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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필 Oct 05. 2020

트리에스테, 아드리아해의 붉은 노을

시계방향으로 동유럽 훑기 일곱 번째 도시, 트리에스테 이탈리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아드리아해가 보이는 트리에스테


정들었던 민박집을 나와 류블랴나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이번 목적지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실은 발칸반도 밑으로 더 들어가 몬테르노, 마케도니아, 그리스까지 가고 싶었지만 시간상 남은 크리스마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고 예산이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 슬슬 다시 독일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아마 발칸반도를 넘어 그리스까지 갔다면 욕심이 나서 터키까지, 그리고 이집트까지 밟고 싶어 졌을지도 모른다. 구글 지도를 펼쳐보니 많이 오긴 했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이탈리아 땅도 밟고 유럽의 바다도 보고 싶어서 류블랴나 근처 트리에스테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다.


트리에스테로 향하는 2층 FLIX 버스


급하게 표를 구했더니 이번엔 2층에 있는 좌석으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류블랴나에서 트리에스테까진 1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지만 덕분에 트리에스테로 들어가는 동안 넓게 펼쳐진 바다를 구경하며 갈 수 있었다. 독일에서 거주한다면 (함부르크 같은 도시가 아니라면) 바다를 볼 일이 거의 없다. 독일에 접한 바다는 독일 북부 북해 밖에 없다. 사실상 내륙국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사는 자르브뤼켄 사람들 대부분은 해산물을 먹기를 조금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한 친구는 일식집 새우튀김의 대가리를 무서워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트에서 판매하는 몇 없는 해산물마저도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다. 하긴 나도 국경지대를 넘어 프랑스 마트에서 해산물을 사 오곤 했으니깐. 번 트리에스테의 아드리아해가 내가 독일에 와있는 동안 처음으로 만난 바다이다. 바다 도시니까 아무래도 해산물 음식이 맛있을 거다. 저녁 메뉴는 와인에 해산물 리조또를 꼭 먹기로 결심했다.


이탈리아 반도 너머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의 바닷가


트리에스테에 도착하니 짠 바다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바닷가 쪽으로 가보니 넘실거리는 바닷물과 선착장에 놓여있는 요트들이 즐비했다. 위치상 트리에스테는 부츠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가 아닌 반도 밖에, 엄밀히 말하면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반도 건너편에 위치해있다. 고로 트리에스테의 바다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말은 즉 바다를 보며 노을을 구경할 수 있다. 트리에스테는 항구 도시다. 이탈리아 바다라고 하면 우린 할리우드 스타들이 휴양을 가는 이탈리아의 휴양지를 생각한다. 이와는 다르게 트리에스테는 신성로마제국 시대부터 자유도시로 발전돼온 도시다. 최근에는 중국이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 투자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여기에 묵는 동안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을 본 적이 없다. 아직까진 여행지로서, 비즈니스 도시로서 이방인들이 모이진 않는 거 같다. 베네치아에서 트리에스테는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수많은 인파에 물렸다면 트리에스테로 방향을 틀어보는 것도 좋은 여행 방법인 거 같다.


트리에스테 아파트먼트


이번에는 호텔이나 민박이 아닌 아파트먼트 한 채를 숙소로 정했다. 아파트 집 한 채나 호텔값이나 비슷비슷했고 같은 유럽 이어도 게르만 문화인 유럽 북부 국가들, 라틴문화인 유럽 남부 문화 차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트리에스테의 아파트는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침실, 화장실이 따로 있었고 현관문과 부엌과 거실이 공용으로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기도 유럽인지라 라디에이터를 난방기기로 쓴다는 점. 나같이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겐 정말 고역이다. 그래도 붙박이장 안에 여분의 이불이 많이 있어서 오늘 밤은 이불 여러 개를 덮고 자기로 했다.


트리에스테 거리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나와 1층 경비 직원한테 트리에스테에 볼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직원이 정말 과하게 친절할 정도로 트리에스테 지도와 함께 이곳저곳 볼 것과 식당들을 알려줬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말할 때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느긋함이 있다. 게다가 친절함은 덤으로.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여긴 베네치아와는 달리 한국인이 한 명도 없다며 한참 동안 수다를 시작하신다. 대화를 나눠보니 BTS 팬. 숙소에 불편한 것이 없냐고 묻길래 추위를 잘 타서 밤이 걱정이라니까 자기가 쓰던 히터를 빼서 주셨다. "Lovely Koreans, My friend"라는 말과 함께. 유럽에 와서 늘 느끼는 거지만 정말 한국이라는 국적은 어디에서나 알아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이자 무기이다.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 유적


트리에스테 거리


대화를 마치고 트리에스테 거리로 나왔다. 트리에스테 거리는 여타 바닷가와 접한 도시들이랑은 달리 깔끔하고 웅장한 건물들로 정리되어있었다. 경비 직원 말에 의하면 콜로세움처럼 트리에스테에도 아주 작은 소형 경기장 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난 이탈리아 반도 쪽으로는 내려갈 생각이 아예 없었기에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은 못 보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거 완전 럭키다. 이런 매력적인 도시에서 아쉬운 점은 트램이 다니지 않는다. 심지어 버스도 시간표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걸어 다니기로 했다. 이런 점은 바닷가와 접한 여타 도시랑 비슷하다. 나야 어차피 구경이 목적이라 걸어 다녀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여유로운 트리에스테 거리를 천천히 구경하며 원형경기장으로 걸어갔다.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유적


지도를 보며 걷다 보니 주택들 사이로 반쯤 무너져버린 경기장이 나왔다. 콜로세움과 비교하면 크기가 작았지만 용도와 모습은 비슷했다. 원형으로 된 경기장 가에 관객들이 앉아있고 저 중앙에서는 배우들이 연극을 하거나 연설자가 대중들에게 연설을 했을 거다. 혹은 콜로세움처럼 격투장의 용도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경기장이 원형으로 생긴 탓에 중앙에서 공연을 하면 현대식 마이크가 없어도 소리가 웅장하게 들렸을 거다. 이렇게 완벽하게 설계된 건물이 천년도 아닌 무려 2천 년 전에 세워졌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역사엔 IF는 없다지만 로마 시대의 기술이 남아서 현대까지 전해졌다면 우린 좀 더 발전된 세상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해 2천 년 전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가 막 세워지던 시기인데 우리도 이런 기술이 있었을까? 혹시 있었는데 잊혀진건 아닌가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트리에스테 중심가


웅장한 건물들


원형 경기장 유적을 보고 다시 트리에스테 중심가로 거리를 걸었다. 트리에스테에는 원형경기장 같은 유적뿐만 아니라 다른 건물들도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다. 방금 지어진 듯한 건물들처럼 보이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돼 온 건물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오래됨 이란 적어도 2백 년 정도를 뜻한다. 그럼에도 건물들에 녹슬음과 같은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트리에스테 시청


건물들은 대체로 깔끔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웅장하다. 시청 건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사각형 건물에 큼직큼직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베이직 색의 톤에 금태를 두른 장식들도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이런 비슷한 건물 스타일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브뤼셀의 시청은 시커멓게 때가 껴 좀 더 오래된 느낌인 반면 트리에스테 시청은 전혀 그렇지 않다.



트리에스테 운하


시청 주변은 바닷가로부터 들어온 물로 운하를 이루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라 하기에는 짠내와 건물이 세련 돼있고 베네치아라 하기에는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다. 운하 양 옆은 식당가가 즐비해있다. 트리에스테의 한적하지만 세련된 도시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곳. 고소한 크림 파스타 냄새가 나는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트리에스테 곳곳에 새겨진 동상들


트리에스테에 와서 신기했던 점은 거리 곳곳에 광장이 있고 광장 중심엔 다양한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동상은 역사적 인물에서부터 신화적 인물까지 다양한데 대체적으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인어들에 대한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다. 아마도 이는 트리에스테가 그리스 로마 신화가 펼쳐졌던 배경이자 바닷가를 접하고 있는 도시여서 그런 거 같다. 마치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에 보관돼있을 듯한 이 동상들을 보니 트리에스테는 거리 자체가 박물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드리아해 너머로 지는 붉은 노을



트리에스테의 붉은 노을


거리 곳곳을 돌다 보니 어느덧 해 질 때가 돼서 다시 트리에스테 바닷가로 돌아왔다. 완벽한 지평선 너머는 아니었지만 바닷가 너머로 붉게 물든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노을 시간이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바닷가 광장으로 넘어왔다.


아드리아해 너머로 지는 노을


트리에스테의 노을을 본 느낌은 뭐랄까 어떻게 표현이 되질 않는다. 마음속이 웅장하기도 하고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차오르기도 하다. 왜 그런 걸까. 저 너머로 지는 노을이 아름다워서인지, 머나먼 땅에서 쓸쓸히 지는 저 해를 보기 때문인지, 넘어가는 노을과 거기서 비친 어두운 역광이 어쩐지 슬퍼져서인지. 알 도리가 없다. 군대에 가기 전 아라비아 사막 한복판에서 노을을 본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사막 모래언덕 위에서 쓸쓸하게 불어오는 모래 바람, 붉고 거대해진 태양을 보고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게 내가 그때보다 성숙해져서 인지 트리에스테만의 분위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해가 지는 게 어딘가 아쉬워 저 지평선 저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조용히 끝까지 지켜봤다.


트리에스테의 해산물 리조또 그리고 야경


밤의 트리에스테 시청


노을이 다 지자 다시 트리에스테 시청으로 넘어왔다. 해가지자 거리는 밝은 불빛들로 채워졌다. 이게 또 다른 유럽 도시와는 다르다. 보통 유럽의 전등들은 오렌지빛의 약간 어두운 빛인데 여기는 한국처럼 밝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는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였지만 아직 크리스마스트리가 시청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


해산물 리조또와 와인 한잔


저녁 시간이 되자 드디어 고대했던 아드리아해의 해산물을 먹으러 한 식당에 들어왔다. 식당은 일부러 트리에스테 중심가가 아닌 골목길 사이에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왔다. 유럽에서 해산물이라 하면 대구 구이가 유명하지만 어쩐지 구워진 것보단 파스타나 리조또가 먹고 싶어서 식당 셰프가 추천하는 해산물 리조또를 먹기로 했다. 식당에서 직접 담근 레드 와인 한잔과 함께. 바닷가 도시라 그런지 해산물은 대체적으로 신선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리조또라하면 파스타 소스에 비빈 느끼한 밥이 생각나는데 여기선 크림 베이스였지만 느끼한 맛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쌀은 동양에서 먹는 푹 익힌 쌀이 아닌 설익은 살짝 딱딱한 밥이었다. 살다 살다 머나먼 아드리아해에서 이탈리아 해산물을 맛보다니. 내가 독일어를 배우지 못했더라면, 교환학생에 도전하지 못했더라면 겪어보지 못했을 일이다. 이런 걸 맛볼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하면서 마지막 남은 쌀 한 톨까지 다 먹어치웠다.


포세이돈 동상


와인의 알딸딸한 기운과 함께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트리에스테 거리를 방황했다. 방황하다 눈에 띄는 동상을 만났다. 어디서 본듯한 저 비주얼! 그리스 로마 신화의 포세이돈이 틀림없다. 트리에스테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곳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지만 발칸반도 맨 위쪽에 있는 이곳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는 게 좋았다. 신이지만 인간과 같은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는 천방지축인 신들이 좋았던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동상


적막한 밤바다


밤의 트리에스테


한참 거리를 걷다가 마지막으로 바닷가만 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밤이 되자 밝은 빛의 도시와 잠잠해진 어두운 바다가 대조됐다. 저 멀리 중심가 쪽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백색소음만이 들리는 적막한 곳. 세계 어디에서든 밤바다는 내게 어딘가 아쉬운 듯한 느낌을 준다. 해외여행 중 한번 갔던 곳은 웬만하면 가지 않고 새로운 곳을 더 가보자는 게 내 여행 철학이지만 트리에스테는 한 번쯤은 더 와도 될만했다. 관광이 아닌 휴양으로. 그 유명한 베네치아랑도 기차로 1~2시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올 이유는 충분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여기는 유명해지지 않았는가 의문이다. 베네치아 근교 도시로 묶어 다니면 충분히 유명해질 만한데... 아쉬운 밤바다를 뒤로하며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찍은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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