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세사고 이야기 (1)

by 도시관측소

Written by 양하영



보일러 수리비 문제로 중개사와 갈등을 겪으며 "원래 그렇다", "상식적으로 다 그렇게 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었다. 중개사는 중립적이기보다 임대인의 입장에서 임차인을 기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5년 4월 22일,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하는 민간임대 청약에 당첨되었습니다. 5평 반, 방 한 칸의 작은 공간이지만 다시 독립된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기쁩니다. 그리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지난 두 달간 눈물로 작성한 저의 전세사기 연구계획서가 지원사업에 최종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좋은 소식이 연달아 오니 벙벙했지요.


집에 가 아버지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데 왜 너는 즐거워 보이지 않니,라고 물으셨고 그게 내가 요즘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이유 중 하나야 라고 답했습니다. 좋은 소식이고, 기쁜데요, 웃음이 잘 나지 않습니다. 매주 진행되는 상담은 저의 증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사 선생님은 언제부터 그랬냐는 질문을 주고받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작년 이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년의 일들도 부정적인 기억으로 얼룩이 많이 져 사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니면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그럴지도요.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서도 오랫동안 건드리지 못한 채 외면하고 방치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아마 횡설수설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복기하고 기록하지 못했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여기에, 어떤 꾸밈도 없이,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이라는 마음으로 올려보려 합니다. 장황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라 이 글을 읽으실 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2020년 9월,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관악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강서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청년 여성 1인가구는 청년 남성 1인가구에 비해 안전한 주거를 위해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관악구에서 안전한 집을 찾기 위해 저도 큰 비용을 치러야 했습니다.


대로변에 가깝고, 보안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주변에 술집이나 유흥시설이 많지 않은 곳을 찾다 보니, 신림이나 서울대입구보다 상대적으로 비싸지만 안전한 느낌을 주는 낙성대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서구에서 살던 집의 2배가 넘는 전세 보증금을 마련해야 했지요.


낙성대역 앞 'ㅇ오피스텔', 제가 4년 4개월을 머문 공간입니다. 이 건물은 근처의 ㅅ부동산에서 일괄 관리하고 있습니다. 세입자인 제가 임대인과 직접 연락할 일은 없었고 모든 연락은 부동산을 통해서 이루어졌어요.


그리고 2년 뒤, 재계약을 할 때가 되었지요. 공인중개사는 임대인이 보증금을 올리길 원한다고 했고, 조정 끝에 보증금 1천만 원을 증액하여 계약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사이 중개사는 제게 전화해서 임대인이 사업을 하는 분인데 일하시다 보니 바빠서 세금 미납건이 있어 집에 압류가 걸려있다고(개소리죠), 압류 해제되면 재계약 서류를 작성하자고 연락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8월, 압류가 해제되었다고 계약서를 작성하러 부동산에 오라고 했죠. 계약 당일 부동산에서 만난 집주인은 2020년에 만났던 집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첫 계약 당시 만났던 사람도 임대인이 아닌 임대인의 형제인 대리인이었는데, 이번엔 아예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이 사람에게서, 2년 전 신림에서 집을 보러 다닐 적에 보았던, 형광 반바지를 입고 클러치를 옆구리에 끼고 담배를 피우면서 길바닥의 쓰레기를 발로 차던 사람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애석하게도 2022년의 저는 사람을 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풍기는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날의 기록에 남아 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중개사에게 언제 집주인이 바뀐 것인지 물었지만 좀 됐다는 하나마나 한 대답만 들었고, 왜 임대인이 변경되었는데 계약당사자인 나에게 고지해주지 않았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그간 ㅅ부동산의 태도로 보아 속 시원한 답은 듣지 못할 것이 뻔했고, 뭘 그런 것까지 요구하냐는 식으로 빈정대는 소리를 들을 것을 알면서도 말은 꺼냈지만 역시나 반응은 … 예상을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더 따지고 묻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ㅅ부동산과는 처음 계약할 때부터 고압적인 언행으로 사소한 갈등이 있었는데, 거주하는 동안에도 몇 차례 충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보일러가 고장 나서 부동산에 연락을 했고, 수리비가 발생했지만 비용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 번 더 부동산에 연락해 임대인에게 비용 청구해 달라 요청했지만, 답이 없었고 비용이 크지 않았기에 제가 부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한번 더 같은 일이 생겼어요. 보일러 수리를 어떻게 할지 물어보니 직접 처리하라고 하기에 그럼 지난번처럼 수리하고 비용 청구할 테니 송금해 달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ㅅ중개사 왈,


“그런데요, 원래 10만 원 미만의 수리는 임차인이 부담하는 거예요.”


“네? 그래요?”


“네, 상식적으로 다 그렇게 해요. 다른 호수들도 그렇고 수리비 10만 원 넘어가면 그건 임대인이 부담하구요.”


“아..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어떤 규정이 있는 걸까요? 그 규정을 제가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뇨, 판례가 있어요. 법적으로 10만 원 미만은 임차인이, 이상은 임대인이 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러면 판례번호를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볼게요. 번호 알려주시겠어요?”


“네,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ㅅ공인중개사에게 다시 연락해서 판례번호를 알려달라 물어보니 말을 바꿉니다. 늘 그렇듯이…


“21년부터 계약한 분들한테는 특약에 10만 원 미만 수리비는 임차인이, 이상은 임대인이 낸다고 적었는데 411호는 그게 빠져있네요. 그런데 통상 그렇게 하니까 소액은 그냥 임차인이 부담해요~ 상식적으로 원래 다 그렇게 해요. 그게 일반적인 거예요. 정 그러시면 반반씩 내시든가요.”


“반반요? 그럼 제가 저번에 부담했으니, 이번은 임대인이 전액 내세요.”


이 과정에서 무수히 들었던 ‘원래 그런거다’라는 말, 그 속에서 중개사가 자신을 임대인에게 투영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중립적이기보다 임대인에 가까운 입장을 보여주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작은 갈등에서도 중개사는 ‘상식적으로’, ‘일반적으로’, ‘보통은’ 같은 표현들을 반복하며 임차인을 기만하였음을 여러분들도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무책임하고 편향적인 중개사를 상대하는 일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


출처

*장재원. 2021. 청년 여성이 재현하는 집의 의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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