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했던 순간들
Written by 양하영
임대인은 왜 굳이 전화로 해도 될 이야기를 여기까지 와서 한 거지? 내가 언제 집에 올 줄 알고 기다린 거야?
24년 봄, 전세계약기간 만료까지 약 반년 정도 남았을 무렵입니다. 이번 재계약에서도 보증금을 올릴지 미리 알아야 했기에 부동산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간 ㅅ중개사를 상대하는 어려움 때문에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졸업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데다 새로 집을 구하는 피로가 우려되었어요.
때마침 학내 연구소에서 새로 일을 시작하기도 했고, 진행 중이던 개인 연구 때문에 지방을 계속 오가야 해서 이사를 준비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임대인이 보증금을 동결한다면 계약을 연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요.
그러나 중개사로부터 계약서에 임차인에게 불리한 특약을 추가하겠다는 통보를 수차례 받았고, 보증금도 처음엔 동결이었다가, 매번 연락이 오면서 조금씩 더 올리는 쪽으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3개월가량의 시간이 흐르게 되었고 임대인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 같지 않은 조밀하고 교묘한 특약사항들과, 계속 말이 바뀌는 금액과, 더딘 중개사의 연락에 대해 설전을 하다가 직접 임대인과 조정하라는 중개사의 말을 듣고 마침내 직접 임대인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켜켜이 쌓여 온, 무례하고 고압적인 중개사의 언행에 학을 뗀 저는 임대인에게 기존 중개사가 아닌 다른 중개사를 통해 재계약을 진행한다면 보증금을 올리고 계약을 연장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임대인에게 가능하겠는지 물으니 처음부터 거래하던 곳이니 계속 거기서 보자는 답변이 왔습니다.
저는 ㅅ부동산과 거래할 의사가 없으니 이번 계약을 종료로 이사 나가겠다는 답변을 보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이를 위해 제가 한 일은 크게 3가지입니다:
이사 갈 집 찾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보증보험사에 문의해서 절차 파악하기
기존의 집 내놓을 준비하기
이번 경험으로 인해 중개사에 대한 신뢰감 또한 전셋집을 알아보는 체크리스트에 포함되었습니다. 관악구에서 수많은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니며 알게 된 점은, 중개사는 1명인데 젊은 중개보조원들이 여러 명이 있는 공장형(?) 사무소가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이 지긋한 중개사 한 두 분이 일하시는 곳에 아주 조금 더 신뢰가 있었지만, 꾸준히 다양한 곳들을 다녀본 결과 거드럭대거나 약속 시간에 늦는 등 누가 봐도 신뢰도를 차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외에는 대체 누가 믿음직한 중개사일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집을 보러 다니면서, 관악구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1인가구 주거지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어요. 관악구 일대에서 교통 접근성과 치안이 좋은 곳들은 대개 신축 건물들로, 평수대비 높은 금액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집들은 너무 좁아 살이 조금 더 찌면 못 들어가겠는데? 싶기도 했고요.
같은 금액대에서 조금 더 넓은 집, 그러면서도 본가와 접근성이 괜찮은 곳들을 찾다 보니 강남대로 주변의 오피스텔까지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곳은 구축 건물들이 많아 같은 금액대비 넓은 집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관악구 남부순환로 오피스텔 가격이 서초구 강남대로 오피스텔 가격과 크게 차이 나지 않고, 평수는 그보다 좁다는 사실!). 그리고 그중 한 곳을 계약하기로 결정했지요.
이사를 준비하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ㅅ중개사와 설전을 벌이며 시간을 흘려보냈던 사이,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 결정을 기다리던 한 피해당사자가 숨졌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전세사기 공론화 이후 8번째 죽음이었는데요, 이 안타까운 기사를 접했을 때 애도와 동시에 불안이 다가왔습니다.
내 보증금은 안전한가? 일전에 가입해 두었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이 떠올라 보험 제공사인 HF(한국주택금융공사)에 연락했습니다. 아직 전세계약기간이 만료되지 않았지만, 보증금을 제대로 받지 못할 경우 제가 밟아야 하는 행정절차들과 사전에 준비해야 할 일들에 대해 미리 문의했습니다.
동시에, 기존 집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ㅅ부동산에서 집을 보여준다고 찾아올 텐데, 그와는 상종도 하기 싫었던 지라 다른 부동산을 통해 집을 내놓을 수는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오피스텔 관리실에 ㅅ부동산이 아닌 다른 부동산을 통해 거래된 호실이 있는지 문의했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집을 보러 수많은 중개사무소를 돌아다니던 중, 제가 살던 낙성대 오피스텔과 비슷한 조건의 서울대입구 오피스텔을 관리하는 ㅇ부동산을 발견했습니다.
역에서 가까운 신축급 오피스텔, 가격대와 평수도 유사하고요. 중개사와 대화를 나누며 신뢰는 모르겠지만 ㅅ중개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와 비슷한 상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ㅇ부동산 중개사에게 신규 세입자를 구하는 걸 도와줄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리고 임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집 내놓는 것은 많은 부동산에 열어두면 좋으니 그리하라는 답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차타워 입구에서 대기 중인 제 차에 관리소장이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집주인 와있어요. 이야기 좀 하고 싶다는데…”
“네? 갑자기요?”
“네, 이야기 좀 하겠다는데?”
“… 우선 차 주차하고 오겠습니다.”
창문을 닫고 주차타워의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사이드미러를 통해 관리소장 옆에 서있는 임대인의 모습을 봤습니다. 재계약 이후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어요.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찾아왔지? 날 기다린 건가? 내가 집에 언제 올 줄 알고? 내 전화나 문자는 제대로 안 받으면서 왜 이렇게 갑자기? 무슨 생각이지? 내 방에 다녀갔나? 이 사람이 우리 집 문 열고 들어올 수 있나?
오만가지 생각이 재빠르게 머릿속을 헤집어놓았습니다. 차를 주차타워에 넣고, 내리니 임대인이 다가왔어요.
임대인은 키 180cm가 넘고 몸무게는 100kg가 넘을 것 같은 거구의 40대 초반 남성입니다.
이 날은 클러치를 들고, 뱀이 그려진 구찌 맨투맨을 입었더군요. 스스로를 집주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아...,” “씨...,” “하...” 같은 외마디 음절만 내뱉으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한참 동안 본론을 듣지 못한 제가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라고 묻자 몇 번의 한숨과 탄식이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한동안 보더니 제게 말했어요.
“그냥 사시면 안 돼요?”
“…?”
“아니, 그냥 이 집 계속 사시면 안 돼요? 제가 지금 당장은 보증금을 돌려드릴 돈이 없어서…”
“네?”
“하… 돈을 안 드리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제가 지금 사정이 좀 그래요. 그냥 보증금 안 올릴 테니까 사세요, 이 집에.”
“… 제가 저번에 중개사 바꾸면 보증금 올려도 계약연장하겠다고 했는데 거절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법적 통지기간 안에 연장 의사 없다고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이미 새로 들어갈 집을 구했어요.”
“중개사 바꾸려면 바꾸고 편할 대로 하시고 그냥 연장하시죠. 특약도 안 넣어도 돼요. 그냥 원하시는 대로 해서, 네? 제가 사업하는 게 지금 목돈이 좀 필요한 상황이라 갑자기 돈을 마련하기가 좀 어려워서 그래요.”
“말씀은 알겠지만, 아직 보증금 마련할 기간도 충분하고 신규 세입자도 금방 구해질 것 같은데 왜 걱정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 집 조건 좋아서 금방 나갈 거예요. 저도 새 집을 구해서 이제와 어떻게 할 수도 없고요. 이렇게 중개사 바꾸는 게 일이 아니었으면 그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3개월 넘게 보증금 계속 올리고 특약 추가하시더니..”
“아니… 제 사정 좀 생각해 주세요. 그냥 사시면 안 돼요?”
“죄송하지만, 이미 이사 갈 집을 구했다고요. 그리고 이렇게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집에 찾아오신 게 불편하네요. 이런 이야기 문자나 전화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찾아오신 거예요?”
“아… 미치겠다. 그냥 좀 제 사정을 생각해봐 주세요. 그냥 사시는 걸로. 네?”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집 앞에서 거구의 남성에게 한숨인지 위협인지 모를 외마디 소리와 함께 일방적으로 자기 사정을 봐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정말 무서웠습니다. 누가 봐도 깡패 같은 외형에, 근거를 더해주는 옷차림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혼자 상대하고 있자니 긴장될 수밖에 없었어요. 의사를 주고받는 상식적인 대화가 되지 않고, 일방적인 이 사람의 “내 입장 좀 봐달라, 그냥 살아라”를 들으며 한참을 “집 금방 팔릴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셔라”는 등, 어르고 달래다 겨우 그가 떠났습니다. 관리실 입구에서 엿듣던 소장에게 가서 궁금하던 걸 물었습니다.
“저분, 저 만나러 오신 거예요?”
“아니, 00 이는(임대인 이름) 그냥 여기 왔다가 온 김에 하영씨 보고 간다고 기다린 거지. 그게…”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소장님은 저 분하고 아는 사이세요?”
“그냥 뭐 좀 아는 동생이에요. 뭐래요?”
“(다 들었으면서 왜 물어보는 거지?) 저 이사 나가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오신 것 같아요.”
“쟤 신림에서 헬스장해요. $$$짐이라고 알아요? 근데 그게 뭐 좀 확장하려고 해서 돈이 없나 봐, 요즘에. 쟤랑 나랑 잘 아는 형동생인데, 쟤가~”
물구나무서서 보아도 깡패 같고, KTX 타고 지나가면서 보아도 깡패 같은 임대인과 지인이라는 게 마치 자랑인 양 젠체하는 관리소장을 보면서, 더 혼란스럽고 착잡해졌습니다.
임대인은 왜 굳이 전화로 해도 될 이야기를 여기까지 와서 한 거지? 내가 언제 집에 올 줄 알고 기다린 거야? 평소 퇴근시간이 고정적인 편이니 관리소장이 그걸 보고 얘기해 준 걸까? 이 인간들 뭐지?
전 집주인하고 지금 집주인하고 관리소장 다 지인들인가? 이거 뭐야?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거 아니야? 이 집 새 세입자 구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리고 공인중개사를 바꿀 수 있었으면 진작에 하지, 왜 이렇게 찾아와서까지 읍소를 하는 거지? 내가 모르는 무슨 문제가 있나? 나 위협당한 거야? 이 집에 있는 거 안전한 거 맞아? 이 집 안전하게 이사 나갈 수 있는 거 맞아?
임대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읍소(위협) 이후, 혼란스러움과 불안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지만 그런 스스로를 돌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ㅇ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 이 집, 최근에 등기부등본 확인해 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