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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필 Oct 22. 2020

뭐가 그렇게 불편해?

불편한 이야기


불편충(蟲)




불편충이란 단어가 있다. 불편이라는 단어에 벌레충(蟲) 자를 합친 신조어. 직역하자면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은 벌레 같은 놈" 이란 뜻이다. 요샌 뭐만 하면 "~충"을 쓰는 단어가 많아졌다.


나는 실은 "~충" 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편을 나누고, 비판이 아닌 비난을 위한 단어 같기 때문이다. 맘충, 노인충, 틀딱충, 꼰대충 등등... 사람을 벌레로 비하하는 단어들.이렇게 따지면 세상 벌레들 천지다.



그렇더라도 나는 "불편충" 이란 단어만큼 요즘 시대에 적절하고 트렌디한 단어를 본 적이 없다. 즉, 세상엔, 특히 한국 사회엔 남들 기분을 언짢게 만들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하는 식인 벌레들이 너무 많다.


여러분들은 인터넷 기사를 보면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시는가? 는 되도록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만 해도 머리가 저릿해져오고 불편해지는 글들. 인터넷 댓글창이야 말로 불편충들의 365일 식지 않는 핫플레이이자 서식지.



위 사진의 기사를 예로 들어보자. 기사는 올 초 이태리 한인 유학생의 사고와 관련된 내용이다. 나도 이때 유럽에 있어 사고에 대해 굉장히 안타깝고 공감이 갔던 사건이었다.


댓글들을 보면 가관이다. 한 학생의 사고에 공감은커녕 나라 떠난 유학이니까 사고를 당해 마땅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더 가관인 건 그 댓글들에 공감하는 좋아요 숫자들이다.


사고의 책임에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니다. 단지 아직 스물다섯의 나로서는 어떻게 저런 말을 마음속에서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가 이다. 마치 공감능력이 결여된 거 마냥. 


이 밖의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에는 불편충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꿔 욕하는 경우, 단지 재벌가, 돈 많은 사람이라서 욕하는 경우 등등


불편충이 불편해할 팩트


자 그럼 불편충들이 불편해할 이야기를 해보자.

재밌는 건 모든 불편충들이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 다는 거다.


첫째, 그들은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불편해한다.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연예인, 재벌가이야 오래전부터 까임의 대상이었고 요샌 금수저들(실제론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아닌 경우도 많다. 일반 유학생 정도), 대기업 및 특수 직업 근로자들, 심지어는 국가 지원이 절실한 차상위계층들 마저도 불편함의 대상이 된다. 


 둘째, 그들은 논리가 결여돼있다. 엄연한 팩트가 나왔음에도 그들은 자기가 불편한 것만 주장한다. 가령 안갯길에 차량 사고가 났다 치자. 이들은 "안갯길"이라는 원인을 보지 못한다. 이들에게 보이는 건 "그러게 왜 차를 끌고 다니지?"이다. 이들에게 논리적 사고란 그저 자기들의 불편함에 근거 없는 타당함을 부여하는 행위일 뿐이다.



셋째, 자기가 맞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 한다. 모 유명 해외 영화가 나왔을 때 번역이 잘못됐다며 난리가 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번역된 문구가 요즘 미국에서 쓰이는 표현이 아니다, 내가 번역한 게 더 잘하겠다, 심지어는 번역가가 인맥을 활용해 번역일을 맡게 됐다며 번역가에게 온갖 불편함을 쏟아냈다. 이 사건의 팩트는 그 번역가 역시 여러 번의 검정을 거쳐 감독 및 스텝등 전문가들의 합의하에 그 표현을 썼다는 거다.


넷째, 내로남불의 아이콘이다. "나는 고 너는 안돼.". 코로나 확진 기사에 많이 나오는 스타일이다. 어느지역 확진 기사가 뜨면 왜 밖에 나갔냐는등 민폐라는등 오만 욕이 댓글에 달린다. 마치 자기들은 집밖에 한발자국도 안나간것처럼. 코로나 초기에는 확진자 신상을 털었을 정도였다. 단지 사회활동을 하다 운이 나빠 코로나에 걸렸을뿐인데. 굳이 신상까지 털어서 욕을 해야 속이 후련한지 묻고싶은 부분이다.


방송가에도 불편이?


요새 예능 방송들을 보면 장면마다 "방역 수칙을 준수했습니다" , "사유지에서 촬영했습니다", "주들의 협조하에 촬영했습니다" 등의 자막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방송가에게 들어오는 불편한 항의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모 사료 광고다. 애완견이 높이 뛰는 모습인데 밑에 문구에 애완견의 뛰는 모습은 합성이며 어떠한 동물학대도 없었다는 말이 추가돼있다. 광고의 주제는 "좋은사료로 인한 에너제틱한 애완견" 이지만 이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젠 광고마저도 사람들의 눈치 보면서 만들어야 한다. 물론 가학적인 행동은 없어야 되고 감시하는 행동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 타이트하게 "뭐든 걸려라" 식으로 감시하면 예술적인 도전과 다양성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미래에는 영상에 글자만 넣어서 광고하는 날이 올지도? 아니다. 그럼 문구 스타일에 대해서도 불편한 사람 생길 것이다. 가령 모 범죄자 혹은 악성 정치인이 썼던 문구라던가, 필체라던가.....



식인 벌레


불편충(蟲)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살인까지 갈 수 있다는 걸 알까? 작년, 그리고 재작년 젊은 연예인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이 있었다. 원인은 바로 불편충들의 악플때문.


들은 옷이 어쨌네, 눈이 왜 저러네, 표정은 또 안 좋네, 해당 연예인들 기사마다 쫓아다니며 악플을 남겼다.


그래, 대중으로서 연예인들에게 어느 정도 쓴소리를 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는 쓴소리를 할 사회적 혹은 도덕적 선을 넘었을 때 일뿐 이유 없이  연예인들 욕을 하라는 게 아니다. 어느 날 내가 불특정 다수에게 이유 없이 욕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우울증 없던 나도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심해지면 자살로 끝낼 수도 있겠다.


불편충들은 어떻게 느낄련지 모르겠다. 그들의 불편함의 표현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단지 살인 행위일 뿐.


조금만 편하게 살아가면 안될까


삶의 시간은 세상의 예쁘고 좋은 것들만 보기에도 모자라다. 그런데 이 아까운 시간을 세상의 어둡고 음침한 면을 보는데 써야 할까? 물론 후자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삶의 끝에 가서도 그런 선택을 하게 될까?


죽기 직전엔 살면서 겪은 모든 일이 주마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걸 보면서 어둡고 음침하게 살아온 걸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을까? 매사 불평만 하고 살아온 자신을 보면서 창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누워 창피한 과거를 되돌아보며 이불킥 하는것만으로도 괴로운데 말이다.


불편충들을 불편해하는 나 또한 불편한 벌레 한마리 일수도 있겠다. 뭐하나 행동하기도, 말하기도 무서운 요즘 시대. 서로 조금만 여유를 두고 살아가면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어릴때부터 나는 누군가 싸우는걸 보거나 언쟁을하는걸 들으면 나랑 상관이 없음에도 몸에서 열이나고 두통이나는 소심한 멘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나는 왠만한 갈등은 회피하고 웃어 넘기려는편이다. 얼마나 편한가. 굳이 내 에너지를 안좋은일에 소비하지 않아도 돼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


못된 마음을 먹으면 인상도 험악하게 변한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카메라로 녹화를 해보면 말투, 표정, 호흡에 내 모든 감정이 드러나니깐. 시 여러분들도 평소에 화가 많거나 불편충이라면  좀 더 편하게 마음 먹는건 어떤가? 인상도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받지않고. 좀 더 멋진 삶을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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