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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필 Sep 20. 2020

크로아티아에서 받은 고추장 하나

시계방향으로 동유럽 훑기 다섯 번째 도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EU 쉥겐 국가 밖, 크로아티아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전경


부다페스트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가기 위해 아침부터 부랴부랴 챙겨 호텔을 나섰다. 부다페스트에서 자그레브로 갈려면 오스트리아를 경유하는 열차보단 직행버스가 더 편하므로 FLIX 버스를 이용했다. 시간은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참고로 기차는 환승을 바로 했을 시 6시간 정도 걸린다. 대부분 유럽 여행하면 기차 여행을 떠오르는데 나는 기차보단 FLIX버스를 병행해서 여행하는 걸 추천한다. 기차는 노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고 비용도 비싸다. 반면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유럽 곳곳에 쉽게 갈 수 있고 가격도 싸다. 단점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뮌헨 노선처럼 몇몇 노선은 기차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시간 이외에 다른 단점은 없다 버스 뒷칸에 화장실도 구비돼있고 한국처럼 중간중간 휴게소에서 쉬면서 기차여행과는 다른 기분을 낼 수도 있다.


비쉥겐국가 검문소


버스 안에서 잠깐 잠이 들려는 찰나 버스가 멈춰 섰다. "엥 아직 자그레브 까지는 멀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기웃거렸더니 검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버스 기사가 여권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웬 여권 검사인가 싶어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더니 크로아티아는 쉥겐조약이 되어있지 않아서 이미그레이션을 해야 한다고 했다. 쉥겐조약이란 EU 국가 간 여권 검사 없이 무비자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조약을 말한다. 즉 크로아티아는 쉥겐조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국가이므로 입국 시 우리가 외국에 들어가듯이 여권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당연히 그동안 유럽 국가 간을 자유롭게 드나들었기에 이런 건 생각도 못했다. 버스기사가 곧 여권을 모두 걷어 가져 가고 검문소 직원이 버스에 올라타 여권과 사람을 일일이 확인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OK 사인이 떨어졌고 버스는 검문소를 지나 다시 자그레브로 향했다. 내가 무사히 크로아티아 땅에 들어온 걸 환영이라도 하듯이 핸드폰이 크로아티아 국가 방문 시 유의사항들에 대한 문자로 알람이 끊이질 않았다.


자그레브 한인 민박집으로 가는 길


검문소를 통과한 뒤 30분도 안돼서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자그레브는 요 몇 년간 떠오르는 동유럽의 여행지, 붉은 지붕들이 즐비한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크로아티아는 엄밀히 말하자면 동유럽보다는 발칸반도 남유럽에 속한다. 아드리아해의 숨은 보석이라고 불리며 예전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의 하나로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있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지만 굉장히 작다. 굳이 트램을 탈 필요도 없고 산책하듯이 걸어서 2,3시간 정도면 다 구경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역사적인 관광지나 화려한 여행지를 찾는다면 추천하지는 않는다. 다만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서 동유럽에 동화돼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다. 내가 자그레브를 선택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한인민박! 유럽에서 몇 달간 혼자 있으려니 한국인과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리웠다. 그래서 이번 자그레브는 호텔보단 한인민박을 선택했다. 잘하면 같은 날 여행 온 또래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이번엔 외로운 홀로 여행보다 더 좋은 추억을 남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그레브 식당가 거리


민박집은 자그레브 식당가 사이에 위치했다. 카톡으로 미리 몇 시쯤에 도착할 거라고 말은 해뒀지만 예상시간보단 일찍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께서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아저씨와 자그레브 여행 시 가봐야 할 곳과 주의할 점 등을 이야기하고 짐을 풀려는 찰나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셨다. 친구를 사귈 목적으로 8인실 도미토리 룸을 예약했지만 안타깝게도 손님이 나밖에 없어 그냥 1인실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번 자그레브에서 마저도 혼자 여행을 하게 생겼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혼자 1인실을 쓰면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고 싼값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예 혼자가 아니고 집에 한국인 아줌마 아저씨가 상주하고 있으니 호텔에서 혼자 자는 것보단 덜 외로웠다. 1인실 방에 짐을 풀고 이제 본격적으로 자그레브 탐방을 시작했다.


자그레브 탐방



성 마르코 성당


우선 자그레브를 오면 꼭 봐야 할 곳, 성 마르코 성당으로 올라갔다. 동유럽 여행을 검색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그 건물. 건물 지붕은 크로아티아의 상징인 체크무늬와 국기, 국장이 그려져 있었다. 성당 생김새가 꼭 장난감 레고로 만들어진 것처럼 아기자기해 보이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일반 성당과는 달리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지만 건물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사진에 나와있는 사람들과 건물을 크기를 비교해보면 얼마나 큰지 와 닿을 수 있다. 그리고 성당 옆에 빼꼼히 상대적으로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놀랍게도 저게 바로 크로아티아 국회의사당이다. 그리고 옆으로 쭉 정치와 관련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즉 성 마르코 성당이 위치한 이곳이 크로아티아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건물들 앞에 경호원은 찾아볼 수 가 없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면 더더욱 보안에 신경 써야 될 텐데. 아마도 크로아티아인들이 생각하는 정치활동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권위적이고 딱딱한 정치와는 다른가보다.


자그레브 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 마르코 성당에서 내려가던 중 발견한 뷰포인트다. 새파란 하늘과 붉은 지붕의 레고 같은 건물들, 그리고 우뚝 서있는 성당이 마치 그림 같다. 난 유럽 어느 도시에 가든 높은 곳에서 도심 전체를 내려보는 걸 좋아한다. 특히 산이 없는 평지에 지어진 도시라면 더더욱. 한국은 국토 대부분이 산지라 어느 도시를 가든 산이 도심지를 가로막고 있기에 이렇게 산이 하나 없는 여행지를 가게 되면 마음이 탁 트이는 거 같다. 이런 탁 트인 뷰를 볼 수 있는 데는 날씨도 한 몫했다. 유럽여행은 날씨가 여행 성공도를 좌지우지한다는데 아무래도 여행 날짜를 기가 막히게 잡은 거 같다.  




  

성 마르코 성당을 내려와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향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은 자그레브의 중심 광장이고 중앙에 반 옐라치치 동상이 새워져 있다. 이 광장을 기준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뉜다. 반 옐라치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점령 당시 총독을 맡았던 백작이다. 이 광장에 동상이 세워지기까지 정치적으로 많은 위기를 격었다고 한다. 여러 번 세워졌다 철거됐다를 반복하다가 그가 국가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라고 판단하며 자그레브 중앙 광장에 동상이 다시 새워지게 된다.


자그레브 대성당

반 옐라치치 광장을 지나 이번엔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 본다.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한참 올라가니 아까 반대편에서 봤던 우뚝 솟은 성당이 나타났다. 민박집에서 나눠졌던 지도를 보니 여긴 자그레브 대성당이란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엔 성당 앞은 아직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했고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가니 아기 예수 탄생을 뮤지컬 식으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까치발을 하고 보려고 했지만 180이 기본으로 넘는 유럽인들 사이에선 어림도 없었다. 참고로 크로아티아는 평균 신장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본다.


자그레브 성벽(?)


자그레브 대성당을 지나 좀 더 들어가니 커다란 성벽이 나타났다. 훼손돼지 않은 반듯한 모습이 이게 역사적으로 사용됐던 성벽인지 나중에 관광을 위해서 생긴 성벽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자그레브 골목 사이사이에는 이런 성벽으로 구분된 지역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성벽마저도 아기자기하게 레고처럼 생겼다.


   

크로아티아 흑맥주


걷다 보니 어느덧 다시 민박집 근처 식당 거리로 돌아오게 됐다. 마침 배도 출출해 민박집 아저씨가 추천해준 식당으로 들어갔다. 크로아티아에 온다면 꼭 흑맥주와 폭립을 먹어보라고 하셨기에 서둘러 흑맥주와 폭립을 시켰다. 체코 맥주가 최고라는 생각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는데 크로아티아 맥주 또한 만만치 않다. 흑맥주임에도 불구하고 쓴맛은 하나도 없고 부드러운 단맛과 고소한 곡물향이 확 올라왔다. 아마도 흑맥주만으로는 1위였던 체코 자리를 크로아티아에 넘겨줘야겠다. 게다가 야외지만 야외와 구분되게 지어진 저 유리창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유리창이 없는 완전 노상이라면 먹는데 정신이 없을 텐데 말이다.


자그레브 미술관


밥까지 다 먹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이미 자그레브에서 볼 건 다 봤는데... 아무래도 자그레브는 1박 2일 여행하기엔 너무 작은 거 같다. 민박집에도 나 혼자밖에 없어서 들어가도 심심할 텐데... 이제 뭘 해야 하나 아저씨에게 카톡을 했더니 미술관을 추천해주셨다. 그래 시간 때우는 데는 미술관이 최고지. 미술관은 자그레브 중앙역 앞에 위치해있는데 이번에도 트램은 타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미술관에 전시돼있는 피라미드, 난해하다.


자그레브의 크리스마스


반 옐라치치 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


미술관에서 실컷 구경하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져있었다. 낮엔 눈치채지 못했는데 반 옐라치치 광장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알록달록한 불빛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아직 그 열기는 식지 않은 거 같았다. 이런 불빛들이라면 분명히 위에서 보는 야경도 예쁠 것이니라. 아까 자그레브 전경을 봤던 성 마르코 성당 쪽으로 올라갔다.


자그레브 야경


아까 낮에 갔었던 위치에 다시 가보니 낮의 전경이랑 견줄 만큼의 전경이 나타났다. 유럽의 야경과는 다르게 여긴 지붕에는 어떤 불빛도 나오지 않는다. 불빛은 오로지 자그레브 대성당에서만 나왔는데 그 불빛이 자그레브 구시가지 전체를 밝혀주고 있었다. 밤이 되니까 장난감 같았던 집들이 더욱 레고처럼 느껴졌다. 앞에 보이는 각진듯한 지붕에 파스텔톤의 벽을 봐라. 누가 봐도 장난감으로 세운 거 같지 않은가? 앞으로 자그레브는 레고의 도시라고 불러야겠다.


자그레브의 크리스마스


성 마르코 성당 주변은 아직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있다. 듣자 하니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1월까지는 계속 이렇게 열릴 거라고 한다. 유럽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정말 빼놓을 수 없는 대명절이다. 우리나라는 크리스마스가 지남과 동시에 바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품들을 접어 넣어 내년을 기약하는 반면 여긴 그 뜨거웠던 크리스마스의 여운을 새해까지 끌고 갈 예정인가 보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다음날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은 적이 있다. 확 타올랐던 불이 갑자기 꺼진 기분이랄까, 항상 12월 26일 아침은 뭔가 허무한 기분이었다. 동양인인 나도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크리스마스가 대명절인 유럽인들은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어떤 느낌일까. 더욱 상실감이 클 것이다. 아마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뜨겁게 오른 여운을 아주 천천히, 허무함이 느껴지지 않게 천천히 식히는 거일 수도 있다.


 

아직 남아있는 크리스마스 마켓


크로아티아에서 만난 한국인의 정


한인민박 1인실


한인 민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여행지를 향해 나갈 준비를 했더니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아침밥을 먹고 가라고 하신다. 된장국이 반찬들 만들어놨다고. 2층 부엌으로 올라가니 하얀 김이 피어나는 쌀밥과 정갈한 한국 반찬들, 그리고 된장국이 차려져 있었다. 정말 이게 얼마만의 집밥인가 한입 먹자마자 눈물이 날뻔했다. 한식이라 하면 당연히 식당 음식보단 집밥 아닌가. 유럽 곳곳 여행을 다니며 자르브뤼켄에 없는 한식을 보충하듯이 사 먹긴 했는데 그것들이 집밥 맛이 날리는 당연히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이 별로 없는 크로아티아에서 한국 맛을 보다니. 아주머니께서 차려준 아침밥은 내 교환학생 생활 중 잊을 수 없는 식사가 됐다.


민박집에서 준 볶음 고추장


아침밥을 먹으면서 아줌마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크로아티아는 다른 유럽 도시보다 살기 괜찮은지 나는 독일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정말 소소한 것까지 다 이야기했던 거 같다. 내가 사는 자르브뤼켄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없다고 정말 오랜만에 집밥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짐을 챙기러 방을 들어왔다. 짐을 챙기는 도중 아주머니께서 들어와 내게 볶음 고추장 하나를 챙겨주셨다. 나중에 독일에 돌아가서 밥 먹을 때 꼭 같이 먹으라고 밥은 꼭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사는 곳은 한식을 먹기 힘들다 하니 신경이 쓰이신 거 같았다. 한국인의 정이라는 게 이젠 사라졌다고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던 나였는데... 정말 너무 감동이었다. 실은 고추장은 다른 지역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저 고추장은 더 특별하게 느껴져 실제로 내가 교환학생을 마치는 그 날까지 아끼고 아껴서 짜 먹었다. 얼마 남지 않은 치약 짜듯이 끝을 돌돌 말아서 기숙사에서 마지막 식사 때까지 사용했다. 이 브런치가 카카오 메인에 뜬다면 혹시 두 분께서도 볼 수도 있을련지 모르겠다. 혹시 보신다면 그때 고추장 정말 너무 감사했다고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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