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사도 영화사도 음원회사도 아닌, 그 무엇
Written by 김세훈
라이엇 = 음원 회사, 블리자드 = 영화 회사
올해 열여덟 살인 제 아들은 게임을 무척 좋아합니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게임 속 캐릭터와 배경음악(BGM)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게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의 세계로 들어갔죠.
예를 들어 〈데빌 메이 크라이 5〉의 전투 BGM에서 록 음악의 매력을 발견했고, 〈울트라 킬〉을 계기로 90년대 ‘브레이크 코어’ 장르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지오메트리 대시〉의 EDM 음악, 특히 “At the Speed of Light” 같은 고난도 트랙에도 푹 빠져 있습니다.
아들의 방에서는 때때로 강렬한 기타 리프와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울려 퍼집니다.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음악 세계가 더욱 확장되고 있죠. 스포티파이의 알고리즘으로 새로운 장르를 탐험하고, 스팀으로 게임을 즐기며, 디스코드와 레딧에서 음악 정보를 나누고, 유튜브로 콘텐츠를 시청합니다.
이러한 매체는 현대의 ‘디지털 아고라’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시민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던 광장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창작자·게이머·마케터·콘텐츠 소비자들이 가상의 광장에 모여 활발히 소통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아고라의 힘은 아마추어 게임 창작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나온 최고의 롤플레잉 인디 게임 중 하나로 꼽히는 〈언더테일〉이 한 사례입니다.
2015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토비 폭스는 “왜 모든 게임에서 주인공이 적을 죽여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게임의 줄거리, 캐릭터, 음악을 모두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전문 마케팅 팀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닌텐도 RPG 시리즈 중 하나인 ‘어스바운드’ 팬사이트와 웹코믹 ‘홈스턱’의 커뮤니티를 통해 초기 네트워크를 확보했고, 유튜브와 트위치 스트리머들이 데모를 플레이하면서 게임이 급속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출시 후에는 게이머들이 자발적으로 일러스트와 밈, 코스프레 같은 2차 창작물을 만들어 내며 언더테일의 인기가 온라인 전반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게 디지털 아고라에서 형성된 강력한 팬덤은 게임의 확고한 지지층이 되었습니다.
특히 〈언더테일〉의 보스전 BGM으로 발표된 “메갈로바니아”는 주목할 만합니다. 폭스가 16살 때 작곡한 이 곡은 게임의 인기와 함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 최근 유튜브에서 1억 4,0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게임 음악이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발판 삼아 리믹스·오케스트라 편곡·피아노 커버 등으로 재창조되고, 언더테일 팬덤에서도 그 인기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아빠, 이 곡 들어 보세요. 게임 음악인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도 한대요!”
게임을 만들고, 콘텐츠와 캐릭터를 기획하고, 음악을 작곡, 연주, 감상하는 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아마추어 창작부터 덕후들의 주류 컨텐츠, 대중문화까지 폭넓게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국내외 게임 기업은 초범주 콘텐츠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게임 음악의 플레이리스트 아래 달린 답글이 재미있습니다.
“라이엇 = 음원 회사, 블리자드 = 영화 회사.”
라이엇 게임즈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로 유명한 미국의 게임사입니다. 이 회사가 음원 회사로 불리는 건 세계적인 음반 제작자들보다 더 인기 있는 노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여자)아이들의 미연과 소연, 싱어송라이터 매디슨 비어, 자이라 번스가 참여한 가상그룹 K/DA의 ‘POP/STARS’는 공개 한 달 만에 유튜브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했고, 현재 6억 3,000만 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리자드를 영화사라 부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실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블리자드가 만든 〈스타크래프트 II〉나 〈디아블로 IV〉 같은 게임의 시네마틱 영상 수준이 마블 영화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게임은 이제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음악, 영상, 커뮤니티가 융합된 디지털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즐기는 다양한 장르가 디지털 아고라를 통해 확장을 거듭할 것입니다. 창작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 새로운 크리에이터 생태계는 기존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도시와 공간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