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범주성(trans-category)의 시대
Written by 김세훈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초범주성(trans-category)' 시대에 진입했음을 보여 줍니다.
디지털 아고라의 영향력은 게임을 넘어 정치와 사회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후보는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을 이용해 선거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게임 속 섬에 ‘Team Jo’, ‘Biden & Harris’ 같은 선거 팻말을 세우고, 가상 아이템으로 제작된 선거 굿즈를 활용해 유권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2024년 재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디지털 아고라의 가능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미디어 & 테크놀로지 그룹(TMTG)이 운영하는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은 기존 소셜미디어 검열에 반발하며 탄생한 플랫폼으로, 주요 정치 메시지를 대중에게 직접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최근 TMTG는 ‘트루스파이(Truth.Fi)’라는 핀테크 벤처를 통해 ETF 상품 출시와 가상화폐 발행을 준비 중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는 정치와 언론, 금융, 커뮤니티 기능을 디지털에서 하나로 결합하는 거대한 비즈니스 실험입니다. 한국처럼 정치인의 사업 활동과 이해충돌에 대한 감시가 엄격한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일본에 반다이남코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2005년 완구회사 반다이(Bandai)와 게임사 남코(Namco)의 합병으로 탄생한 이 기업은 건담 프라모델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지만, 여전히 유통업체 매장에 제품을 납품하는 수준에 머무르며 성장의 한계를 겪었습니다. 최근 반다이남코는 건담 메타버스 구축을 발표하며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공간인 ‘건프라 별’을 만들고, 이곳으로 건담과 제작자, 팬들을 초대합니다. 이곳에서 건담 컨텐츠의 재생산과 디지털 아이템의 거래, 오프라인 이벤트 공지 등을 하면서 전 세계 팬들이 소통하는 것이죠.
스포츠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영국의 맨체스터 시티는 소니(SONY)와 손잡고 ‘버추얼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메타버스에 구현했습니다. 팬들은 이 가상 스타디움에서 엘링 홀란의 시즌 최다골 순간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그의 슈팅을 360도 모든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의 라커룸을 둘러보고 최신 유니폼 전시도 구경할 수 있죠. 구단에 대한 팬들의 애착이 더욱 깊어지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초범주성(trans-category)’ 시대에 진입했음을 보여 줍니다. 게임, 음악, 공연, 스포츠, 판매, 사교, 취미, 언론,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활동과 콘텐츠가 디지털 아고라에서 융합되면서, 새로움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 변하고 있습니다.
공연 산업에서도 변화가 감지됩니다. 2020년 4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멈춰 있던 시기, 미국의 유명 래퍼 트래비스 스캇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게임 〈포트나이트〉 에서 라이브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포트나이트는 전 세계 3억 5,0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플레이어 수를 자랑하는 메가 히트 게임이었죠.
스캇은 혜성에서 튀어나온 거인 아바타로 등장해 불길을 가르는 사이키델릭 댄서로, 또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으로 변하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이 공연에서 처음 공개된 신곡 “The Scotts”는 이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습니다. 더불어 스캇 캐릭터와 관련된 티셔츠, 후디, 모자, 피규어, 장난감 총, 운동화 등이 전 세계로 판매되어 엄청난 부가 수익을 창출했죠.
단 1시간의 공연을 지켜본 관객이 2,800만 명. 수익은 무려 220억 원에 달했습니다. 코로나 이전 아스트로월드 콘서트의 하루 평균 수익의 10배가 넘는 금액입니다. 가상 세계 공연이 실제 투어 수익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증명된 셈입니다.
이런 변화가 산업 전반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공연과 음반 판매에 의존하던 음악 산업이 게임, 경연, 애니메이션, 증강현실, VFX, 콜라보레이션 상품, NFT 비즈니스로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의 전략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소속 가수들의 컴백 시기를 조절해 자기잠식, 즉 ‘카니발라이제이션’을 막으려 했지만, 이제는 새 앨범 출시와 유닛 활동, 티저 영상 공개, 신인 데뷔 주기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앨범 판매가 유일한 수입원이 아니라면, 시대 감성에 맞는 아티스트를 계속 선보이는 것이 디지털 아고라의 전체 파이를 키우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범주성 시대의 디지털 아고라는 정치, 경제, 금융, 엔터테인먼트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새로움을 만나고 경험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각 영역이 독립적으로 작동했다면,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전에 없던 가치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융합의 시대에 성공하는 기업과 개인은 단일 카테고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연결점을 찾아내는 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