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푸에서 살아보기 6일 간 느낀 것
여행 갈 때 촘촘하게 계획을 짜지 않는 편이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녹초가 되는 걸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우리 부부의 체력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설렁설렁 다녀도 여행이 충분히 좋다. 그래서 이번 벳푸 여행 계획도 '지옥 온천 구경(7곳 전부 말고 가까운 몇 곳), 동네 온천과 맛집 가기'가 다였다. 대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그러다 보면 현지 사람들이 많이 가는 식당이 눈에 띄고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 같은 곳을 가게 된다. 경험이 쌓이면 '현지 맛집'을 찾는 안목도 생긴다.
벳푸에서 이렇게 찾은 식당이 온천 관광지 칸나와(鐵輪) 지역 골목길에 살짝 숨어 있는 사료 오오지(茶寮 大路)라는 곳이다. '큰길가 찻집'이란 이름의 일본 가정식 식당이다.
80쯤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었고 이들의 딸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 말고 손님은 모두 일본 사람. 깔끔한 밥집이었는데, 다다미방에 좌식 테이블 4개, 주방 앞 공간에 입식 테이블 몇 개가 있었다. 우리는 좌식으로 안내됐다. 칸나와 지역 명물인 지옥온천 찜(고구마, 호박 같은 채소 위주 재료를 온천 증기로 쪄 내는 요리)과 튀김정식을 주문했는데, 전채로 나온 소바 한 그릇에 그냥 반해 버렸다. 반숙 온천계란을 얹은 냉소바라니... 전혀 상상하지 못 했던 음식! 이런 게 여행의 재미다.
맥주 한 잔 곁들이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2만 원 정도에 지역 특산 요리와 회, 맛있는 전채까지 먹을 수 있으니 가성비도 훌륭하다. 그리고 일본 식당 어딜 가나 나오는 '맛있는 밥'. 쌀 품종이 우리와 같은 고시히카리가 대부분이고 우리의 쿠쿠가 성능에서 일본의 코끼리 밥통을 뛰어넘은 지 오래니, 한일 식당의 밥맛이 이렇게 차이 나는 이유는 오로지 정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잘 지은 밥이라도 아침에 미리 퍼놨다가 점심에 내면 맛이 유지될까? 일본은 추수한 쌀을 미리 도정하지 않고 유통 직전에 도정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하면 밥이 확실히 맛있다. CJ에 계신 분으로부터도 "햇반은 밥맛을 좋게 하려고 갓 도정한 쌀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여튼, 어딜 가나 기준치 이상은 하는 일본 식당의 상향평준화가 부럽다.
벳푸 시내 숙소 근처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맛있는 우동집을 찾았다. 가격은 550엔을 기본으로 몇가지 토핑을 얹으면 800~1000엔인데, 국물에서 '일본 이모 손맛'이 깊게 느껴졌다. 아내는 "먹어봤던 우동 중 최고"라고 극찬했는데, 나중에 '가격 대비'라는 조건을 덧붙이긴 했다. 소박하지만 맛있는 우동이었고, 역시 손님은 우리 빼고 모두 현지인들.
저녁이면 술 손님으로 붐비는 시장 한 가운데에는 LA ARADA라는 평점 좋은 카페가 있어서 오전 온천을 마치고 갔다. 구글맵 리뷰가 100개쯤 되는데 평점이 무려 5.0이다. 모든 평점이 만점이라는 뜻.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와 달리 외관부터 깔끔하다. 30대 중반쯤의 남녀가 운영하는데, 여성은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어서 한국말을 아주 잘 한다. 커피의 맛? 나는 잘 모르지만, 아내는 사흘 머무는 동안 이틀을 이 카페를 갔고 커피 원두를 사서 왔으니 아주 좋았던 모양이다. 좌석은 실내에 4개(그 중 3개는 2명 겨우 앉는), 겨울에는 쓸모 없는 야외 자리가 2개 있었는데, 늘 손님으로 북적였다.
비단 이 카페뿐 아니라 다른 인기 식당도 기껏해야 10~20명의 손님 밖에 못 받는 곳이 많다. 음식값이 비싸지도 않아 아무리 계산해도 월 500만 원 정도밖에 못 남길 거 같은데, 수십 년째, 심지어 대를 이어 가게 확장도 하지 않으면서 운영한다. 왜 그럴까 궁금함이 남지만 더 아는 게 없어 생각은 늘 여기서 멈춘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기가 막힌 모찌를 발견했다. 고에몽(GOEMON)이라는 과자가게인데, 알고 보니 유후인에도 있고 꽤 유명한 곳인 모양. 다른 메뉴는 모르겠고, 모찌가 벳푸에서 유명하다고 해서 크림이 들어간 모찌를 먹었는데... 쫄깃한 우리나라 찹살떡과는 달리 이 집 모찌는 한마디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움이다. 모찌인데 탄성은 최소한으로 남아 있고 그래서 끊어지지는 않지만 한없이 부드러워 안에 든 크림과 식감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어떤 블로거나 유튜버도 벳푸 설명하면서 이 집 모찌 얘기는 안 한 거 같은데... 모찌와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앞집도 가봤지만, 우리 입에는 고에몽 모찌가 세계 최고였다. 이런 게 여행의 맛이다. 한 개에 6천 원쯤 했는데, 비싸다 싶으면서도 결국은 또 찾게 되는 맛.
짧은 기간이나마 느리게, 벳푸 주민처럼 지낸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쓰고 보니 모두 먹는 얘기다. 여행의 두 중심축이 보는 것과 먹는 것인데, 나 같은 경우 후자에 더 방점을 찍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느린 여행을 추구하다 보면 많은 것을 구경하진 못 하지만 대신 깊게 느끼는 게 있다. 이탈리아 한 달 살기 기간 중 잠시 우리를 방문했던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일반적인 여행이 새로운 공간을 '보는' 것이라면 한 달 살기 같은 느린 여행은 그 공간에서 머문 '시간까지 더하는' 것 같다." 벳푸는 온천 수증기가 사방에서 솟아오르는 매력적인 해변 도시인데, 나한테는 한 해 열심히 달린 뒤 느끼는 송년의 고단함에 적절한 휴식과 편안함이 섞여 있던 2025년 말이라는 시간과 함께 기억되는 공간이다.