서 융합되는 초범주성 시대는 이제 오프라인 공간과의 결합을 통해 더욱 진화하고 있습니다.
온·오프라인 아고라의 탄생과 발전은 도시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를 유동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현실 공간과 만나 만들어내는 새로운 경험들은 앞으로 우리의 삶과 도시의 풍경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