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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필 Sep 28. 2020

쓸쓸했던 류블라냐, 따뜻했던 민박집

시계방향으로 동유럽 훑기 여섯 번째 도시, 슬로베니아 류블라냐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라냐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



민박집을 나와 자그레브 중앙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번 목적지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 이번에도 FLIX 버스를 이용해서 떠나기로 했다. 자그레브에서 류블라냐로 가는 기차가 없기 때문이다. 헝가리 밑 지역,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최근까지 이어진 내전으로 아직 서유럽에 비해 발전이 덜 됐기 때문에 기차가 별로 없는 거 같다. 나야 뭐 싼값에 나라 간을 이동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자그레브에서 류블라냐 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해외에서 더 빛나는 내 노랑 여권



슬로베니아 역시 입국할 때 여권 검사를 해야 한다. 버스 여행 중 여권 검사는 이미 크로아티아로 올 때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여권을 챙겨 버스에서 나왔다. 크로아티아로 들어올 때와 다른 점은 이번엔 직원이 버스로 직접 타서 검사하지 않고 여행객이 일일이 나와서 공항 검색대 통과하듯이 심사를 받는다. 여행을 하면서 노란 여권에 찍혀가는 도장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했다. 왠지 컬렉션을 모아가는 느낌이랄까. 아직 해외를 자주 나가보진 않았지만 언젠가 전 세계의 여권 도장들을 모으고 말 거라고 다짐했다.


류블라냐 중심가


여권 심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로베니아에 도착했다. 슬로베니아는 유럽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는 작은 국가다. 수도는 류블라냐로 동유럽과 남유럽의 경계 역할을 하지만 지리상으로 발칸반도에 위치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이어서 남유럽으로 분류하는 편이다. 또한 아직까지 한국인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끔 슬로베니아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를 혼동하기도 한다. 둘 다 동유럽 쪽에 위치해있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국경으로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외국 사이트에선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스트리아보다 더 헷갈리는 국가라고도 말한다. 크로아티아와 더불어 1990년대에 독립을 한 아직 따끈따끈한 신생국가 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한인민박


류블라냐 거리


버스에서 내려 우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이번에도 한인민박을 이용했다. 한인민박은 나같이 유럽에서 생활하는 학생에게 단비 같은 존재다. 특히 나같이 사는 곳에 한인 커뮤니티가 없다면 더더욱. 우선 값이 저렴하고 한식과 여러 곳에서 온 한국분들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류블라냐 민박집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라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깔끔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슬로베니아는 오로지 한인민박 하나만 보고 찾아왔다. 자그레브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혼자 민박집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꼭 또래 친구들을 만나리라!


민박집 마당

민박집에 도착하니 젊은 사장님께서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깔끔하고 넓게 퍼진 앞마당과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주택형이라 마치 한국 시골집에 온 듯이 아늑했다. 같은 날 예약한 사람들도 3명이나 있다고 했다. 드디어 유럽에서 또래 한국분들을 만났단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여행지에서는 한국에 온 듯이 편하게 쉬고 갈 수 있을 거 같다. 실은 류블라냐에 도착하기 전부터 느낀 거지만 개인적으로 슬로베니아가 한국과 어딘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민박집에 걸어오면서 본 주택가들도 한국 시골 골목길 같았고 버스를 타며 오던 풍경도 외국어로 적힌 표지판만 아니면 한국이라고 해도 될 만큼 비슷했다. 그 이유는 아마 "산" 때문일 것이다. 슬로베니아에 오는 동안 유독 한국과 같이 산이 많다고 생각했다. 슬로베니아도 알프스 끝자락에 위치한 나라이기 때문에 국토가 대부분 산지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사장님은 슬로베니아를 소개할 때 "가성비 알프스"라고 하신단다. "가성비 알프스"라는 말이 참 웃기면서도 와 닿았다. 알프스 여행하면 떠오르는 살인적 물가의 스위스, 이탈리아보다 동유럽 특유의 값싼 물가에 알프스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신다.


우중충한 류블라냐


조그마한 천이 중심가를 가로지르고 있다


민박집에서 저녁에 고기 파티를 하기로 하고 우선 류블라냐 시내로 나왔다. 저녁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한인민박 하나만 보고 계획 없이 왔기 때문에 구시가지만 뚜벅이로 구경하기로 했다. 류블라냐 구시가지 역시 유럽 도시와 마찬가지로 작은 강을 끼고 있다. 항공에서 보면 마치 한국 정선의 한반도 지형처럼 강이 삼면을 타원형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중앙에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 바로 류블라냐 성이 있다.


강 너머로 보이는 류블라냐 성


강 너머로 보이는 류블라냐 성이 날씨 때문인가 더욱 우중충해 보인다. 쌀쌀한 분위기와 성이 마치 드라큘라 백작을 연상시키지 않은가? 실제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의 트란실베니아 지역이 원조지만 어두운 날씨와 만화에서 본 듯한 사각진 성이 내 머릿속에 드라큘라라는 이미지를 자꾸 떠오르게 했다. 류블라냐 성을 가려면 직접 걸어서 올라가거나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갔을 때는 공휴일이라 버스가 운행하지 않았다. 직접 걸어서 사진이나 찍고 오려고 했으나 올라가는데만 30분이 넘게 걸린다는 말을 듣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류블라냐는 용의 도시가 아닐까?


류블라냐 거리가 더 우중충해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거리 곳곳에는 용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서양에서 용은 동양과 달리 무섭고 악마에 가까운 이미지다. 용의 모습도 동양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기괴하고 언제든 날아가서 뭔가를 잡을 듯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색깔도 빛바랜 청동색이다. 이런 석상들이 즐비한 거리를 걷다 보니 오히려 날씨가 우중충할 때 오게 돼서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밝은 하늘에 이런 거리라면 괴리감이 느껴졌을 거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우중충한 류블라냐 거리에 밝은 빛의 건물이 나타났다. 바로 류블라냐의 랜드마크 성 프란체스코 성당. 핑크 성당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심플한 외관과 파스텔톤의 색깔이 베트남 다낭의 핑크 성당과 똑같았다. 이 건물 역시 아기자기한 모습과는 달리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성당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류블라냐 구시가지의 중심인 거 같았다.


츄러스와 초코 퐁듀, 앞으론 유럽의 붕어빵이라 부르겠다


길을 걷다 잠시 요기나 채울 겸 츄러스를 사 먹었다. 가격은 놀랍게도 초코크림까지 합해서 단돈 3 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4천 원 정도 되는 싼 가격이다. 츄러스 맛은 바삭바삭한 맛이 아닌 쫄깃쫄깃한 빵을 먹는 느낌이다. 추운 날씨에 츄러스를 따뜻한 초코 퐁듀에 찍어먹으니 쌀쌀했던 느낌이 녹아내렸다. 한국에서 추울 때 호떡이나 붕어빵을 사 먹듯 남은 유럽의 겨울에서는 츄러스에 초코 퐁듀를 먹어야겠다.


류블라냐 야경


적어도 야경은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츄러스를 먹으며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자 강 양쪽에서 불빛들이 켜졌다. 거리가 낮과 달리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류블라냐는 어둠이 내렸을 때 더 활기차 보였다. 여기도 낮보다 밤이 더 긴 도시인가 보다. 강 옆에 펼쳐진 노상들과 불빛들... 이런 분위기,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도 느껴본 거 같은데.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워 한참을 다리 위에 서있다 민박집으로 돌아갔다.


 

따뜻했던 민박집



민박집 사장님이 차려주신 저녁


쌀쌀한 바람이 부는 추위를 뚫고 민박집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확 덮쳐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마당이 달린 시골집에 살았는데 딱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집에 들어가면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에 온 거 같았다. 맘에 들었던 건 바로 화장실까지 난방이 들어온다는 거! 유럽에서 겨울 내내 쬐끄만 라디에이터에 의존하며 덜덜 떨면서 살다가 온돌이 되는 집에 오니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유럽의 난방시스템은 라디에이터와 히터 밖에 없다. 심지어 라디에이터도 그 주변만 온도가 미적지근 해질 뿐 난방에는 도움도 안 되고 공기만 건조해진다. 평소에 추위를 잘 타서 호텔에 묵을 때마다 꼭 히터를 추가로 요구했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따뜻하게 자리라. 이런 따뜻한 집이라면 방이 아닌 화장실에서도 잠들 수 있다. 저녁은 사장님이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주셨다.


슬로베니아 맥주


저녁을 먹고 다른 여행객 분들과 맥주를 마셨다. 나이는 서로 비슷했지만 공통사가 없으니 대화 주제는 당연히 여행. 여행객 한분은 한 달 동안 유럽 전체를 돌아다닐 예정이었고 다른 분은 동유럽만 볼 예정이라고 하신다. 서로 이미 갔다 온 곳과 꼭 봐야 할 곳과 가야 할 맛집들을 알려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특히 사장님이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성을 꼭 가보라고 알려주셨다. 내가 놀란 건 이 작은 신생국가인 슬로베니아도 여행지가 아주 많다는 거. 가성비 알프스라는 나라, 이럴 줄 알았으면 슬로베니아에 일정을 2일 더 추가하는 건데 많이 아쉬웠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새벽을 넘어갔다. 아쉽지만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기로 했다.


민박집 아침밥


아침은 된장국과 쌀밥, 한국식 전으로 차려주셨다. 된장국이라곤 구경할 수 없는 자르브뤼켄 촌놈인 나에게는 쌀밥과 미소된장만 있어도 기가 막힌 진수성찬이다.



사장님이 써주신 작별(?) 편지


아침밥을 먹고 다음 여행지인 트리에스테를 갈 짐을 챙겼다. 집을 나서기 전 사장님께서 내가 27번째 게스트랑 말과 함께 직접 편지를 써주셨다. 실은 손님이 몇 명이 왔다 가는지도 헷갈리실 텐데 이렇게 몇 번째인지 알려주시고 내 자화상(?)과 함께 편지까지 써주시니 정말 감동이었다. 무 좋은 추억 쌓고 가는지라 다음엔 27번째가 아닌 127번째에 꼭 들리기로 했는데, 독일에 있는 동안 가끔씩 고향집 들리듯이 오고 싶었지만 슬로베니아 쪽으로 올 일이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찾아가리라. 코로나가 끝나면 다음번엔 27번째가 아닌 1000000027번째라도! 실제로 민박집에서 잤던 게 추억에 남아 지인들한테도 동유럽에 가면 슬로베니아와 저 민박집은 꼭 들르라고 추천해 주곤 한다. 저 편지는 아직까지도 보관하고 있다. 이제는 만료가 돼버린 내 노랑 여권 사이에. 언젠가 찾아갈 땐 저 편지를 꼭 보여주리라. 그리고 그때 저 기억하시냐고, 하룻밤 정말 잘 묵고 갔다고 꼭 전하리라.


가성비 알프스, 블레드 성에 들러보시는 건 어떤가요?



알프스 산자락과 호수에 둘러싸인 블레드 성


내가 슬로베니아에 갔다가 들리지 못해 아직까지도 땅을 치며 후회를 한 장소가 있다. 바로 블레드 성!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호수에 작은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에 동화에 나올법한 성이 하나 우뚝 서있다고 한다. 사장님이 슬로베니아에 오면 꼭 들려야 된다고 적극 추천하신 곳인데 내가 슬로베니아 일정을 1박 2일로 잡아 들리지 못한 곳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슬로베니아에 하루를 더 투자했을 텐데... 알프스의 만년설과 자연을 보고 싶으나 살인적인 스위스 물가가 두려우신 분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슬로베니아 지역에 들러보시는 건 어떤가? 스위스에서는 한 끼당 최소 3만 원씩을 쓴데 비해 슬로베니아에서는 만원 조차 쓰지 않았다. 가성비 알프스라 불리는 곳. 이번에 못 간 이곳이 내가 다시 슬로베니아에 갈 빌미가 되어 주겠지. 혹시 나처럼 동유럽을 여행하실 분이라면 꼭, 정말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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