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니즘이 키운 도시, 두 번째 이야기
Written by 김세훈
결국 18세기 말~19세기 초 도시화의 급격한 진전은 단순한 인구 이동의 결과가 아닙니다.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자본'이 마침내 더 높은 수익률과 생산성을 찾아 유동화되고 그 일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역사적 대전환의 결과입니다.
앞의 글에서 1800년을 전후로 인류가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고 했는데요. 여기서는 이런 변화가 전 지구적 도시화로 이어진 두 번째 이유를 다뤄보도록 하죠. 그 주인공은 '자본', 즉 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하면 그저 '돈'을 떠올리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누구를 위해 돈이 축적되고 쓰이는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서는 "부강한 국가란 어떤 나라일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이 나옵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국가나 왕족의 창고에 금은보화가 많이 쌓여있는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아닙니다. 부강한 나라란 국민들이 소비할 물자가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관점의 전환이었죠.
중세 시대의 장원 경제나 식민지 개척을 통한 약탈 경제로는 국민 전체가 풍요로워지기 어렵습니다. 함대나 군사에 투자한 왕족은 중개무역과 약탈로, 태생부터 금수저인 농장주는 노예를 통한 장원 경영으로 더 부유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축적된 부는 좀처럼 일반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았죠. 국민들이 소비할 물자 전반이 풍요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시민을 위한 부가 쌓이려면 사회 전반의 ‘분업화’와 ‘전문화’가 필수입니다. 쌀농사를 잘 짓는 사람은 쌀 수확에 집중하고, 모자를 잘 만드는 장인은 모자의 품질을 높이는 데 집중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건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고, 그 가격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사회 전체에 유통되는 물자가 풍부해지고, 이에 기여한 사람들은 혜택을 나눠 갖게 됩니다. 이는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죠.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는 일에 몰두하고 이를 더 넓은 시장에서 팔기 위해 서로 가까이 모일 필요가 생겼습니다. 숙련된 장인, 안목 있는 투자자, 제품을 파는 상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밀집한 도시는 상품과 정보가 교환되기 쉬운 장소였죠.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일자리와 거래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 시민정치 발달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계층 간 권력과 의사 결정이 전통적인 신분이 아닌 생산성과 의지를 중심으로 투명하게 논의, 조정될 수 있었습니다. 세계 3대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혁명, 미국 독립전쟁, 영국 명예혁명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일어났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혁명의 결과로 왕과 귀족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시민주의와 자본주의 시대가 동시에 도래했다는 점이죠. 결국 분업화, 전문화, 자본주의, 시민정치의 도래는 1800년 전후로 전 세계 도시화율 급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파리, 암스테르담, 뉴욕에 등장하면서 글로벌 자본의 흐름도 활발해졌습니다. 자본은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었습니다. 18세기 초 영국 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이자율은 3% 대로 하락했습니다. 100년 전에 비해 불과 3분의 1 수준입니다.
정부 발행 채권의 이자율은 정부가 돈을 빌리기 위해 지급해야 할 이자의 비용을 의미합니다. 국가가 도로나 항만을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할 때 이자가 줄어들면 산업 인프라 조성에 요구되는 재정 부담이 낮아지죠.
산업화 초기의 기업도 제조와 운송시설을 갖추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합니다. 이자율이 낮으면 투자와 소비를 늘리는 데 유리합니다. 결국 돈의 힘으로 기업은 공장을 짓고 더 좋은 물건을 만들어 세계로 수출할 수 있었고, 정부는 전쟁 비용을 조달해 무역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경쟁국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8세기 말~19세기 초 도시화의 급격한 진전은 단순한 인구 이동의 결과가 아닙니다.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자본'이 마침내 더 높은 수익률과 생산성을 찾아 유동화되고 그 일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역사적 대전환의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